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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늘 Feb 08. 2024

9) 홀로서기 -변태

빚과 가족의 상관관계

9) 홀로서기 -변태


2015년. 경매에 열심히 참여했다. 1년 동안 부동산경매에 진심이었다. 처음 경매를 공부할 때와 달리 몇 개월 사이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급격하게 경매시장에 일반인들이 참여하며 경매시장이 과열됐다. 돈이 될만하고 개인이 투자하기 좋은 아파트는 낙찰가가 심하게 오르고 있었다. 급변하는 시장 속에 겨우 낙찰받은 물건지는 아파트 구옥과 다가구 주택 두건이다. 아파트는 부천 역곡역 부근으로 2회 유찰일 때 최저가로 입찰하며 낙찰이 되었다. 그리고 다가구 한 건은 낙찰되었지만 권리분석 오류와 경험부족으로 물건을 포기했다. 3천만 원을 한순간에 잃었다. 


혼인신고로 가족이 재편성되었다. 그러나 아직 아들과 합가를 못하고 있었다. 남편, 아들과 셋이 살 곳을 정해야 했다. 새 가족을 위해 이전가족과 경제적인 독립이 필요했다. '아들을 데려와 삼산동에서 계속 월세로 살아야 하나? 낙찰받은 집으로 옮겨야 하나?' 거주지를 정하는 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작은언니와 상의했다. "생활비 내면서 언니가 오정동에 살아도 되고 낙찰받은 집으로 가도 되고 두 집의 생활비차이가 있으니 결정해 줘" 결정하라고 했지만 여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


아들도 데려오는 상황에 내가 엄마에게 계속 생활비를 드릴 수는 없었다. 혼인신고자체가 가족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낙찰받은 아파트는 구옥이라서 그런 건지 평수대비 좁은 느낌이었다. 4층이라서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 엄마가 걸어 다녀야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24평 새 아파트에 살다가 21평 오래된 5층짜리 아파트는 단지 세평차이로 보이지 않았다.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인 집과 방 두 개 화장실이 한 개인 집으로 체감이 컸다. 경매로 낙찰된 집에기 때문인지 기존 주인이 집을 아끼며 사용하지 않았다. 외관만 구옥이 아니라 집안 상태도 나빴다. 그들을 이사 보내며 이사비용을 챙겨주었다. 낙찰받은 집은 90프로 대출이 되어 추가적인 목돈은 필요 없었다. 다만 이자가 발생됐다. 주택이자는 내가 부담하기로 하고 엄마가 이사 나가는 것으로 결정됐다.


24평 아파트는 임대기간 5년이 지나서 소유권이 나로 바뀐 지 몇 년이 지났다. 집을 팔고 셋이 살 곳으로 기존집이 아닌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가 살림하면서 집관리가 안되어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어도 매매되지 않았다. 엄마, 오빠, 언니 모두 흡연자로 집에 담배냄새도 심했다.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내가 내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엄마가 역곡으로 이사하고 나는 오정동으로 입주했다. 각자 두 집은 입주 전 도배를 새로 했다. 엄마의 살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24평 집은 살림이 줄어 집이 훤해졌다. 이사를 마치고 서둘러 엄마집으로 향했다. 묵은 짐이 많은 엄마살림이 좁은 집에 넘쳐나서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이사를 하고 기분이 상했던 언니와 다툼이 있었다. "결국 너는 우리를 이런 곳으로 버렸잖아." 서로의 입장만을 주장하고 우린 돌아섰다.


24평 처음으로 장만했던 내 공간, 임대아파트 내 집에 몸을 누였다. 남편이 있는 가정. 이혼 후 영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혼사실을 숨겼다. 이혼한 사람에 대한 색안경이 심할 때였다. 더구나 이혼녀가 보험영업을 한다고 하면 그 눈초리가 더욱 무서웠다. 불필요한 가면 속에서 나는 수시로 자신이 초라해지는 경험을 했다.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지만 더욱 외로워지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인터넷모임에 한동안 깊이 빠졌는지도 모른다. 이혼사실을 말하고 나를 내려놓고 나를 찾으려고 했던 공간. 가족이나 친한 친구 몇 명만이 이혼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가족도 새로운 가족이 생기면서 균열이 생겼다.


남편은 나와 합가 하면서 경제상황을 오픈했다. 빚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회사에서 대출을 받아서 기존 빚을 모두정리했다. 빚이 한 곳으로 줄었고 남편의 소득으로 시부모님 집에 생활비를 드리고 남은 돈은 전부 자신이 기존에 진 빚을 갚았다. 매달 생활에 필요한 50만 원 이상의 용돈은 전부 내가 충당했다. 그와 함께 살면서 내 부담이 늘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병원에 계셨고 시어머니 혼자 살고 계셨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폭력에 주눅 들었다는 그는 엄마에 대한 애착이 했다. 머리숱이 중학생 때부터 빠졌다던 그는 30대인데도 흑채를 많이 사용했다. 나는 세무사시험을 치르기 위해 1년 동안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하루 3시간 이상 잠을 잔적이 없자 몸에 병이 찾아왔다. 열이 40도가 넘으며 혼절했다. 119에 실려갔고 병이 났고 다시 무리하면 병이 도졌다. 병명은 급성신우신염. 신장이 몸을 제발 쉬라며 경고등을 켰다.


세무사 공부를 그만두었다. 몸이 먼저였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들과 음식점을 개업했다. 명태조림을 파는 곳으로 체인점이었다. 셋이서 5천만 원을 각자 출자하며 동업했다. 가게 위치는 범박동이었다. 보험영업과 음식점을 병행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오정동과 가게는 꽤 거리가 멀었고 담배냄새도 어느 정도 빠졌을 즈음 집을 내놨다. 가게 근처인 범박동 32평 아파트에 이사 가기로 결정했다. 몇 개월이 지나자 가게가 자리를 잡고 맛집으로 소문이 나고 잘되었다. 매출이 오르고 이익이 났다. 우리는 장사해서 번 돈을 그대로 적립했다. 목돈이 모이면 다시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함이었다.


남편은 희귀병이 있어서 아플 때는 예민해졌다. 다발성염증이 피곤하면 몸 어느 곳이든 생겼다. 남편과 잘살고 싶었다. 아들과도 그럭저럭 지내는 것 같았다. 결혼 후 몇 번 말다툼을 했다. 싸움의 원인이 된 건 집이 너무 더러워졌을 때였다. "넌 나를 사랑하지 않니?" 집이 너무 더러울 때 버거움을 느끼며 남편에게 하소연하면서 싸운 대목이다. 그는 젖은 빨래를 건조대에 걸어놓으면 그걸 다시 바닥에 널어놓곤 했다. 자신의 행동에 나름 이유가 있었다. "집이 너무 건조하잖아~ 이러면 안 된다고~" 그는 나에게 잔소리하며 빨래를 바닥으로 내렸다. 물건을 쓰면 제자리에 놓아야 하는 나와 달리 그는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 법이 없었다. 집이 깨끗하게 정리된 꼴은 못 본다는 심리인 건지 이해 안 가는 그의 생활태도에 나는 점점 지쳐갔다.


시어머님 집은 빌라였고 바로 앞에 재개발로 높은 집이 들어오게 될 예정이었다. 나는 시어머님께 이사를 권했다. 부평 쪽엔 나홀로 신축아파트들이 계속 지어지고 있었다. 시어머님의 모든 생활비는 남편이 조달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이사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집을 이사할 경우 대출이자를 납부하기 어렵다고 했다. 내가 이자를 내드리기로 하고 부모님을 설득시켰고 이사했다. 차후 빛이 안 들어오는 집에 우울증이 있는 시어머님이 사는 게 안쓰러웠다. 새집으로 이사하니 어머님은 넓고 환한 집에 만족하셨다. 그즈음 시아버지가 급성백혈병인 것을 알게 되었고 알코올병원에서 퇴원했다. 병명을 알게 된 지 2개월 만에 시아버지는 영면에 드셨다. 시어머니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3년 짧은 결혼생활이었다. 나는 3년 동안 두 번 자살시도를 했다.  인생에 두 번의 이혼이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미안했고 다시 이혼녀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자신이 없었다. 이혼 사유는 복합적이지만 간단했다. 결국 살기 위해서. 나는 그저 살기 위해 이혼했다. 이혼하기 10개월 정도 그는 무직상태였다. 내가 그에게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했다. 시어머니의 생활비도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그의 병이 자주 그를 힘들게 했고 스트레스가 과도해 보였다. 그를 살리고 가정의 평안을 위해서였다. 퇴사 후 그와 유럽여행도 한 달 동안 다녀왔다. 그 당시 여행 사진을 보면 여행을 하는 사람인지 투병을 하는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내 몰골이 팅팅부어있다.


경찰서에 두 번 신고를 했다. 맞고 자랐다는 그는 나에게 폭력을 썼다. 무지막지하게 맞은 적은 없었지만 주먹으로 때리는 행동자체가 이해가 안 됐다. 어느 날은 시어머니와 여행을 다녀오면서 차 안에서 작은 다툼이 있었다. 시어머니가 뒷자리에 있는데 주차장에서 차에서 내리더니 차량밖에서 나에게 주먹질을 했다. 시어머니가 말려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모른척했다. 폭력이 있을 때 바로 이혼도 생각했지만 두 번은 안된다는 절박함 때문에 자살하려 했다. 다행히 자살시도는 시도로 끝이 났다. 그 후 임신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유산했다. 유산 후 수술한 것이 문제가 되어 병이 생겼다. 핏줄들이 엉겨 붙어서 커지면서 복통이 유발됐다. 병원에서는 자궁을 들어내거나 핏줄제거 수술  과다출혈로 사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무서웠다. 죽을 수도 있다니, 살고 싶었다. 나에겐 지켜야 하는 가족, 아들이 있었다. 살아야 했다. 수술은 다행히 큰 수술 없이 약물치료로 상태가 좋아졌다. 아픈 수술이라고 하더니 진짜 많이 아팠다. 시술을 하고 이틀째 쉬는 날 남편이 아무렇지 않게 밥을 달라고 했다. '아픈 몸으로도 저 사람 밥을 챙겨야 하는구나! 더러운 집도 내가 치워야 하는구나.' 힘들고 지치고 버거웠다. 그만, 이 모든 걸 멈추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수술 직후 몸이 아픈데도 여행 며칠 다녀오라며 돈을 입금 해 주었다. 그가 여행길을 혼자 떠나며 집을 나섰다. 나는 그 순간 혼잣말을 내뱉었다 "휴~ 살겠다." 그 순간 깜짝 놀랐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나에게 그는 그런 상황에 조차 내곁에 없을오히려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이혼하고 진정한 홀로서기를 하기로 했다. 그에게 커피숍에서 이야기하자고 하고 집이 아니 다른 공간에서 말을 꺼냈다. 그에게 그동안 느낀 것을 말하고 이혼하자고 말했다. 단호한 내 태도에 그는 이혼을 받아들였다. 이혼 후 그는 범박동으로 이사하며 집명의를 그로 했다는 이유로 집값 오른 것의 반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가 나와 살면서 단 한 푼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3년 동안의 짧은 결혼생활동안 나는 그동안 겪지 못했던 자산의 감소를 경험했다. 그와 살면서 모았던 돈 중 40프로가 사라졌다. 그는 외식을 좋아했고 씀씀이가 컸다. 나는 호방하게 그 모든 것을 허용했다. 그 결과 많은 돈이 사라졌다. 그와 이혼서류를 쓴 다음 며칠 후 다시 법원에 갔다. 개명신청을 했다. 죽여야 살 수 있었다. 나는 두 번이나 이혼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에 실패한 를 죽이고 하늘이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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