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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늘 Feb 29. 2024

5) 나만의 공간 49m2

집의 의미

5) 나만의 공간 49m2


29살, 이혼 전까지 소비를 최대한 제한했다. 가족을 위한 소비는 최우선으로 했지만 나를 위한 소비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혼 후 나를 위해 돈을 쓰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을 사 먹으며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누가 봐도 40대 아줌마 같았다. 29살의 이혼녀에게 큰 인심을 쓰듯 향한 곳은 미용실이다. 머리 자르는 비용도 아끼느라 노란 고무줄로 묶고 다녔다. 찰랑찰랑 생머리를 휘날리고 다닌 게 아니다. 머리를 기르고 싶어서 정돈하며 예쁘게 기른 게 아니다. 반곱슬머리라서 긴 머리로 다니려면 여러 가지 관리가 필요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미용실에 가지 않아서 제멋대로 머리가 길어졌다. 길어진 머리는 늘 묶고 다녔고 예쁜 나이에 흔한 화장기도 없었다.


 "머리 어떻게 해줄까요?" 미용실에 얼마 만에 왔는지 미용사님의 물음이 어색했다. 싹둑 잘라버리려고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를 다듬고 파마를 했다. 당시 유행하는 스타일을 한번 정도 해보고 싶기도 했다. 파마를 했더니 완전 폭탄머리가 됐다. 역시 함부로 연예인 머리를 하면 안 된다는 걸 거울을 보며 깨달았다. 얼굴과 어울리지 않다고 머리를 다시 할 순 없었다. 최소 6개월 이상은 본전을 뽑아야 했다. 머리가 커져서 모습이 마치 숟가락 같았다. 이혼 후 살이 계속 빠져서 비쩍 말라있었다. 키가 166인데 성인이 된 후 몸무게가 50킬로그램이 안된 건 그때가 유일하다. 파마머리를 풀어놓으면 마치 미친 x처럼 산만해 보였다. 산만한 머리로 회사에 다녔다.


돈은 벌줄 만 알았지 쓸 줄은 몰랐다. 쓰면서 배워갔다. 돈을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느끼고 있었다. 언니와 함께 살면서 둘이 제주도 여행도 다녀오고 엄마를 모시고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맘먹고 큰돈을 쓰러 함께 간 곳은 안과다. 랜즈를 끼고 다니거나 안경생활을 했는데 당시 라식수술이 대유행을 했다. 광고를 어찌나 해대던지 어디를 봐도 라식광고로 넘쳐났다. 초창기라서 수술에 대한 위험도 있을 때였다. 병원마다 홍보가 한창이었다. 큰 병원이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강남 쪽으로 갔다. 모든 신기술은 강남에서 먼저 흥행했다. 150만 원의 큰돈이 필요했다. 안경이나 콘택트랜즈도 싼 편은 아니라서 장기적으로 생각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검사를 고 수술이 가능한지 먼저 테스트했다. 수술날짜를 잡고 병원으로 갔다. 두근거리며 수술을 받고 집에는 눈을 감고 언니와 함께 집으로 왔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눈을 뜨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사물이 또렷하게 보인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나? 새삼스러웠다. 작은언니도 바로 라식수술을 했다.


친정식구들과 합가를 한 후 지출이 늘었다. 큰맘 먹고 이직도 했다. 보험영업을 시작하면서 머리 스타일은 단발로 깔끔하게 잘라버렸다. 아등바등 살면서 인내하고 포기했던 여행을 내 인생에 확실한 여정으로 들여왔다. 국내여행에 이어 해외여행도 알아봤다. 첫 해외여행은 신혼여행이었다. 두 번째 해외여행은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을 계획했다. 작은언니, 엄마 함께 보라카이를 다녀왔다. 필리핀은 위험하다는 인식에 패키지여행으로 다녀왔다. 보라카이 이후 패키지여행과는 아듀를 고했다. 2년에 한 번 정도 해외여행을 갔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자유여행에 대한 팁을 얻을 수 있었다. 자유여행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여행의 지평이 열렸다. 친구들 혹은 가족들과 여행을 정기적으로 했다. 국내여행 부산, 강원도, 경주, 남해 등 이곳저곳을 다녔다. 해외여행을 살펴보니 사이판도 가고 싶어서 떠났다. 그리고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을 보고 작은언니와, 친구들과 함께 여자 넷이 발리여행도 했다. 여행에 쓰는 지출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영업을 하면서 자리도 잡았고 급여도 안정이 되었다. 소득이 꾸준하게 늘면서 더욱 일도 열심히 하고 재미가 붙었다. 투자를 하면 그대로 이득을 보았다. 그렇게 3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안산 아파트를 팔고 인천 삼산동 21평 아파트를 4천만 원을 투자해 갭투자로 샀다. 친구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 적은평수는 세금도 많지 않아 투자가 용이했다. 작은언니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같은 부모 아래 작은언니와 나는 동지였다. 고통분담을 나눠했고 서로 지지했다. 내가 자주 엄마 때문에 힘들어할 때마다 언니가 아주 큰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첫 투자였던 초지동집으로 번돈을 작은언니와 나눈다는 개념도 좋았다. 인천 삼산동 21평 아파트 하나를 갭투자로 사서 언니에게 선물했다.


대한민국 중년남자들 중 가족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기사를 읽으며 공감이 되었다. 나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가장으로 살면서 나도 모르게 지치고 힘들고 버거움을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힘들었다. 늦게까지 일하고 집에 들어가서 잠만 자는 시간이 지나갔다. 35살, 그맘때 나는 일부러 더 밖으로 나돌았다. 가족들 사이에 겉도는 것 같고 이방인 같았다. 그들과 함께 있는 게 싫고 힘들어 피하고만 싶었다. 마음은 좀처럼 괜찮아지지 않았다. 가족들과 떨어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집을 나가기로 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다.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야 살 것 같았다. 생활비가 이중으로 들겠지만 그대로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친구가 산집에 세입자를 구해야 하는 시기라서 삼산동 49m 2인 집에 월세입자로 들어갔다. 내가 나를 위해 사용한 돈으로 가장사치스러운 금액이었다. 각 집의 생활비, 월세, 공과금 등으로 지출이 늘었다. 그러나 살 것 같았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니 가족을 대하는 마음도 다시 편안해졌다. 쉬는 날 집에서 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49m 2 공간이 모두 나의 공간이었다. 휴일에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집에서 책 읽고 차를 마시며 빈둥거릴 수 있었다. 마치 집이라는 나만의 공간으로 여행을 온 것 같았다.


혼자만의 공간에 혼자만의 시간을 누렸다. 놀거리도 새롭게 찾았다. 한가롭게 집에서 핸드폰으로 인터넷도 누볐다. 그러다 인터넷 카페모임을 몇 개 가입했다. 여행, 취미에 관한 카페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싱글모임을 알게 되었다. 호텔에서 행사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의 친목모임에 참여했다. 카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서로 글을 공유했다. 모임을 참석한 후 후기글도 있어서 글만 보더라도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3,40대 가 대부분이라서 그런 건지 미국, 유럽 등으로 여행을 간 사람들의 글이 자주 올라왔다. 오랜 시간 동안 버킷리스트였던 유럽여행이 가고 싶어 졌다.


2014년 그렇게도 바라던 여행을 준비했다. 유럽배낭여행. 한 달 동안의 유럽여행은 다른 해외여행과 다른 의미였다. 기간도 한 달을 잡은 거라서 특별했다. 또한 회사에서 팀장자리를 비워 야했기 때문에 일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여행은 14살 때부터 꿈이었던 여행지다. 반드시 그곳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큰 사고를 친 것처럼 여행사에 돈을 송금했다. 자유여행이지만 초심자를 위해 몇 가지를 준비해 주었다. 비행기표, 유레일패스, 숙박, 여행 루트를 정해주었다. 일정변경은 미리 원한다면 할 수 있었다. 나는 어디가 어딘지도 몰라서 짜주는 대로 일정을 소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행비용은 1천만 원정 계획했는데 8백만 원 정도가 들었다. 한 달 치 생활비까지 필요했으므로 1천3백만 원이란 거금을 소비했다.


49m 2라는 나만의 공간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낼 수 있게 자존감을 일깨워 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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