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픈 것도 많고 미련도 있는 나니까!
하나는 비프(성난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걸스 파이브 에바다.
비프는 1화를 보고 너무 재미있어 이틀 만에 다 보았다.
도급업자 대니와 사업가 에이미가 난폭운전을 계기로 서로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인데 원석같이 반짝거리는 파격적인 전개에 스티브 연과 앨리 웡의 열연이 더해져 에에올(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걸스 파이브 에바는 90년대 히트송 하나로 반짝 떴던 5인조 걸그룹이 자연스레 해체 후 40대에 다시 재결합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담은 코미디인데 음악이 제법 좋고 캐릭터가 매력적이라 상당히 재밌다.
비프도 그렇지만 특히 걸스 파이브 에바를 보면서 저렇게 웃긴 대본을 나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아서 간결하게 나열하겠다.
윤동주 같은 청아한 글귀를 쓰는 시인
어린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동화작가
어째서 희망했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배우, 가수(SM 걸그룹), 사진작가
절절한 울림을 주는 대본을 쓰는 드라마 작가
젤리가 너무 좋아서 꼭 도전하고 싶은 젤리 개발 연구원
영화의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좋아서 되고 싶었던 영화평론가 (하지만 깊지 않은 식견으로 불가능함)
미식가 (섬세한 맛 감지 불가로 접었음)
공짜로 먹고 싶어서 - 유서 깊은 냉면 맛집의 며느리, 엄청 맛있는 빵집 며느리
연애가 어려운 많은 사람들에게 인연을 찾아주고 싶어서 연애어플 기획자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프로파일러
특정 희망 분야는 없으나 성공한 사업가
간지 나는 실력을 갖춘 번역가(영어)
도도한 이미지의 냉철한 두뇌를 가진 섹시한 인사담당자
소싯적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서 드라마 작가 기초반을 수료했다.
회사를 다니며 수강했고 수업 시작이 저녁 6시 30분이었기에 불가피하게 칼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팀장님이 나를 불러 넌지시 말씀하셨다.
'그쪽으로 생각이 있다면 회사를 그만두고 해 보는 게 어떻겠나?'
그 말인즉슨 매주 수요일에 일찍 퇴근을 하지 말고 아예 회사를 그만두던지, 지금 배우는 것을 그만두던지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이었다.
당시 대리였기에 꿈을 좇아 회사를 그만두기에는 이미 경력(사원-주임-대리순)이 있는 편이어서 배움을 멈췄다.
휴일에 종일 대본을 쓰고 대사를 읊으면서 수정하다 결국 내 이야기에 스스로 질리는 생활도 쉽지 않아서,
재능도 막 특별하지 않은 것 같아서 겨우 단막극 대본 2개를 완성하고 멈추었다.
생각해 보면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내고 사건을 구상하기 위해, 평소 성격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다양한 경험을 몸소 실천해 보는 것이 꽤 재밌었는데...
그 이후로는 어려운 직무 자격증을 간간히 따며,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을 퇴근 후 티비를 보는 것으로 희석시키며 살았다.
어쩌면 '끈기 부족이겠지'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그래봤자 7년 사회경험에 불과했지만)을 포기하고 자처해서 바닥에서 시작하려는 용기도 부족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도 부족했다.
본가에서 상경했을 때 대학로에 자주 갔었다. 내가 살던 지역에는 연극을 비롯한 문화 공연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서울에 살면서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는 연극을 보는 것이었다.
그래, 아직도 기억난다. 의자가 빼곡한 소규모 공간에서 많지도 않은 관객들 앞에 열연하던 이름 모를 배우의 모습이...
하루는 어느 배우에게 너무 감동한 나머지 싸이월드에 감성 짙은 일기도 남겼다. 대략 내용은 '나도 저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지켜보는 이들에게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지'였다.
이 글을 쓰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초등학생 때 연극부를 했었다. 춘향전으로 시에서 주관하는 연극대회까지 나가서 월매(연기력이 돋보여야 하는 역할로 생각하고 자원함)로 우수상까지 받았다.
낯가리고 내성적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희번덕거리며 춘향이를 목놓아 부르던 나는 천상 배우였을까?
우연히 알게 된 동네 이웃이 있었다. 그는 연극배우였지만 감초인 멀티맨으로 활동했고 생업으로는 무리였기에 젊은 나이에 마을버스 운전과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멋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경제 사정, 사회적 인식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으로 힘들어 보였다.
그 사람처럼 고달프게 사는 게 싫어서 나는 그 어느 것에도 용기 있게 뛰어들지 않았다.
열거한 꿈 중에서 그나마 이루는 중인 꿈은 도도한 이미지의 냉철한 두뇌를 가진 섹시한 인사담당자와 작가(수줍지만 브런치)
에에올을 감명 깊게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긍정주의자다.
시간도 늦었고 슬슬 졸리기 때문에 '알파 웨이먼드'의 명대사로 급히 마무리한다.
아니야 모르겠어? 당신이 실패의 길을 택했기에 다른 에블린들이 성공한 거야
다른 인생으로 가는 길은 보통 몇 개 안돼.
그런데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무엇이든 너무 못하니까.
But you, here...
You're capable of anything.
Because you're so bad at everything.
내 브런치가 다양한 꿈의 여정을 기록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