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마감 쳐야 되니까
아홉 살배기 학생이 내가 맨날 키보드 두드리고 있으니 다가와서 물었다.
-뭐하세요?
-응, 글 써.
-맨날 써요?
-응, 맨날 써. 죽을 거 같애.
-그럼 왜 써요?
-..............
순간적으로 대답이 안 나왔는데 거기에 혹시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는 걸까…
공연 연습 초기에는 대본의 전체 틀을 바꿔서라도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적극적 수정을 한다. 그래서 초반에 연습 자주 나가려 노력하면서 대본을 수정했다. 근데 생각보다 전체를 흔들고 부분을 다시 써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2주 동안 집 밖에 못 나가고, 쓰레기는 버리지 못해 날파리 꼬이고, 옷은 맨날 똑같은 착장, 빨래 못 해 수건이 없고, 밤낮 글만 쓰다가 팀이 연습하는 동안에 생계를 위한 직업활동하고, 방송통신대 기말고사는 어쩔 수 없이 포기, 약속 포기, 바람쐬기는 사치, 차는 일주일씩 주차장에서 대기.
연습 시작 전까지는 수정대본을 넘겨줘야 그날 연습이 원활할 거기 땜에 평일 6시와 주말 2시는 매일의 마감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밤에 잘 때는 그날 쓴 대사 생각하면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아 밥 빨리 먹고 고쳐야지 그 생각만 했다. 솔직히 이건 별로 사람 사는 거라고는 말할 수 없어요. 아. 나는 글을 왜 쓰는 걸까. 근데 그런 원론적인 의문도 어느 순간엔 사치다. 쓸 일 있으면 무조건 부지런히 써야 한다. 한가하게 그런 사적인 문제제기로 굴릴 두뇌회로가 있으면 다음 장면 대사나 생각해.
넵. 그래서 열심히 썼어요. 솔직히 마지막엔 몇 군데는 연출님한테 떠넘겼어요. 그래도 이만하면 대본은 완성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누가 제발 그렇다고 좀 말해줘요)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라는 시를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의 뒷부분을 다음과 같이 변용하고자 한다.
괴롭고 무능함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탈고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개돼지같이 생긴 나 자신이여.
술을 마시자.
그래서 네 캔에 팔천원 하는 칭따오를 종류별로 때리고 누웠다가 오늘 오전 내내 누웠다가 계속 누웠다가 웬만하면 누웠다가 허리가 아파서 일어났다는 이야기.
글을 한참 쓸 땐 내가 글을 왜 쓰는가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없어서 안 한다.
글을 쓰지 않을 땐 굳이 평화로운 지금 그걸 고민해야 할까? 싶어서 안 한다.
그냥 이제부터 일분 일초를 진심으로 멍때리며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