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동쪽은 집에서 멀다. 운전해서 한 시간이나 걸린다. 제주도에 이주한 뒤부터는 30분 이상 걸리면 어디든 매우 멀게 느껴진다. 진짜 제주를 느끼려면 제주시보다는 협재나 한림인 서쪽, 함덕이나 조천의 동쪽 그리고 남쪽인 서귀포를 가야 한다. 그러나 그곳은 모두 집에서 30분 이상 이동거리가 있는 곳들이다. 제주살이 8년 차가 넘어가니 동쪽, 서쪽, 남쪽 어디든 크게 관심이 없고 갈 생각도 줄었다. 태어난 지 백일경 제주에 온 둘째는 바다나 산을 보고 크게 놀라는 일이 없다. 풍경이 어떤지 물어보면 좋다고는 하지만 이 자연은 아이에게 그저 생활인 것이다. 이런 환경이 익숙한 나의 아이들과 함께 사실 성인인 나 또한 감각이 무뎌졌다. 바다를 봐도 ‘바다구나.’ 산을 보면 그저 ‘산이구나.’ 한다.
바쁜 와중에 갖는 여유라야 그것이 여유인 것처럼 자연도 그런 것 같다. 그러면 도시에서 건조한 마음으로 살다가 가끔 자연을 즐기는 것이 더 좋은 일인가?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언제나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삶이 항상 편안하고 행복하지 않겠는가?
제주살이가 몇 년째인데 아직 가지 못한 오름이 산더미다. 어떨 때는 마치 다 정복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제주가 고향인 우리 직원들은 오름에 오를 생각이 별로 없다. “원장님, 오름은 오르는 게 아니라 보는 거예요.”라고 나에게 경고하는 그녀들의 삶의 여유가 부럽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오름을 보고도 숙제처럼 여기지 않다니.
글짓기 동무의 용눈이오름 글을 보고는 올해는 꼭 가야지라고 마음먹은 그 유명한 곳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광복절은 행사로 바쁜 남편은 제외하고 김영갑 갤러리를 다녀오신 뒤 용눈이 오름을 한번 가자고 노래를 부른 친정아버지와 함께 날을 정했다. 알아보니 경사나 거리가 무릎이 안 좋은 친정엄마도 가실 수 있을 것 같아 “엄마 다리 아파도 한번 가요.” 하며 꼬셨다.
그렇게 폭염이 계속되는 광복절에 오름을 오르겠다고 길을 나섰다. 옆동네 마실이 아니라 여행 온 거라 생각하면 그게 바로 여행이다. 오후 1시 30분경 도착하였으니 제일 더운 시간이다. 다행히 중산간이라서 그런지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있었다. 동쪽은 원래도 바람이 많은 지역이다. 용눈이 오름은 사실 나지막한 언덕이 풀로 뒤덮인 작은 동산이다. ‘이 작은 동산이 뭐가 그리 좋길래’로 시작한 산행은 오르면 오를수록 좋았다. 오름에서는 제주 동쪽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었는데 그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엄마, 여기 우리가 사는 제주도 맞아?”
“그러게. 우리가 이렇게 예쁜 곳에 살고 있는 거였네...”
오름이 너무 가파르면 힘들기만 한 기억으로 남기도 하는데 심지어 경사도 완만한 편이고 주변에 온갖 벌레들 우는 소리와 나비들의 짝짓기가 한창인 모습이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큰아이는 나비 사진과 풍경을 찍느라 바빴고 다람쥐 같은 둘째 아이는 이미 한달음에 오름을 오르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친정엄마를 벗 삼아 아빠는 웬일로 자상한 모습이시다. 지팡이에 의존한 엄마는 혼자 갈 테니 먼저 가라며 소리치셨지만 두 분이 함께 마지막까지 걷는 모습에 내가 다 뿌듯했다.
정상에 올라 한껏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가족사진으로 추억을 기록한 후 내려오는 길은 아쉬웠다. 폭염이 한창이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주었고 한 시간 정도의 산행은 운동으로 적당하였다. 완주를 걱정했던 친정 엄마도 무사히 도전을 마치셨다. 용눈이 오름을 오르는 이들은 대부분 관광객인 듯했다. 슬리퍼와 반바지로 오르는 사람도 있고 사진을 찍으려는지 큰 카메라를 들고 오르는 이, 치마를 휘날리며 한껏 멋을 부린 커플, 혼자 여행을 온 건지 배낭을 메고 오름을 오르는 여학생 등 여러 사람들을 지나쳤다. 한 커플이 시끄럽게 음악을 틀고 가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나의 불편한 눈빛 때문인지 곧 음악을 껐다. 살랑이는 바람에 약간의 거슬림은 날려 보내고 다시 조용히 걷기를 시작하였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일인당 하나씩 챙겨간 물은 이미 다 마셨고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타령을 하였으나 주차장에 작게 자리 잡은 가게는 코로나 이후 문을 닫은 것 같다. 몇 년간의 휴지기를 가진 용눈이 오름을 다시 걷게 된 지가 겨우 한 달이 넘었는데 앞으로도 잘 보존이 되려나? 이미 탐방로 외에 길이 나 있는 걸 발견했는데 또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하는 걱정이 앞섰으나 여기 오는 이들은 모두 오름을 사랑하는 이들이니 함부로 하지는 않겠지라는 믿음으로 나의 기우를 접었다. 사철이 좋다는 용눈이 오름은 가을에 한번 더 방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함께 자연을 경험하는 일을 자주 해야겠다는 오늘의 다짐이 지속되길 바라며 그렇게 산행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