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의사 며느리
시부모님을 대하는 자세에 관한 이야기
살면서 가슴 뛰거나 긴장되는 순간이 언제인가?라고 물으면, 수능 전날, 중요한 면접이나 대회당일 등을 떠올릴 것이다. 소심함의 극치인 성격의 사람으로서 시험기간에는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는 것이 일상인 나에게도 시험은 매번 그런 일이었다. 숱한 시험으로 단련이 된 나에게 인생에서 가장 긴장된 시간은 바로 결혼 전 시부모님을 처음 뵈러 가던 날이라고 답하겠다. 과하게 장식된 꽃바구니를 안고 미래의 남편이 될 남자의 차를 타고 시부모님 댁으로 가던 그날은 마치 목에 쇠줄이 걸려있는 마냥 답답했고 동반된 두통과 함께 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들었던 것 같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던 내 행실에 대한 부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었다. 크게 잘못을 하고 살지도 않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런 일을 만들 일도 없었지만 남의 시선은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별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부모님이라는 영역은 나에게 신경을 써야만 하는 새로운 분야였다. 마치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을 맞닥뜨린 것 같은 시간은 언제나 어색하고 불편하여 견디어야 만 했고 그건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지만 어려워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몇십 년을 남남으로 살아온 남자와 삶을 살아가는 것만도 벅찬데 내 부모가 아닌 분들을 부모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며 심지어 무언가를 바라실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 또한 부모님과 조금은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하고 몇 년을 남편 없이는 시부모님과 따로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았다.
사실 시부모님은 근처에 살고 계셔서 한 달에 적어도 3-4회는 식사를 같이 했기 때문에 나의 할 일은 다 했고 너무 잘하고 있는 며느리라고 스스로를 여기며 살았다. 더 이상의 것은 부모님이 나에게 바래서는 안 된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 지냈던 것 같다. 사실 시부모님은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분들도 아니셨고 잔소리도 한 번을 하신 적이 없었는데도 내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공포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좀 더 잘하거나 친하게 지내면 나에게 더 요구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둘째를 낳고 조리원에 있는데 시아버님이 혼자 찾아오셨다. 결혼한 지 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어머님 없이 아버님 혼자 오신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오시자 마자 대뜸 말씀하셨다.
“네가 좀 더 잘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드는 생각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지? 일하며 육아하며 매달 3-4회 부모님 모시고 식사하는 이 정도 잘하는 며느리가 어디 있다고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 하며 억울함이 솟구쳤다. 그리고 이어진 아버님의 서운한 말씀들이 나의 뇌리에 박혔고 그것은 장기기억으로 남을 터였다. 출산한 지 일주일도 안된 며느리에게 ‘네가 잘했으면 조리원비도 대줄 수 있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아버님이 미웠다. 조리원 식당에서 아버님 말씀을 들으며 눈물 콧물을 비 오듯이 뱉어내는 며느리를 뒤로한 채 아버님은 쓸쓸한 뒷모습을 만 남기고 가셨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조리원에 들른 남편에게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이야기하면 아버지께 전화해 난리 칠 게 분명했고 그런 행위가 부모님과의 관계에 도움이 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조건 내편이 되어줄 남편이지만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조리원에서 우울한 상태로 지내며 결혼 한 뒤 처음으로 시부모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동안의 나의 행실이 부모님께 어떻게 비추어졌을지, 정말 나는 내 역할을 잘하고 있었던 건지 하는 생각들은 인간과 인간이 친해지려는 행위와 욕구에 관한 것까지 이어져 머리가 어지러웠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갑자기 데려온 의사 며느리. 나이 든 아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나쁘지 않은 조건에 무조건 허락은 해 주었고 몇 년간 아무것도 바란 것도 없이 마음에 안 들어도 말 한마디 안 했는데 자기 일하느라 바쁘다며 따로 연락 한 번 없고 만나도 조용히 있다만 가는 그런 여자가 나였다. 정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그런 태도에 부모님은 아마 오랜 기간 서운하셨을 것이다. 나 또한 변명이라면 할 수 있었지만 그건 내 행위를 정당하게 만들기 위한 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을 진심으로 내 부모로 받아들였는가. 내 부모만큼은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그분들을 걱정하고 위한 적이 있었던가. 그저 요식행위로 며느리라는 자리를 채우고 있지는 않았나 돌아보니 그동안 내가 해왔던 행위는 정말이지 시부모님을 피하는 며느리의 모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른 인간관계는 요식행위들로도 지속해 갈 수 있고 그러다 말수도 있지만 가족은 다르다. 나의 숨이 끝날 때까지 함께할 이 관계를 나는 조금은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며 노력이란걸 해 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작은 수고로움조차 아까워하며 스스로를 잘하고 있다 포장하며 살아온 내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다행히도 나의 며느리역할에 대한 반성은 긍정적인 결론으로 이어졌고 우수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세워보기로 하였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