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였던 대학 동기가 중년에게 건네는 위로
가족들의 건강 이슈가 폭발했던 봄날 한가운데.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직장일과 간병을 병행하며 일주일 여를 지냈다. 병원은 병원대로 엄마와 오빠 상황을 챙겨야 했고, 집에 가서도 혼자 계신 아버지 식사와 집안일을 챙겨야 했다. 엄마가 입원한 병동은 간호간병통합병동이 아니라서 보호자가 필수로 상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간병인을 구하는 것도 직접 나서서 해야 할 일인지라 당장은 몸으로 뛰며 해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낮에 일하고 밤샘 간병이란 것이 하루 이틀은 어찌어찌 보냈지만, 연달아 4-5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니 나조차 나가떨어질 지경이었다. 아픈 엄마를 남에게 맡긴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더 오래 더 좋은 컨디션으로 돌보려면 전문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그렇게 전문 간병인을 구하고 집에서 잠을 자게 된 어느 날 저녁. 뜻하지 않은 메시지가 왔다. 대학 동기로부터 온 안부였다.
- 잘 지내나?
작년 말, 대학 입학 00주년을 기념한다고 모교에서 모임을 주최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졸업 후 그간 만나지 못했던 동기들 몇 명을 만났는데, 그 친구 중 하나였다.
- 잘 못 지냈다가 한숨 돌리는 중.
- 웬 한숨? 잘 못 지냈다가 한숨 돌린 건... 잘 지낸다는 거지?
오랜만에 안부 메시지에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서로의 간단한 근황을 나누었다. 가벼운 이야기들 사이에 친구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이슬비에 살짝 젖은 익숙한 장소였다. 학교 다닐 적 집회 장소로, 소풍 느낌으로, 도란도란 동기들과 이야기 나누던 노천극장.
친구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바로 윗 학번 선배와 함께 학교 인근에서 추억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비 오는 날에 어울리는 모둠 전에 막걸리를 한 잔씩 하고,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 들고 찾은 노천극장. 익숙한 풍경 사진과 짧은 메시지는 내게 타임머신이 되어 주었다. 엄마와 오빠까지 힘겨운 투병 중이라 간병에 지쳤던 나는 잠시 그 타임머신을 타고 철없던 시절로 돌아갔다. 그렇게 이어지던 대화는 엉겁결에 조만간 만나자는 약속으로 이어지고 끝이 났다.
잔인했던 4월이 지나고,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한가운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마침 친구의 생일도 나와 같은 5월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새내기 시절 동기들끼리 매월 생일 맞은 친구들을 챙겨주었던 터라 내친김에 축하 문자를 보내고는 5월이 가기 전에 만나자는 약속을 실행하기로 했다. 엄마의 2차 항암 일정을 마무리 한 5월의 끝자락이었다.
나는 간병인의 삶을 사느라 염색을 못 한 지 석 달이 넘어가는 바람에 새치가 가득했고, 풍성하고 힘 있는 모발로 머리숱이 많았던 친구도 시간의 더께가 느껴졌다. 서로 각자의 현실에 바쁘게 살아가느라 만나지 못한 것이 수십 년이지만, 그 시간이 무색하게 새내기 시절 어린 20대로 돌아간 듯 티키타카가 통했다. 학교 인근 골목골목 그 시절 있었던 추억의 가게 이름을 떠올리며 숨바꼭질하듯 찾는 상황만 아니라면, 흡사 학과 행사 모임을 위해 사전답사 하던 시절 그때와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쉽게도 그 시절 그 이름 그대로 남아 있는 가게는 한 곳도 찾을 수 없었지만,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걷는 저녁은 현실의 무게를 잠시 잊을 만큼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렇게 얼마간 누볐을까, 힙한 가게들 사이에 조금은 시간의 무게가 느껴지는 한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 가벼운 근황을 나누며 시작된 이야기는 기대보다 신선하고 즐거웠다. 학창 시절 MT와 축제 에피소드는 다시 떠올려도 웃음 버튼이었고, 각자 추억하는 학생 집회며 교수님들과 얽힌 이야기는 화수분 같았다.
그러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 나의 현재와 친구의 과거가 겹치며 제법 진지해졌다. 나는 최근 몇 년간 엄마의 암 진단과 그 이후 이어지고 있는 날들 속에 경험하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담담하게 시작했지만 워낙 힘겨웠던 4월을 보낸 직후라 마음의 요동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누군가의 삶의 마지막을, 그것도 가장 가깝고 깊은 관계로서 엄마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겪는 고통을 이야기했다. 더구나 하나뿐인 오빠가 해외에 살고 있다는 것, 게다가 잠시 귀국했다 큰 병을 알게 되고, 무사히 수술을 마친 후 바로 어제 다시 돌아갔다는 것을 말했다. 오빠는 출국은 오빠가 이룬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건강을 회복해 간다는 뜻이니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면서도, 부모님의 마지막은 온전히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무겁다고 했다.
오빠가 가족들과 함께 해외로 이주한 지 햇수로 9년이 지났다. 해외 이주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화로 처음 들은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순간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나 혼자 장례식장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장면이었다. 당시에는 부모님 모두 누구보다 건강하셨기에 왜 그 장면이 떠올랐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상상인 줄은 알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 두렵다고,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 같아진다고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 핏줄만 가족이 아니잖아. 네가 힘들면 뭐든 이야기해. 내가 안되면 우리 동기들 모아서라도 같이 할게.
- (핏줄만 가족이 아니라고...?!)
무심한 듯 툭 던진 말에 감동받기엔 아직 이르다는 듯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이어갔다.
19년 전, 그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에서 받은 첫 월급으로 부모님께 내복을 선물하던 그 시절, 친구는 흔한 선물 대신 종합 건강검진을 선물했다고 했다. 값비싼 선물이기도 했거니와 건강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드렸다는 자부심이 사리지기 전, 건강 검진에서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던 친구의 아버지는 1년도 채 못 되어 암 판정을 받으셨다고 했다. 그것도 3개월 여명이라는 진단으로... 청천벽력 같았던 소식.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도 못한 채, 직장에서 출장 명령을 받고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해외 출장에서 귀국 하루 전 날. 친구의 아버지는 유명을 달리하셨다. 무슨 정신으로 귀국해서 장례식장을 지켰는지, 지금도 그때가 아득하다고 했다.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만큼 감정이 억압되어 있던 탓일까, 장례식 내내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고, 기계적으로 조문객을 맡고 상주 자리를 지키면서 자신을 불효자라 자책했다고 했다. 억눌렀던 감정은 장례 후 일주일이 지나서야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멈출 수 없을 만큼 통곡하고 울분을 터뜨린 후에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조금씩 실감 났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
- 그래도 난 네가 부럽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 (내가 부럽다고...!)
- 넌 아픈 엄마라도 이야기할 수 있잖아. 손도 잡을 수 있고... 아직 살아 계시니까...!
세상에서 가장 존경했던 아버지와의 작별을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없이 보내드린 후, 직접 전할 수 없던 다정한 말, 감사의 마음을 어찌할 수 없던 막막함을 이야기하는 친구가 안쓰러웠다. 그렇게 친구는 나의 안타까운 현재를 공감하고 과거를 의미를 되살려 주었다. 자신보다 19년을 더 살아 있는 엄마와 함께 보낸 특별하고 소중한 시간에 대해서…
- 내가 너보다 공부는 못했지만, 먼저 경험한 것도 있으니 이렇게 아는 척을 하는구나. 어쨌든 힘들 땐 혼자서만 감당하지 말고 언제든 이야기해.
혹여 위로가 아닌 실례가 될까 마음이 쓰였는지 친구는 농담까지 섞여가며 슬쩍 물러서는 배려도 할 줄 아는 의젓한 어른이었다.
이후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이어졌다. 결국 맥주와 캔 커피를 하나씩 사 들고 오늘 만남의
시작이 되었던 노천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돌이표처럼 대학 입학 때부터 각자가 기억하는 학창 시절 에피소드를 한참 더 나누고 추억하고 나서야 헤어졌다.
그날 이후, 친구가 했던 말이 계속 떠오른다. ‘핏줄만 가족이 아니‘라던 말은 그간 나의 힘든 시간을 위로해 주고 응원해 주고 기도해 준 사람들을 새삼 떠올리게 해 주었다. 정말이지 나를 버티게 한 것은 그런 고마운 마음들 덕분이었다. 오래된 인연은 새삼 고마웠고, 오랜만에 만난 인연도 깊이 마음을 나눌 수 있어 든든했다. 나 혼자만 겪는 일이 아니고, 나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동안 느껴졌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지금 엄마가 내 앞에 숨 쉬고, 눈 맞추고, 손잡을 수 있다는 것에, 살아 계시다는 것에 감사했다. 비록 엄마의 고통과 아픔을 덜어드릴 수 없고, 나눌 수는 없을지라도... 아직 내 곁에 계시는 것에 감사하고 감사했다.
학교 공부는 너보다 못했다고 애써 자신을 낮추던 친구는 인생 공부에서야 말로 나보다 한참 선배이자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넬 줄 아는 멋진 중년이 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네가 나보다 훨씬 우등생이구나.
친구야, 고마워. 19년 전 나는 너를 위로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언젠가 나도 너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눠줄 수 있으면 좋겠다. 여전히 마음속에 어린아이가 살고 있는 나도 너처럼 의젓한 어른이 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