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기록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 T.S.Elliot, 황무지(Waste Land) 중에서 -
4월을 일컬어 이만큼 잘 알려진 표현이 있을까? 922년에 토마스 엘리엇이 ‘황무지’라는 제목의 시가 발표된 지 어언 100여 년이 지났다. 토마스 엘리엇이라는 시인의 이름도, ‘황무지’라는 시의 제목조차 낯선 이들에게도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은 낯설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진부한 표현에 가까울 지도...
같은 봄이라고 해도 3월은 새 학기를 시작하고,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할 만큼 새로움과 화사함을 뽐내는데 비해 4월은 어쩐지 제 자리를 잘 못 찾은 듯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듯하다. 4월은 어린 영혼들의 상실을 경험한 안타까운 애도의 시간이기도 한 터라 황무지를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 내게도 24년의 4월은 무척이나 ‘잔인한’ 시간이었다.
4월 4일.
재발한 엄마의 항암 일정 1차 3번째 주사일. 이미 1주 전 2번째 주사 이후 몹시 힘들어하시면서 3번째 주사를 맞을 수 있을지 주저하셨다.
4월 5일-4월 6일.
머리카락의 70%가 빠졌다. 베갯잇과 이부자리 주변, 침대를 가릴 것 없이 검은 머리카락이 수북했다. 엄마는 70대 중반이심에도 염색 한 번 하시지 않고 흰머리가 딸인 나보다 적으신대, 뭉텅이로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공포스러웠다. 샤워를 한 번 하고 나니 90%가 빠졌다.
4월 7일.
전 날부터 복통과 온몸에 극심한 통증으로 잠을 못 주무셨다. 머리가 아프다고 하셔서 열을 재니 38도가 넘었다. 열이 나면 병원으로 연락하라는 지시에 따라 119에 전화를 걸었다. 열이 38.6도. 서울대 병원은 담당 구역이 아니라 이송을 하기 어렵다고 했다. 서울대병원까지 가려면 자차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집에 차가 없었다. 열이라도 내리고 비상조치라도 하고 이동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 119 구급차 타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이동했다. 3시간 여 해열제와 진통제를 맞고 이모네 식구의 도움을 받아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다. 열을 내려 36.7도 상태에서 이동했는데, 서울대병원에 가니 다시 38도로 올랐다. 의료진의 파업으로 인력이 부족한 응급실에서는 병상도 허락되지 않았다. 휠체어에 앉아 해열제, 진통제, 항생제, 백혈구 촉진제를 번갈아 맞아가며 심야 12시가 되어 겨우 응급실 병상에 누울 수 있었다. 엄마의 호중구(절대 백혈구) 수치가 2까지 내려가 있었다(일반적인 경우 4,000 이상의 수치). 자신의 몸을 방어할 우군이 단 2명밖에 없는 상태였다. 병원에서는 타 병원 전원 조치를 원했지만, 서울 시내 병원 중에 엄마 같은 환자를 전원 받겠다고 하는 병원이 없었다. 하루를 꼬박 응급실에서 보내시고 8일 오후 3시, 겨우 서울대병원 입원전담병동의 병상을 얻을 수 있었다.
4월 8일-23일.
엄마의 진단명: 호중구 감소증으로 인한 발열.
진단명은 한 줄로 요약되지만, 16일 여 입원 생활은 몇 줄로 요약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요약해 보자면... 열은 해열제를 쓸 때만 잠시 반응하고,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오르기를 반복했다. 구토와 설사도 문제였다. 4-5일 간 이어진 설사는 시도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았고, 검게 탄 듯한 묽은 변은 조절하려도 조절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식사를 못하셔서 계속 영양제와 수액을 투여하는 통에 체중은 3일 만에 8kg이 불었다. 장이 움직이지 않아 장폐색이 있었고, 온몸에 부종이 생겼다. 이뇨제를 써서 부종을 빼고 나니 며칠 만에 다시 10kg이 빠져나갔다. 영양제를 줄이고 겨우 미음이라도 드실 수 있게 되자, 구내염이 심해 음식을 씹는 것이 불가능했다. 곧이어 이하선염이 생겨 줄였던 항생제를 다시 투여했다. 그렇게 16일을 보내고 퇴원을 했다.
같은 기간 동안 오빠도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여 큰 수술을 받았고, 환자복을 입고 하루 3-4번씩 엄마 병동에 병문안을 왔다. 오빠는 간호간병통합병동에 입원해서 다른 간병인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가 입원한 12층과 오빠가 입원한 5층을 오가야 했다. 집에는 만성 당뇨를 앓고 계신 아버지가 혼자 계셨기에 병원을 벗어나서는 집으로 가서 식사와 간단한 집안일을 챙겨 놓고 오는 날들이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가장 힘든 일은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엄마의 퇴원을 앞두고 입원병동전담의가 전한 나쁜 소식이 그것이었다. 환자와 가족들에게 중요한 것은 뛰어난 의술로 질병을 치료하는 것 이상으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이 생각은 오랜 기간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로서 옆에서 지켜본 생생한 경험에 근거한다. (이 부분은 언제 다시 한번 다루려고 한다.)
- ‘많이 아프시지요? 이 병동에서 가장 힘든 수술받으신 거예요, 이 만하면 정말 잘 해내고 계신 겁니다. 며칠 힘드시겠지만 앞으로 쭉쭉 좋아지실 겁니다. 조금만 힘내세요.’
- ‘말기 시니까 아픈 건 당연하죠. 여명 동안 치료를 받고 안 받고는 가치관의 문제죠. 호스피스 병동 소개해 드릴 수 있어요.’
같은 환자에게 건넨 각기 다른 의사의 회진 때 들은 내용이다. 말 한마디에 엄마는 투병 용기를 얻기도 하고, 의지를 놓기도 하셨다.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환자의 객관적인 상태를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럴 때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얼마나 준비가 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것이 생의 끝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육체적인 통증 이상으로 심리적인 고통을 심어주는 의사라면 아무리 뛰어난 의술을 지녔다 하더라도 의사라는 호칭이 과분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4월 22일-4월 27일
4월 22일에 오빠는 서울대 병원을 퇴원하고 2차 병원으로 전원 했다. 당장 집에서 간병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예약된 외래 치료 전에 수술 부위 소독이라도 할 수 있는 곳에 있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25일에 2차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26일이 서울대 병원에 외래 진료가 예약되어 있어서 오전에 서둘러 퇴원을 한 후 집으로 왔다. 간호간병통합병동이었지만, 6인실이라 며칠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어 피곤하다며 오자마자 잠을 청했다. 12시 즈음, 점심 식사를 준비해 놓았는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동네 산책을 하셔도 식사 때면 맞춰 들어오셨는데 어디를 가신 걸까? 전화를 드렸다. 한참 만에 연결된 통화 속 아버지는 발음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겨우 계신 장소를 알아듣고 달렸다. 요구르트 한 개를 손에 쥐고.
아버지는 눈빛이 풀리고 동작이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요구르트도 스스로 입에 맞춰 마실 수 없어 내가 손으로 맞춰 드려야 했다. 겨우 사람은 알아보는 듯했지만 도저히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다. 주저 없이 119에 전화를 걸었다. 5분 남짓 만에 출동한 119 구급대. 혈당 수치 36. 혈압 193/83. 체온 35.1도. 저혈당 쇼크였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공복 혈당 70~100ml/dl 가 정상수치라는데, 심각한 저혈당 상태라 혼수상태처럼 쇼크가 온 것이다. (퇴원 후 119 구급대원이 아버지를 구급차에 싣고 이송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셨다.) 인근 병원에 이송해서 4시간 동안 응급실에서 몇 가지 검사와 안정을 취하고, 추가 검사를 권고받아 2박 3일 입원을 하셨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셔서 최소한의 안정을 취한 후 퇴원을 하셨다.
일주일 내 3명의 가족을 3개의 다른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시켰다. 어쩌면 이렇게 도미노처럼 한 번에 일어날 수 있는지. 신은 인간에게 감당할 만한 십자가를 허락하신다고 했는데, 정말이지 얼마나 나를 단련시키시려는 것일까 야속하게도 느껴졌다.
그렇게 4월이 지나고...
5월 2일.
재발암의 첫 항암 일정을 마치고 엄청난 항암 부작용을 겪은 터라 다시 항암을 시작하는 것은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퇴원 후에도 집 밖을 나서기 어려웠고, 혼자서는 지팡이 없이 100m를 걷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퇴원 때 잡아 준 외래 진료 날이 되었다.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혈액검사 결과나 보자는 심산으로 병원에 갔다. 담당의는 혈액 검사 결과가 좋다며 항암 2차 사이클을 시작하자고 했다. 엄마나 나나 직전에 겪은 항암 부작용의 충격이 커서 선뜻 응하지 못하고, 또다시 겪을지 모를 두려움을 쏟아 냈다. 의사는 약 자체는 효과가 좋다며 용량을 줄이면 문제없다고 큰소리쳤다.
조금 더 살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치료를 감내해야 할지, 조금이라도 사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치료를 거부해야 할지... 어려운 선택이다.
결국, 오전 9:45분 진료를 마치고, 그날 오후 4:40분에 2차 항암 치료를 시작하기로 했다.
지난 4월은 내게 잔인했다. 2명의 중환자와 1명 만성질환자의 응급상황을 겪으며 정해진 학교 일정을 소화했다. 지방에 있는 직장과 서울을 오가며 5일 연속으로 병원에서 밤샘을 했다. 감정을 느끼는 순간순간 울컥하며 올라오는 감정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기엔 거추장스러워 애써 참아야 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지인들이 자주 안부를 물어주었기에 무작정 감정을 묵혀두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털어낼 수 있었다. 이럴 때 심리학을 공부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때로는 너무 많은 것을 이해하기에 스스로 감당하려 할 때가 있지만, 비슷한 경험을 했거나 공감 전문가들이 주변에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당장 며칠 후 2차 항암의 2번째 주사를 맞아야 할지 미지수다. 아직도 진행 중인 여정이지만, 이렇게나마 안부를 남겨 두는 것이 몇 안 되는 내 브런지 독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이제 조금 숨 쉴 만한 가보다. 물론 지금도 날씨처럼 수시로 변화하는 엄마의 컨디션에 따라 내 생활이 영향을 받지만... 폭풍처럼 몰아쳤던 시간이 지나니 폭풍에서 살아남은 자가 되었다. 생존력 상승, 다음 단계로 진입이다. 또 다른 어려움이 있겠지만, 먼저 경험한 시간들이 힘이 되어 주길 바란다.
황무지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화된 인간성, 죽음이 난무한 비참한 사회 등을 배경으로 쓰였다고 한다. 풍성한 꽃을 피우기에 이르고, 과실이나 열매를 기대하기엔 대지는 메말라 있다. 보릿고개도 보리가 익기 전이니까 4월, 즈음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434줄로 쓰인 황무지의 5장 천둥이 한 말(What the Thunder Said) 마지막 문장은 평화를 빌며 끝이 난다.
‘샨티 샨티 샨티(Shantih shantih shantih)’.
4월이 지나고 5월이 오면, 꽃이 풍성해지고 보리도 익겠지. 봄비에 땅도 젖고, 나뭇잎도 점점 무성해지겠지. 오늘도 병상에서 거친 전투를 치르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평화를 빈다.
[황무지 1장 전문]
T.S.Elliot, 황무지 (Waste Land)
1장 죽은 자의 매장(The Burial of the Dead)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른 베르크 호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방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촌 대공 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 줬는 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 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자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 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 더미뿐
그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운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 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출처] 위키백과. 황동규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