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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 나무 Oct 06. 2024

Creator, Preserver & Destroyer

삶의 배역은 한 가지만이 아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어째선지 손 데는 것마다 제대로 완성되는 것이 없었다. 어릴 적 미술 시간, 수채화를 그릴 때 물이 마르기 전에 자꾸 덧칠을 하는 통에 도화지가 찢어진 적도 있고, 크레파스로 채색을 할 때도 색깔을 입힐수록 앞서 칠한 크레파스가 밀리기만 할 뿐 이도저도 아닌 칙칙한 색깔만 남았다. 집에서 요리를 할 때도 그랬다. 간이 약한 듯해서 만들던 음식에 소금이나 간장을 조금 더 넣으면 짜고, 다시 물을 더 넣으면 싱거워졌다. 


가사 시간 바느질은 또 어떤가. 중학교 때였나? 한복 저고리를 축소해서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남들은 재단도 바느질도 예쁘게 잘만 하는데, 내가 만든 한복은 연필로 여러 번 재단한 흔적이 천 안으로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은 물론이요, 동정을 단 바느질은 삐뚤빼뚤. 뭔가 만회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의지와는 다르게 점점 결과물이 별로가 되는 마법. 누구는 손 데는 것마다 심폐소생 하듯 결과물이 나아져서 금손이니 마이더스의 손이니 하지만 나는 정반대, 마이너스의 손이었다. 

글을 쓰다 생각 난 김에 찾아보니 어설펐던 그 시절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엄마는 밥이든 반찬이든 뚝딱뚝딱 잘 만드셨다. 속도는 말할 것도 없고 뭐 딱히 대단한 조미료를 넣는 것도 아니고 재료가 특별할 것도 없는데 맛도 좋았다. 손뜨개는 배운 적도 한 번 없지만 그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을 그대로 만들어 내셨다. 어릴 때는 엄마가 떠 주신 장갑, 머플러, 모자를 세트로 착용했었고, 맨투맨을 입고 다녔다. 지금은 계절별로 다양한 모자를 컬렉션처럼 가지고 있다. 언젠가 엄마가 뜨개질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몇 코로 시작할지를 어떻게 아시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학창 시절 가사 시간에 손뜨개를 배울 때 게이지 내는 법을 배운 기억이 있어서였다. 시험문제에도 나올 정도로 뭔가 중요했던 것 같은데, 일정한 면적 안에 몇 코를 뜰 것인지 계산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모자를 자주 쓴다. 기미 가득한 얼굴을 가리려는 의도였지만, 오롯이 엄마의 손길이 담겨 있어서인지 모자를 쓰고 있으면 엄마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엄마, 모자는 게이지(guage)를 어떻게 내서 뜨시는 거예요?’


‘게이지가 뭔데?’


‘모자든 가방이든 몇 코로 시작할지 계산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 계산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요.’


‘계산은 뭐. 그냥 감으로 뜨는 거지. 실에 따라도 다르고 바늘에 따라서도 다른데 그걸 어떻게 매번 정해 놓고 하나. 대강 맞춰서 하면 되지.’


‘그래도 다 떠 놓고 안 맞으면 어떻게 해요. 대략이라도 맞춰 놓고 해야지.’


‘그냥 하면 되지. 하다가 크겠다 싶으면 풀어서 다시 하면 되고. 너무 쫀쫀하면 코를 조금 더 넓혀가면 되고.’


뭐든 책에 나오는 대로 순서대로 글자로 배우는 것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답이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


뭐 급할 게 있나. 어차피 시간 보내려고 하는데... 내가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풀었다가 하면 되지. 정해진 길이 뭐 어디 한 가지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 보면서 배우는 거지.’     

어느 하나 미리 계획하지 않고 오직 손과 머리의 감각으로만 만들어진 엄마의 컬렉션

70년 넘게 인생을 살게 되면 모두 철학자가 되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손뜨개질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방식에서 엄마는 삶을 이야기하셨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번 길을 정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정하기만 하면 쉽게 바꾸지 않는 경우가 많다. 좋게 말하면 신중한 편이지만, 다르게 보면 답답하고 고집스럽기도 하다. 다행히 상담을 공부하고부터는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보려는 시도를 자주 하게 되고 간접적인 경험이 쌓이면서 조금 여유가 생기기도 했지만, 여전히 유연성이나 융통성은 부족한 편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는 기존 것을 잘 지키고 유지하는 일이 훨씬 수월하고 익숙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리를 만드는 대신 설거지가 편했다. 식사 후 개수대에 세척할 그릇을 쌓아두기보다 씻어야 할 것들이 생기면 바로바로 치웠다. 뜨개질을 배워서 내 것을 만들어 사용하기보다 엄마가 떠 주는 것을 기꺼이 오래 사용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새로운 물건을 사는 것보다 한 번 산 물건에 정을 들였다. 얼마 전에는 좋아하는 반소매 티셔츠를 오랜만에 꺼내 입으며 그 옷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떠올라 혼자 웃은 적이 있다. 20여 년 전에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는데, 여행 마지막 날 친구가 찍어 준 사진 속에 입고 있던 티셔츠였다. 실상은 박사과정을 마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났던 여행이 좋아서였겠지만 그 티셔츠를 입을 때마다 그 기억이 떠올라서인지 늘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무려 20년이 흘렀음에 깜짝 놀라고, 그 옷이 여전히 입을 만한 상태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무엇이든 한 번 손에 들어오면 잘 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니 웬만한 내 소유의 물건들은 5년, 10년 이력이 그리 묵은 살림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잘 보관하고 아껴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자꾸 다른 일들을 하게 된다. 하게 된다기보다는 해야 하는 것에 가깝지만. 엄마가 편찮으신 이후로는 안 하던 요리를 하게 되고, 주방을 벗어나기 힘들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살림을 불리던 것은 늘 엄마가 해 오셨던 일인데, 엄마의 손길이 닿았던 일들을 하나둘씩 준비할 새 없이 하고 있다. 서툰 것은 둘째치고 하고 싶지 않다고 투정 부리고 응석 부릴 새가 없다. 알고 보니 엄마는 늘 씨를 뿌리고 계셨고, 가꾸고 계셨다. 내 눈에 보이던 것은 손뜨개는 빙산의 일각일 뿐, 집안 살림도 옥상 정원도 그동안 엄마의 손과 발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기에 새로 만들어지고 불어나고 있었다. 그 부지런함이 속도를 늦추자 살림은 빛을 잃어가고 꽃과 채소들은 시들어 가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지 않을 수 없다. 


엄마의 몸이 점점 야위어 갈수록 그간 엄마의 손과 발이 얼마나 많은  풍요로움을 마련해 주었는지를 깨닫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마른 몸을 보는 것이 애처로워서 옥상 정원의 화초들과 텃밭의 채소들이 말라가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힘들다. 아프기 전에 엄마는 강하고 씩씩한 분이어서 무서울 때도 있었다. 지금은 살도 근육도 빠져버려 나보다 체중은 물론이고 컸던 키마저 줄었다. 늘 무엇이든 만들고 가꾸고 불려 오던 엄마였는데, 이제는 엄마가 아끼는 텃밭에 물 주는 일도 혼자 하지 못하신다. 매년 잘 가꾸어 가을이면 손수 만드시던 국화차도 올해는 만들지 못했다. 엄마가 매일 아침 주시던 화분 물 주는 일을 못하게 되니 국화 화분은 여름 더위를 넘기지 못했다. 나는 엄마처럼 무언가를 만들지도 못하고, 잘 가꾸지도 못했다. 올해 햇국화차를 마시지 못하는 것은 묵은 국화차를 마시는 것으로 달랠 수 있을 테지만, 다른 것들도 점점  엄마의 손길을 잃게 될까 봐 두렵다. 


투병하시는 동안 엄마도 나도 힘이 들었지만 시간만큼 둘의 관계가 깊어졌음에 감사하고 있다. 내밀하게 알지 못했던 이야기와 감정을 나누면서 모녀로서,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음을 안다. 그래서 이 관계가 오래오래 더 깊어지기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 관계가 영원할 수 없음을 의식하게 된다. 모든 인간관계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듯이 함께 숨 쉬고 호흡하는 지금, 서로 눈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는 이 시간도 언젠가는 연장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가을이라 더 그런가. 생명의 유한함을 이렇게 체감한 적이 있었던가. 맑은 하늘이었다가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한낮의 햇살은 평화롭고 따사로운데, 문득 찬 공기가 피부를 파고드는 것처럼,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그렇다. 컨디션이 괜찮다가도 갑자기 위태롭게 느껴질 때도 있다. 호소하는 증상은 대부분 항암 부작용으로 인한 것인데, 다행히 아직은 처방받은 약으로 조절이 되지만 한 번씩 갑자기 열이 오르내리고 심한 통증을 호소하실 때는 조마조마하다. 언젠가 끝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 끝이 하루라도 더 늦게 찾아오기를 너무 아프지 않게 끝이 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노르웨이 출신의 가수 Cecilia의 ‘We have met before’라는 노래가 있다. 오래전에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여행 프로그램을 보다가 마지막 엔딩 곡으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고는 바로 검색을 해서 알게 된 후로 애정하는 노래가 되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가수의 청아한 목소리 때문에 귀에 쏙 들어왔었는데, 가사를 찾아보고 더 마음에 들었다. 멜로디는 북유럽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것 같은데, 가사에는 티베트도 나오고 윤회를 떠올릴 법한 내용이라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우리는 전에 만난 적이 있어요’라는 제목은 처음 만남을 시작하며 서툴지만 다정하게 건네는 첫인사 같다. 가사에 들어 있는 우리의 운명이 얽혀 있고, 서로 다른 역할을 번갈아 하고 있다는 것이 무척 와닿았던 기억이 있다.      

노르웨이 가수 Cecilia 음반 표지

We have met before 

Perhaps you have forgotten 

The tea we shared together on the bridge of rope 

Near by the river 

Close to the waterfall 

There by a mountain 

In a Place in Tibet      

Remember all those days in those heavy mists of time 

You were father, I was child 

We keep reversing roles

playing out these games of life in a different culture every time

I am you and you are me

we seemed to be as one

father, son, mother child 

lover, traitor, saint 

our destinies have intertwined 

we played these different roles      


사진 출처: 도서음반 온라인 매장 알라딘 음반 소개


평소의 나는 그저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원하지 않지만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후반부를 함께 하고 있다.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역할. destroyer. 뭔가 만들지도 못하면서 누군가 잘 만들어 둔 것 정성껏 관리라도 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 여기며 살았는데... 그 역할이란 것이 내가 원한다고 하고 싶다고 한 가지만 하고 살 수 없음을 시간이 알려주고 있다. 나무가 생명을 이어가는 흔적은 나이테로 남는다. 무럭무럭 자라 몸집을 키우는 시간 사이에 모든 잎을 떨구고 혹한의 추위를 치열하게 견딘 후에 다시 잎을 얻는다. 비록 소중한 이와의 관계가 언젠가 헤어짐을 맞이하더라도 그게 인생이고 삶이라는 것을 알아가며 받아들이고 있다. 


P.S.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좋아하는 인도의 영적인 지도자 Meherr Baba에 따르면 신은 creator, preserver이자 destroyer라고 했다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선생님이 내게 그 말을 해주셨을 때, 무척 위로가 되었다. 신조차 창조하는 역할에만 머무른게 아니란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신은 자신의 모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 했으니 내가 어찌 한 가지 역할에 만족하겠는가. 창조할 때 무너뜨리지 않고, 버려야 할 때 미련을 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지 않기를... 부디 내게 주어진 삶이라는 시간동안 적절한 때에 무리 없이 그 역할을 잘 해내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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