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네
기도 [祈禱]
신 또는 절대적 존재에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빎. 또는 그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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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잠시 기도를 한다. 10여 초쯤일까? 밤새 멈춰 있던 엔진 소리가 조금 부드럽게 느껴지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무탈하게 아침을 맞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병중인 엄마에게 치유의 손길이 미칠 수 있기를 청하고, 멀리 있는 가족들도 새로운 하루 잘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기도는 신과 나누는 대화'라고 했던가.
내가 지금 바라는 것과 아픈 엄마를 생각하다 보면 일방적으로 구하고 청하는 것만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 가진 것들이, 할 수 있는 것, 해야 할 것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돌볼 수 있는 가족이 있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기도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이 있네.
'그래.. 힘든 것도 있지만, 내가 가진 것도 이만큼이나 되는구나.'
오빠네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지 8년 남짓 되었다. 평소에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영상 전화를 하며 안부를 나누었는데, 엄마의 투병이 시작된 후로는 조카들이 거의 매일 같이 영상으로 응원을 보내온다. 이제 사춘기에 접어드는 두 조카는 엄마에게 충전기 같은 존재고, ‘할머니 힘력(力)’을 외치는 파이팅 비타민이다.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 엄마가 두 녀석을 업어 키운 보람 덕분인지 영상 통화를 못 하는 날엔 응원 영상을 찍어 보내거나 사진에 응원 메시지를 넣어서 보낼 정도로 정성이다.
여름에 오빠네 가족은 오래 살던 중부에서 동부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지역은 전 세계 관광객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손꼽는 도시가 주변에 많은데, 틈틈이 이곳저곳을 돌며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들을 공유해 주었다. 언젠가 엄마의 병이 다 나아서 같이 가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공유해 주는 사진 속에는 박물관과 공원, 유명한 건축물들이 즐비했고, 도시는 화려하고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런데 여러 사진 속에서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장면은 성당 한쪽에서 조카가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성당은 워싱턴 D.C. 에 있는 곳이었는데, 이사한 동네를 벗어나 인근 도시에 사는 지인을 만나러 온 가족이 다니러 갔다가 우연히 들른 곳이라 했다. 미사가 없는 시간이라 조용히 성당 안팎을 둘러보며 봉헌 초도 하나 켜고 잠시 머물렀는데, 아마 그때 조카의 모습을 오빠가 담아 두었던 것 같다.
기도하는 조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저 아이는 무엇을 구하고 바라는 것일지 상상해 보았다.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자기 마음을 잘 알아주는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해 달라고 비는 걸까?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으니 새로 입학하는 중학교에서도 좋은 성적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빌까? 아니면 흔하디 흔한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고 있을까? 아무튼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뒷모습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하고 편안해졌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사진 속 주인공이었던 조카의 흥분한 목소리가 영상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 할머니, 할머니! 제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셨어요. 할머니 병이 곧 나을 거예요.
- 그래? 정말이야? 할머니 병을 낫게 해 주신대?
- 네. 제가 할머니 병을 낫게 해 달라고 D.C. 성당에서 기도했는데, 제 기도가 뽑혔어요. 분명 하느님이 기도를 들으셨을 테니 이제 할머니 낫게 해 주실 거예요.
조카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알고 보니, 기도하는 뒷모습이 찍혔던 그 성당에는 기도하고 싶은 내용을 적는 카드가 있었고, 그 카드 중에 몇 개를 뽑아서 미사 중에 신부님이 읽어 주시고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들과 함께 전구 하는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연히 들렀던 그날, 조카와 오빠가 카드에 써 두고 온 기도가 뽑혔고, 주일 미사에서 신부님이 기도를 대신해 주셨다는 것이다. 거기에 두 사람에 바친 기도에 답을 담은 카드까지 보내주셨다니 (비록 인쇄된 답장이었음에도) 특별한 은총이라 여길만 했다.
마치 기도가 이루어진 것처럼 기뻐하며 전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조카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담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혼자 하는 기도도 아니고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이 마음을 담아 다 함께 기도를 드렸으니 귀 기울여 주시리라 확신할 수밖에. 조카의 기도에는 예상한 대로 할머니의 건강 회복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가족의 번영과 새 학교에서 더 나은 학생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수학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담고 있었다. 영어로 쓰인 문장이라 읽고 또 읽고 있자니, 간절히 바라고 구하는 마음만큼이나 더 성장하고 싶은 욕구와 그것을 스스로 이루겠다는 어떤 다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래. 제니의 기도를 신부님이 읽어 주셨으니 분명히 하느님이 귀 기울여 들으셨을 거야. 제니의 기도로 할머니가 힘든 병 잘 이겨낼 수 있겠다. 고마워.
무언가를 바라고 구하는 마음은 아름답다. 그 무언가를 꿈꾸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더구나 그것이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것이라면 아름다움은 더 할 것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기도하는가?
바라고 바라면서 노력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닌가. 아무런 도전도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공짜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 인생에 공짜는 없는데 말이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노력 없이 쉽게 이루기에 어려운 것들일 것이다. 특별히 이루기 어려운 일이 아닌 이상 간절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할 수도 없을 때 기도는 다시 한번 힘을 낼 수 있는 나를 위한 혹은 타인을 위한 응원이고 격려인 셈일지도 모르겠다.
신부님이 보내주셨다는 답장 카드에는 마태복음 11장 28-30절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내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성장하는데 발판이 될 수 있다. 다른 누군가도 건강하게 성장한다면 그것이 내가 성장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내가 그런 단순한 진리를 알 수 있다면 나를 위한 기도가 누군가를 위한 기도인 동시에 타인을 위한 기도가 결국 나를 위한 기도가 된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나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옆을 보고 앞을 보게 된다. 나보다 덜 힘들어 ‘보이는’ 사람, 나보다 더 수월하게 무언가 ‘얻는 것 같은’ 사람, 나보다 훨씬 더 ‘앞서가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자꾸 눈에 띈다. 중요한 건 그렇게 ‘보이는’ 것이고, ‘그런 것 같은’ 시선이다. 그 시선이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 채 말이다.
바라고 구하는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보게 된다. 최소한 내가 서 있는 그 자리는 이미 내게 주어진 것. 그곳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거기서부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고, 언제나 손을 내밀면 연결될 수 있다고 그렇게 답을 찾아나갈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