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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 나무 Nov 19. 2024

길 위에서 vs. 길 위에서

나는 지금 어느 길 위에 서 있는가

신해철 2집 앨범 표지*

차가워지는 겨울바람 사이로 난 거리에 서 있었네.

크고 작은 길들이 만나는 곳 나의 길도 있으리라 여겼지.

생각에 잠겨 한참을 걸어가다 나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었지.

무엇을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나의 첫 깨어남이었지.    


후렴) 난 후회하지 않아, 아쉬움은 남겠지만.

난 변하지 않아, 나의 길을 가려하던 처음 그 순간처럼.

자랑할 것은 없지만 부끄럽고 싶진 않은 나의 길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그대여, 날 지켜봐 주오.


끝없이 뻗은 길의 저편을 보면, 나를 감싸는 건 두려움

혼자 걷기에는 너무나 멀어. 언제나 누군가를 찾고 있지. 

세상의 모든 것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고

삶의 끝 순간까지 숨 가쁘게 가는 그런 삶은 싫어.     


*주. 이미지 출처: 멜론 홈페이지 캡처




고등학교 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갈 때면 꼭 듣던 노래다. 당시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자율을 가장한 타율학습이 엄격했다. 정규 수업 전에 0교시로 새벽 공부하는 것도 모자라, 수업을 마친 후에도 교내 도서관 건물 독서실 지정된 좌석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 밤 10시까지 의무적으로 자습(?)을 해야 했다. 매일 저녁 선생님들이 번갈아 감독을 하셨고, 일정 횟수 이상 빠지면 벌점도 부여하는 방식이라 웬만해서는 빠질 엄두를 못 냈다. 예체능으로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미술학원이나 레슨을 받기 위해 야자를 제치고 당당히 학교를 벗어날 때 그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렇다고 독서실에서 공부만 한 것은 아니고, 친구들이랑 두 번째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까르르 손뼉 치며 깔깔거리던 추억이 남았으니. 지나고 보면 아주 괴롭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다.      


당시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집에서 7.5km 떨어진 제법 먼 거리에 있었다. 한 번에 가는 버스 노선도 없을뿐더러, 환승을 하지 않으면 30~40분여 버스를 타고 내려서 최소한 20분 이상은 족히 걸어야 하는 위치였다. 남들보다 장거리 이동에 야자 후 귀갓길은 늘 피곤하고 몸이 무거웠지만, 그만큼 이런저런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시간도 길어서 음악감상에는 그만이었다. 


고등학교 때 내 음악 플레이 리스트 신해철, 이승환, 황치훈, 조정현, 윤상, 이범학, 유영석 같은 가수들의 발라드 계열의 노래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신해철 솔로 2집은 어느 곡 하나 건너 들을 것 없는 주옥같은 노래들이 빼곡해서 참 좋아했었다. 아마 가장 잘 알려진 곡은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였을 텐데, 나는 ‘나에게 쓰는 편지’와 ‘길 위에서’를 제일 좋아했다. 특히 ‘길 위에서’는 음반의 가장 마지막 곡이어서 귀갓길 버스에 올라 음반의 첫 곡부터 듣기 시작하면 이 노래가 나올 때쯤엔 버스에서 내릴 시간이었다. 마이마이에 이어폰을 꽂고 재생 버튼을 누르면 늦은 밤 버스 창밖 풍경은 저절로 뮤직비디오가 되어 잠시나마 공부 스트레스를 벗어날 수 있었다. 신해철 씨가 쓴 가사들이 철학적인 내용이 적지 않은데, 특히 ‘길 위에서’는 당시 전공이나 진로를 정하지 못했던 내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무엇을 하든 부끄럽고 싶지 않았고, 허둥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 스스로에게나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무언가 자랑스러운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대단한 걸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꿈꾸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어차피 대단한 무언가를 되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이나 자기 합리화였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돌아봐도 세월이 지나고도 그 노래의 가사처럼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돌봤던 것만큼 분명하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과연 대학은 갈까, 도대체 무슨 전공을 해야 하나 불투명한 앞날에 심란할 때마다 자주 이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았던 것을 떠올리면 말이다. 


진로라는 것은 평생의 과제이기에 여전히 내 미래가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면 이 노래를 찾아 듣곤 한다. 한참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진지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도 나고, 한편으로 아직도 종종 안개에 휩싸이는 현실의 막막함에 기운이 빠질 때도 있다. 그래도 길을 잃지 않고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힘이 있는 노래가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왼쪽: 최백호 다시 길위에서 앨범 표지/ 오른쪽: 드라마 '가족끼리 왜이래' 마지막회 장면**


긴 꿈이었을까, 저 아득한 세월이

거친 바람 속을 참 오래도 걸었네.

긴 꿈이었다면 덧없게도 잊힐까.

대답 없는 길을 나 외롭게 걸어왔네.


푸른 잎들 돋고, 새들 노래를 하던

뜰에 오색 향기 어여쁜 시간은 지나고

고마웠어요, 스쳐 간 그 인연들

아름다웠던 추억에 웃으며 인사를 해야지.

아직 나에게 시간이 남았다면

이 밤 외로운 술잔을 가득히 채우리.     


푸른 하늘 위로 웃음 날아오르고

꽃잎보다 붉던 내 젊은 시간은 지나고

기억할게요, 다정한 그 얼굴들.

나를 떠나는 시간과 조용히 악수를 해야지.

떠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면

이 밤 마지막 술잔에 입술을 맞추리.


긴 꿈이었을까, 어디만큼 왔는지

문을 열고 서니 찬 바람만 스쳐 가네.

바람만 스쳐 가네.      


*주. 이미지 출처: (왼쪽) 멜론 홈페이지 캡처/ (오른쪽) 드라마 기사 검색, 뉴스 화면 캡처



그런데 10여 년 전쯤에, 우연히 동명의 다른 노래를 알게 되었다. 주말 드라마에서 중년의 아버지가 자식들 앞에서 어떤 노래를 부르는데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저절로 귀 기울이게 되었다.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담담하게 부르는데도 어찌나 쓸쓸하고 애절한지 코끝까지 시큰해졌던 기억이 난다. 드라마가 끝나고 열심히 검색했더니 노래 제목이 ‘길 위에서’였다. 음유시인 같은 최백호 씨가 부른 곡이었는데, 어떤 음악 프로그램에서 부른 영상을 본 후 노래가 더 좋아졌다. 제목이 같지만 다른 느낌의 곡들도 많은데, 동명의 두 곡이 다 이렇게 맘에 들 수 있는지.     


처음 최백호 씨의 노래를 들었을 때는 그저 근사한 중년의 남성이 조용히 읊조리는 그 느낌이 좋았다. 매끈하고 세련된 음성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소리로 나지막이 들여주는 이야기 같은 느낌이랄까, 가사나 멜로디도 물론 좋았지만, 그저 그 분위기가 좋았었다. 평소 듣기 편한 곡(이지 리스닝이라고 하던가?)들을 즐겨 듣는 편인데, 배경 음악으로 틀어 놓아도 무리 없을 만큼 잔잔했다. 후크송처럼 가사나 멜로디가 강렬하게 반복되는 부분도 없어서 자주 흥얼거리지도 않고 그저 곡을 하나 알게 되었다는 정도의 느낌만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동안 잊고 있던 이 노래가 근래 들어 자꾸만 귀에 맴돈다. 예전엔 이 노래가 풍기는 분위기가 색다른 매력으로 느껴져 좋았다면, 요즘에는 노래의 가사를 점점 곱씹게 된다.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는 드라마 속 주인공인 아버지보다는 자녀들에 더 가까운 나이였지만, 지금은 그 노래를 부르던 아버지의 나이에 더 가까워져서일까? 처음 노래를 알게 된 시점에서 불과 1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평균 수명을 고려할 때 앞으로 맞이하게 될 시간보다 지나온 시간이 조금 더 길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특히 최근 2020년 이후 나의 시간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흘러갔다. 물리적으로는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라는 동일한 눈금이지만, 때로는 하루가 1년 같고, 365일이 하루처럼 느리고도 빠르게 지나간 것같이 느껴진다. 그전까지는 오직 나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시간을 엄마와(때로는 아버지까지) 나누어 쓴다. 내 일도 해야 하지만, 엄마가(때로는 아버지가) 해오던 일까지 맡아야 하는 범위가 늘어날수록 시간의 밀도가 점점 커진다.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삶의 시계를 인식하게 되면서부터는 시간에 훨씬 더 민감해지는 것 같다. 명이라는 단어를 인식하게 되고, 마치 타이머가 작동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너무나 생생하게 삶과 죽음에 대한 감각을 깨어나게 했다. 무슨 일에든 집중하고 에너지를 쏟고 있을 때는 한 번도 죽음이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죽음을 의식할수록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같은 질문들을 말이다. 조금 더 철이 들어서일까?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은 최백호 씨의 노래 가사처럼 술잔을 채우고 고마운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여유를 즐기고 싶다. 비록 내게 주어진 시간을 엄마와(때로는 아버지와) 나누어 쓰느라 분주하지만, 온전히 나를 위해서도 좋은 것들을 보고, 듣고, 즐기게 해야지. 힘겨운 순간에도 고통에 가라앉지 않고, 헤엄쳐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그런 마음으로 지난주 나를 위해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했다. 

가까이에서는 한 화면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웅장했던 은행나무
수령 8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

수령이 무려 800년 이상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은행나무. 긴 시간 한 곳에서 깊이 뿌리내리며 묵묵히 시간을 견딘 그 힘을, 눈부시도록 화려한 노란빛으로 가득한 그 아름다움을, 끝내 그 아름다움을 다 떨구더라도 다음을 기약하는 생명력.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 힘과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닮은 날들이기를 소망한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길 위에서, 아직 살아 있음을 깊이 느끼고 감사한 길로 한 걸음 내디뎌야지. 시간이 더 흘러 60대, 70대가 되어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그때 느끼는 감성은 또 어떨지 벌써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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