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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놀이동산

이제 바이킹에서 내려도 돼

by 오월의 나무

“선생님, 인생은 놀이동산 같은 거야. 재밌는 것들이 많이 있어. 거기에서 무슨 놀이기구를 타고, 뭘 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 건지는 선생님이 선택하면 돼.”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 장소는 대개 학교에서 가까운 관악산이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학생 수도 적지 않았는데 선생님들은 그 많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이동하고 챙기셨는지 모르겠다. 당시엔 학급 임원 아이들의 엄마들이 일일보조 교사처럼 소풍에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일반 버스를 탔는지, 지금처럼 단체를 위한 버스를 렌트했는지조차 까마득하지만, 저학년 때의 소풍은 등산로 초반 진달래 광장에 둘러앉아 장기자랑하고 보물찾기 했던 기억이 전부다.


그랬던 소풍 장소가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놀이동산으로 바뀌었다. 놀이동산엔 산에서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거대하고 흥미진진해 보이는 놀이기구는 말할 것도 없고, 대형 탈을 머리에 쓴 인형 캐릭터들, 솜사탕 자전거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예쁘게 꾸민 간식 상점들이 곳곳에 있었다. 물론 이전 소풍 장소와 비교해 크고 작은 바위와 비탈진 경사와 흙, 빽빽한 나무들은 없었지만 조금도 아쉬울 것 없었다. 학업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기엔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오는 먼지 뒤덮인 초록 산에서 술래잡기하는 것보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놀이기구들 사이에서 함성을 지르고 가슴 철렁하는 느낌을 즐기는 것이 훨씬 좋았으니까.


처음에 놀이동산에서 가서 무슨 놀이기구를 탈 것인지 정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놀이동산에 있는 모든 놀이기구를 타고 싶었지만, 정해진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면 늘 신중한 선택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유시간으로 주어진 몇 시간 동안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얼마나 여러 개를 탈 것인지는 시험 문제 푸는 것만큼 어려운 문제였다.


여러 개를 타는 것이 목적이라면 주로 남들이 타지 않는 놀이기구를 타면서 종류를 늘려 갈 수도 있을 테지만, 남들이 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루하거나 유치하거나, 그러니 재미가 없는 것이겠지. 그러니 패스. 그러면 이번엔 인기 있는 놀이기구를 먼저 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놀이기구는 기다리는 줄이 어마어마하다. 한 번에 아이들이 몰리면 기다리는 시간은 몇 십 분이 기본인데, 막상 탑승 시간은 3분이 채 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짧은 시간이니만큼 압축된 즐거움이 있어서 더 신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시간 대비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또 고려해야 하는 것 중에 한 가지는 내 수중에 용돈이었다. 놀이기구를 모두 타고 싶어도 엄마가 쥐어 주신 용돈은 늘 부족하게 느껴졌기에 최적의 선택은 필수였다. 나름 현명한 소비를 유도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자유이용권도 있고, 원하는 놀이기구 5개를 고를 수 있는 빅 5 티켓도 있었지만, 그것도 한두 가지 놀이기구 이용에 비해서는 비쌌다. 기껏해야 인기 있는 놀이기구 한두 개, 최대 3개 정도 탈 수 있는 비용이라면야 얼마나 어려운 문제였던지.


마지막 한 가지는 함께 탈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친구가 타고 싶어 하는 놀이기구와 내가 타고 싶은 것이 일치하면 별 문제없지만, 다를 경우는 고민이 시작된다. 함께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낼 것인지, 각자 원하는 곳으로 가서 놀이기구를 타고 만날 것인지. 함께 줄을 선다면 이야기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자칫 내가 원하는 놀이기구를 정해진 시간 안에 못 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만약 각자 원하는 곳에서 타고 만난다면, 동시에 같은 놀이기구를 탄 경험을 함께 나누는 즐거움은 포기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늘 누구와 함께 놀이기구를 타고, 어떤 놀이기구를 타고, 무엇을 먼저 탈 것인지는 복잡한 수학문제보다 내겐 어려웠던 것 같다.


놀이동산에서 내가 즐겨 타던 것은 바이킹이었다. 대개 인기 있는 놀이기구 중에 하나로 포함되는 것이라 친구들 함께 탈 수 있고, 롤러코스터에 비해 운행 속도는 느린 것 같지만 탑승시간은 길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낙하할 때의 가슴 철렁하는 짜릿한 기분은 비할 수 없이 신나고 재미있었다. 때로는 바이킹을 타고 내리자마자 연달아 탄 적도 있다. 가장 신나는 것이 바이킹이었던 만큼 덜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타느라 이동하고 줄 서는 수고를 감수하기보다 어차피 넉넉지 않은 용돈으로 좋아하는 것만 실컷 즐기자는 심산으로.


그렇게 즐겼던 놀이공원에 마지막으로 간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학교 소풍은 졸업한 지 오래. 친구들과 다녔던 것도 30대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남자친구와 가던 곳을 각자의 아이들을 데리고 가던 때도 지났으니 지금은 가더라도 놀이기구를 타는 일은 즐거움보다 노동에 가까울 것 같다.




낯선 상황에 적응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 예상치 않은 시간에 울컥하곤 한다. 누가 그랬던가, 유행가 이별 가사는 다 나의 노래라고. 흔하게는 노래 가사가 새소리가 꽃 한 송이가, 구름 한 조각이 단서가 된다. 어떤 날은 지하철에서, 산책길에서, 밥을 차리다 줄줄이 이어져 올라오는 기억들에 감정이 흔들리면 속수무책이다.


다행히 주변 지인들이 대개 상담 전문가. 그런 면에선 내가 복이 많다. 쿵하면 짝이고, 척하면 착이 아닌 척 그대로를 경청해 주는 이들이 곁에 있어 이만큼이라도 버티고 있다.


하지만, 여느 때면 반갑기만 했을 긴 연휴 기간 중에 평소 자주 보는 전문가 친구들은 또 각자의 가족들과 즐거움을 나누고 있을 터. 선뜻 약속을 잡기가 주저되었다. 그런 참에 마침 떠오르는 한 분이 있어 명절 지나서 한 번 뵙고 싶다는 내용을 담아 안부 인사를 전했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명절은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건강과 웃음이 함께 하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건강과 웃음이 함께 하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한 시간쯤 뒤에 답이 왔다.


“선생님. 반가워요. 시간 많아요. 내일 볼까요?”


문자를 보내기 전 적잖이 고민하며 보낸 것에 비하면 너무도 빠른 답장이 반가웠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내용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약속 시간을 바로 정하고 평소 자주 가보지 않은 동네에서 만나기로 했다. 선생님은 오랜만에 만남을 기뻐하시며 반갑게 안아주셨다. 나는 ‘안아주시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라고 하면서도 두 팔 벌려 안아주시는 선생님 품이 좋았다.


선생님과 몇 시간을 이야기 나누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내겐 말 그대로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웠고, 편하게 숨 쉴 수 있었고, 어느 한 군데 아프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았고, 계산하지 않았고, 듣고 말하고, 또 듣고 또 말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저항하지 않아서 편했던 것 같다.

선생님과 나눈 시간이 참 좋았는데, 헤어지고 돌아오는 내내 선생님이 말씀하신 ‘놀이동산’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선생님, 인생은 놀이동산 같은 거야. 재밌는 것들이 많이 있어. 거기에서 무슨 놀이기구를 타고, 뭘 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 건지는 선생님이 선택하면 돼.”


생각해 보면, 놀이동산엔 신나는 것도 있고, 무서운 곳도 있고, 지루한 것도 있다. 길게 줄을 서서 기어코 타고 싶은 것이 있고, 줄이 짧아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지나치는 것도 있다. 그곳에서 웃는 아이도 있고, 우는 아이, 떼쓰는 아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도 있다.


나는 그곳에서 어떤 모습인가? 재미도 없는 놀이기구만 타고 또 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내려도 되는데. 내릴 때도 지났는데... 놀이동산엔 놀이기구만 있는 것도 아닌데... 쉬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도 되는데. 혼자서 같은 놀이기구만 타면서 지루하다, 재미없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이킹이 정말 즐겁기만 했던가. 더 신나는 놀이기구는 줄 서 있는 사람이 많아서 시간이 아깝다고 합리화하며 혼자서는 줄을 설 엄두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닌가. 엄마가 주신 용돈을 다 쓰지도 못하고 기어코 남겨 오면서 칭찬을 기대했던 것은 아닌가. 놀이기구 말고도 할 것들이 많은데 경험하지 않고는 자유이용권으로 신나게 놀고 있는 친구들을 시기하고 용돈을 함부로 쓴다고 평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효율성을 따지며 늘 익숙한 방식대로 루틴을 만들어 다른 것은 시도해 볼 용기조차 내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내가 어릴 때 정한 방식이 어른이 된 내게도 최적의 선택인가.


넓은 놀이공원을 다 이용하지도 못하고, 쓸데없이 남의 놀이에 한눈팔다 보니 어느새 롤러코스터는커녕 바이킹조차 타기 벅찬 나이가 되어 버렸다. 어릴 때는 쓸데없이 어른인 척하느라 힘들었다. 지금은 겉으로는 분명 어른인데, 달라진 환경을 받아들이기 무섭고 두렵다며 버티는 아이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불일치를 어찌해야 할지. 아이는 아이답게, 어른은 어른답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감정은 감정대로 이제는 어른답게 내 시간을 다시 맞이하는 수밖에. 즐거움이든 고통이든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 언젠가 다가올 죽음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내게 주어진 재화들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선택해 봐야지.


그래. 지금, 나는 놀이동산 어디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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