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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 Perich Nov 16. 2023

진미채와 마가리타(Margarita)

감사함


어제 이브닝, 유난히도 조용했다.

정맥 주사 팀이 필요할 경우 병동의 간호사나 의사들이 해당 환자별로 처방을 넣게 되고, 그 처방은 실시간으로 우리 팀이 볼 수 있도록 리스트가 뜨게 된다. 그래서 바쁠 때는 엄청 바쁘고, 한가할 때는 정말 한가한데 어제는 오후 6시 이후로 한 시간에 콜 하나가 뜰까 말까 할 정도로 조용했었다.

이런 날은 일부러 환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물론 환자의 중증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재활병동이나 경한 질환으로 입원한 환자들은 간호사들과 나누는 대화를 꽤 즐기는 편이다.

오후 6시쯤 되었을까, 내과 병동에서 콜이 하나 들어왔다. 콜을 받고 환자의 차트를 살피는데 나에겐 너무도 친근한 병명이 눈에 들어왔다. Myasthenia Gravis, 중증 근무력증. 자가 면역 질환으로 IVIG(이뮤노글로블린 정맥주사)를 맞기 위해 입원한 환자였다. 늘 그렇듯 심장이 울렁댔다.

고등학교 1학년 때쯤, 나는 중증 근무력증을 진단받았다. 간호사가 되고, 중증 근무력증을 가진 환자들을 만날 때면 늘 가슴이 울렁대고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동병상련의 마음 때문일까? 물론 나는 전신형 중증 근무력증이 아닌 안구형 중증 근무력증이라 지금 약을 복용하는 것도 아니고, 따로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전신형 근무력증 환자들을 만날 때면 마음이 좋지가 않다.

60대 후반의 여자 환자였다. 그동안 정맥주사를 너무 많이 아서 사용할 만한 혈관이 거의 없었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그녀의 팔을 살폈다. 40대 초반에 중증 근무력증을 진단받고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생사를 오가는 투병을 하고 있다는 그녀는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숨이 안 쉬어져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에서 꽤 고생을 했어요. 나중에는 기관 절개술까지 했는데... 상처 보이죠?"

그녀의 목 한가운데 동그란 상처가 선명하게 보였다. 몇 해전 내과계 중환자실에서 일할 때 중증 근무력증 위기로 인공호흡기를 달고 고생을 하던 남자 환자가 떠올랐다.

그 환자는 기관 절개술은 하지 않았었는데...
이 환자는 경과가 좋지 않았었구나...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힘들어요."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조심스럽게 나도 같은 병이 있다는 것을 말했다. 물론, 안구형이라는 것도. 그 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의 나이, 증상, 경과, 약 복용 기간, 관리 방법 등등...

그녀의 팔에 정맥 주사를 꽂고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비타민 D 꼭 챙겨 먹어요. 여기는 겨울에 해 보기 힘들잖아요. 듣자 하니, 중증 근무력증 환자들 대부분이 비타민 D가 부족한 경우가 많대요. 그래서 비타민 D 결핍이 중증 근무력증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연구도 있더라고요."

나보다 더 중한 증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 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릴 때 진단을 받아서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잘 이겨내고, 이렇게 미국까지 이민을 와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소피 간호사를 보니까 나도 희망이 생기고 힘이 나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나도 그녀에게 힘내라고, 꼭 증상이 좋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니 밤 12시 15분. 안방에서 자고 있는 신랑과 강아지 두 마리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마가리타를 만들었다.


적막한 새벽, 여러 가지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묵직해지는 내 오른쪽 눈꺼풀. 아빠 때문에 얻은 몹쓸 병이라고 치부했던 나의 중증 근무력증이 누군가에겐 간절히 바라는, 어쩌면 도달하기 힘든 목표가 될 수도 있겠구나.


미국으로 오고 싶었다. 미국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미국 병원에 취직을 하고 싶었다. 2014년, 미국 간호사 시험을 치던 그 당시엔 이 모든 것을 다 이루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 모든 것을 다 이룬 지금의 나는, 과연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고 있나.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내가 가진 것들을 당연시하며, 아니, 어쩌면 등한시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상큼한 마가리타를 한 모금 들이켜자 긴장이 풀리듯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늘어지듯 소파에 몸을 기대고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이곳, 이 자리, 지금 나의 모습, 그리고 우리 가족.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정말로,


감사하고 감사하다.




내 마음대로 마가리타 레시피.


집에 라임이 없어서 레몬을 이용했다. 잔에 라임 또는 레몬즙을 묻힌 뒤 마가리타 솔트를 입히고 얼음을 넣는다. 다른 잔에 1/2 oz 테킬라, 1/2 oz 트리플 섹, 1/2 oz 칵테일 시럽, 1 oz 라임 또는 레몬즙을 넣고 잘 섞은 뒤 미리 준비해 둔 얼음잔에 부으면 된다.(술을 잘 마시는 사람들은 테킬라나 트리플 섹의 양을 조금 더 늘리면 된다)


레몬도 나쁘지 않지만 라임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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