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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 Perich Nov 22. 2023

새우튀김과 사케(Sake)

불면증


한동안 잠잠하던 불면증이 최근에 다시 시작되었다. 20대 후반부터 늘 나를 힘들게 했던 불면증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끈질기게 내 뒤통수에 들러붙어 나를 괴롭혔다.

각종 명상과 호흡법, 수면에 도움을 주는 차와 허브, 백색 노이즈 요법과 암막 커튼, 멜라토닌과 각종 보조 식품, 셀 수도 없이 많은 운동요법... 그 어느 것도 지속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근원적인 나의 불안을 없애주지도 못했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기다렸다는 듯 온갖 잡념과 상념들이 나를 덮친다.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듯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가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과거에 대한 후회,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무의식적 분노.


평소에도 최소 한두 시간 몸을 뒤척여야 겨우 잠이 들고, 잠이 들어도 두세 시간 뒤에는 꼭 잠에서 깨는데 이렇게 불면증이 심해질 때는 잠이 들기까지 최소 서너 시간은 기본이고 한 번 잠에서 깨면 다시 잠이 들지 못한다.

20대 후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나는 단 하루도 만족스러운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나마 좋아졌지만 당시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던 나는,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문단속을 했었다. 현관문이 잘 잠겨있겠지? 창문도 잘 잠겨있겠지? 밤새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떡하지?

30대 초반, 엄마 소식을 듣고 난 뒤 나의 불안은 최고조에 달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정신과 상담을 검색했지만 상담 비용이 너무 부담이 되었다. 그러다가 보건소에서 운영하는 무료 상담 프로그램을 발견하곤 당장 예약을 했다. 서울 아산병원 정신과 레지던트가 무료로 한 시간 상담을 해주는 것이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찾아간 보건소에서 정신과 의사를 처음으로 만났다. 작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사와 마주 보고 앉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젊은 의사의 곧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나, 어색했고 괜히 주눅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셔도 돼요."

조용한 의사의 말에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갈팡질팡 두서없이 이어지는 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던 의사가 말했다.

"ㅇㅇ님,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머니 이야기까지 잘 들었습니다. 더 추가하고 싶은 이야기 없으세요?"

머뭇거리던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 없어요."

의사는 내 얼굴을 직시했다.

"혹시 그거 아세요? 지금까지 40분 동안 아버지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는 걸요."

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으세요?"

숨이 턱 막혔다. 당황해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의사가 다시 물었다.

"문단속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최근에 시작된 것인가요? 아니면 어릴 때부터 그랬었던 건가요?"
"... 제가 중학교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새로 집을 지었어요. 빨간 벽돌집을 짓고 할머니랑 그 집으로 이사를 가고 난 뒤부터 그랬었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현관문이랑 창문을 확인하고... 어쩔 때는 밖에 나가서 대문이랑 뒷문도 확인하고... 담장도 확인하고요."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날까 봐 불안하셨나요?"

순간,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동상처럼 얼어붙은 내게 의사가 한 번 더 물었다.

"혹시, 믿고 의지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아버지가 새로 지은 집에 갑자기 나타나서 할머니와 ㅇㅇ님을 해코지할까 봐 두려우셨나요?"

입술이 덜덜 떨렸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양손을 꼭 움켜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티슈를 건넨 의사는 내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ㅇㅇ님, 이곳에서 운영하는 상담 프로그램 말고 병원에서 정식으로 상담을 받아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여기는 무료상담이라 제가 약을 처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어요. 조금 길게 잡으시고 상담을 받아보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치듯 보건소를 빠져나온 나는 그 뒤로 단 한 번도 정신과 상담을 받지 않았다. 나의 불안과 불면, 우울과 초조함이 모두 아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자 죽어도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깟 인간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든 거라니... 자존심이 상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내 의지로 이겨내리라.


그렇게 나의 고집으로 방치된 아픔은 아직도 내 곁을 맴돌며 나를 괴롭히고 있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 이렇게.

미련하다는 것 잘 안다. 간호사면서, 마음의 병도 몸의 병처럼 치료를 해야 한다는 걸 잘 알면서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오늘은 기필코 꿀잠을 자보겠다는 일념으로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사케를 따뜻하게 데웠다.


내 최애 사케, 닷사이 45.


가격도 적당하고 맛도 훌륭하다. 저녁 식사로 준비한 새우튀김에 깔끔한 맛이 나는 사케를 곁들이니 한마디로 금상첨화다.

어른의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똥고집을 부리며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있으니... 병원 가기 싫다고 생떼를 부리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

어른인 척 살고 있지만,
어쩌면 나는 아직도 철이 안 든 어린아이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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