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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나풀리 Sep 11. 2023

기죽지 마요

가장 어려운 일

수요일이다. 애증의 수요일.

어김없이 녹화 준비를 하느라 밤을 꼴딱 새우고 드리워진 다크서클을 진한 화장으로 가려 출근하는 길. 오후에 큰 비가 온다더니 아침부터 어둑어둑한 게 을씨년스럽다. 우산을 챙겨 들고 생강차가 든 텀블러를 품에 안는다. 현관을 나서며 신나는 아이돌 음악들로만 선곡해 넣은 플레이스트를 재생시킨다. 저만치까지 떨어져 있는 나의 밝음과 에너지를 끌어올리려는 일종의 몸부림이다.


상암에 도착해 텅 빈 스튜디오를 걸어 들어가면 온몸으로 저항하려 했던 부담감이 결국 나를 덮치고 만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애써 담담한 척 자리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한다. '고작 기계인 주제에...' 두려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방긋 웃어대며 원고를 읽어 내려간다. 나에게 주어진 롤은 고작 2~3개 정도의 연예 소식을 전하는 것. 그것도 자료화면으로 대부분의 내용이 나가고 리드 멘트만 또박또박 잘하면 되는 쉬워 보이는듯한 롤이었다. 하지만 큐사인만 받으면 심장이 배밖으로 나와 내 앞에서 미친 듯이 벌렁거렸고, 손바닥만 한 카메라 렌즈는 나를 통째로 잡아먹으려는 듯 매섭게 노려봤다. 신기했다. 카메라 앞에서 가장 행복할 거라고 늘 확신했던 나였는데 지금은 카메라 앞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서럽기만 했다. 다른 리포터들은 당차게 잘하기만 하는데 나는 왜 이모양일까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오늘도 쉽지 않는 하루가 될 거라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 또각또각 구두 소리마저 예쁜 선아언니가 웬일로 일찍 스튜디오로 들어선다. 분장이 일찍 끝났다며 환한 웃음으로 나를 보며 걸어온다. 예쁘다.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열심히 원고를 외우는 척을 하다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진하게 느껴져 언니를 바라봤다.

"예진 씨 너무 예뻐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했다.

"아니에요. 언니가 정말 예쁘세요."

으 닭살스런 말을 하고 말았다.

"저 저번 주에 예진 씨랑 첫 녹화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친한 친구한테 전화 걸어서 예진 씨 얘기한 거 알아요?"

이것도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네? 저를 왜요?"

"아니 방송 같이 하는 리포터 친구가 있는데 너무 예쁘고 잘하는데 자기만 그걸 모르는 거 같아서 마음이 쓰인다고요. 예진 씨 너무 예쁜데 자기 진가를 자기만 모르고 있다? 기죽어 있지 마요-"

나 스스로에게 숱하게 해 줬던 말이었다.

'기죽지 말자. 기죽지 말자. 기죽지 마!'

눈물이 핑 돌아 언니 얼굴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두 시간 동안 한 메이크업이 다 지워진다는 생각으로 허벅지를 꼬집으며 눈물을 참았다. 빨개진 내 눈가를 본 듯 한 언니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예진 씨 보면 내 옛날 모습 같아요. 나는 광주 sbs에서 스물여덟에 리포터로 방송일 시작했어요. 그다음 서울 올라와서 리포터로 잠깐 일했는데 거기서 무슨 일이 날 때마다 다 내 탓인 거 같은 거야- 카메라가 잠시 고장 난 거였는데 그것도 다 내 탓같고, 피디님이 실수한 건데 그것도 다 내 탓같고.. 나도 엄청 주눅 들어서 방송했거든. 예진 씨는 진짜 잘 될 거예요. 보니까 너무 예쁘고 잘하고 그래. 진짜 나 한 번 믿어봐요. 예진 씨 아직 어리잖아요. 주눅 들어 있을 필요 하나도 없어요."

"고맙습니다..."

어떤 말을 더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꾹꾹 눌러 참고 있는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긴장감과 부담감으로 꼿꼿하게 경직되어 있던 온 신경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기 멘트를 연습하는 선아언니였다.

 

녹화를 마치고 건물을 빠져나오니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비바람은 내 몸 구석구석을 지나 생채기를 내려는 듯 사납게 스쳐 지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순간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씩씩하게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지난 시간 누군가에게 내 힘듦을 들키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그 끝은 이런 내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길 간절히 바랐었나 보다. 이렇게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무너져버릴 만큼 단단하다고 믿었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날이 있다.


오늘 난 무너져서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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