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커피를 마시며 2024년은 인공지능(AI)이 본격적으로 일상화될 것이란 기사를 봤다. 이미 인공지능(AI)은 창작자들의 글, 그림, 사진 등을 무단으로 학습하고 일정 수준의 결과물을 빠르게 생산해내고 있다. 이렇게 당장 사용하기 ‘적당한’ 인공지능의 결과물에 만족한 제작사들이 늘어나면서, ‘적당한’ 창작물이 대중에게 빠르게 노출되고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짧은 시간에 최소의 비용으로 얻는 적당한 글과 그림. 결국 많은 창작자의 저작권 침해는 물론 일감이 사라지는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나는 손으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그림책 작가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붓으로 종이 위에 색을 입힌다. 한 친구는 출판사 디자이너에게 요즘 손으로 그린 원화 작업은 거의 없다는 말도 들었다는데,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종이 위에 수채화 터치를 겹겹이 쌓고 있는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세상 모든 것이 콘텐츠가 되어 오락실의 두더지 잡기처럼 망치로 쳐보기도 전에 튀어나왔다 사라진다. 우직한 건지, 미련한 건지(어쩔 수 없이 둘 다). 인정하기 마음 아프지만 나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아주 비효율적인 일을 하고 있다. 개인적인 삶도 그림이라는 일에서도 나는 빠르게 흐르는 강 중간에 우뚝 서서 허리를 돌아나가는 물살을 지켜만 본다. 그러다 기어이 물살을 횡으로 가르고 나와 강가 자갈밭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다.
때로는 내가 그리는 마을 풍경이, 노을이, 노을에 물든 호수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당장 내 작업 방 창밖의 노을도 구름도 매분 매초 변한다.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을 생각한다. 그 약속 덕분에 앞으로 그려야 할 그림들이 있고, 깊게 공부하고 조사하여 그리고 싶은 것들이 있다. 다들 미친 듯이 달려가도 결국엔 뒤돌아보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오늘도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린다. 내가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마음의 봄비가 되고, ‘역시 이거지’라며 나는 다시 충만하고 흡족한 상태가 된다.
요즘 자주 들여다보던 SNS도 올려야 할 것이 생길 때만 들어가고 거의 안 보게 됐다. 좋은 점은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 세상의 시끄럽고 자극적인 소식과 혐오인 줄 모르고 내뱉는 말들, 갈등이 일어나길 바라는 말들을 보지 않는 것. 누군가의 바람과 욕망을 보지 않는 걸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SNS로 자신을 홍보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시대에(특히나 프리랜서들은) 나는 또 버티지 못하고 강 위로 흘러가는 것들을 지켜보거나, 강을 뒤로하고 숲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도망인가. 도피인가. 변명인가. 핑계인가. 아니면 고집일까 뚝심일까. 이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미래의 내가 현재 나의 선택과 행동을 칭찬할지, 후회할지 알 수 없다. 설을 앞둔 속초의 2월. 창밖엔 눈보라가 친다.
*이 글은 속초 서점 '완벽한 날들' 2월 정기구독 책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를 읽고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