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리 Mar 27. 2024

할아버지의 채송화

-◈- 

할아버지의 수돗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할아버지는 본인의 부모, 형제들과 함께 살던 집에서 가족을 이루고 평생을 사셨다. 시간이 흐르며 아궁이 두 개에 그을음 가득한 부엌살림, 마당에 드러나 있던 나무 마루는 현대식 샷시로 덮게 되었지만, 네모난 집터의 오른쪽 위 모서리에 있던 수돗가와 화단은 변하지 않았다. 

 수돗가의 기다란 펌프 손잡이를 쥐고 위아래로 움직여 쿨럭쿨럭 맑은 물이 쏟아지면 숫돌 아래 넣어뒀던 작은 칼로 생선을 다듬는다. 누가 좋은 괴기를 줬다며 괴기를 헹구고 썰어 마당 아궁이의 남은 불에 살살 굽는다. 그리고 조용히 손자, 손녀를 부르는 할아버지.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수돗가와 마당의 아궁이는 할아버지가 집에서 가장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가느다란 대나무 회초리 같은 할머니의 말과 눈빛으로부터, 시끌벅적한 가족사와 매일 나가던 논밭을 떠나 홀로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곳. 

 수돗가 왼편으로는 이름 모를 화초들이 자라고 있다. 난 같기도 하고 열대 식물 같기도 한 화초들이 자란다. 어느 집에서 얻어왔고, 누구네 밭에서 캐왔고, 조상님 모신 선산에서 캐왔다. 그래도 항상 심으셨던 것은 나리꽃과 봉숭아, 채송화. 습하고 그늘진 수돗가 옆, 일일이 주워다 화단을 두른 돌따라 줄줄이 심어진 봉숭아와 채송화.



-◈- 

꽃들은 어떡하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집을 다 허물기를 원하셨다. 안채와 작은 별채, 그 옆의 농기구 창고와 외양간까지. 할머니 홀로 관리하기엔 너무나 컸고, 남은 삶 동안 가만히 본인의 작은 살림만 꾸리길 원하신 것 같다. 현재는 하얗고 조그만 빈 집 한 채가 마당에 홀로 남았다.

 ‘할아버지가 가꾸던 그 예쁜 화단과 이제는 집안 어른 같은 감나무와 대추나무는 어떡하나. 꽃들은 어떡하나.’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가 옮겨심을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내 고향, 여주 집으로 가져와 옮겨 심었다. 할아버지가 아끼며 키우시던 게발선인장 화분과 나리꽃 씨앗, 매년 심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던 채송화들. 그리고 이제는 엄마의 손으로 여주 집에 잔뜩 자라 매년 꽃길을 이루는 채송화들.


 


-◈- 

 나의 회색 집


 낡은 아파트 1층 창밖. 엄마는 꽃봉오리가 오글오글 모인 채송화 화분 세 개를 가져다 뒀다.

여주 숲속 집에 살던 내가 회색빛 도시에 홀로 있는 게 안쓰러웠을까. 회색 집 창밖엔 색색의 채송화가 피어나더니, 어느 날엔 화분 밖 아파트 화단에도 씨앗을 떨어트려 꽃을 피운다. 남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침을 뱉고 담배꽁초나 던져대는 화단에 애처롭게 빛나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세 개의 채송화 화분이 도시에서 헤매던 벌과 나비, 날곤충들을 먹였고, 나의 마음에 물을 줬다. 

 색색의 채송화는 작은 밝음이었다. 가물어 흙먼지 날리는 여주 집 마당에 봄비가 툭툭 떨어지던 날, 코끝에 스치던 황톳빛 흙 향기가 떠오른다. 싱그러운 초여름 숲을 한 바퀴 빙 돌고 마당 지나 나에게 오던, 촉촉하고 투명한 푸른빛 바람이 떠오른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수돗가에서 꽃 피우던 채송화는 나의 회색 집에서도 봄마다 조그만 초록 손가락을 좁은 하늘을 향해 내민다. 


 

-◈- 

나의 수돗가


 할아버지는 이럴 줄 모르셨겠지. 당신이 키운 채송화가 20년이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걸. 

그리고 그 채송화가 멀리 떠났던 손녀딸의 집에도 찾아갔다는 걸. 할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해보진 않았다. 설에는 아무 말씀 없이 나무를 깎고 다듬어 얼음 썰매와 연을 만들어 주셨고, 끼니 사이엔 생선과 고기를 다듬고 아궁이 불에 구워 손자, 손녀 입에 넣어주셨다. 알록달록 밝은 목소리의 화사하게 빛나는 사랑은 아니었다. 하지만 깊고 따뜻했고 변함없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채송화 화분이 남았다. 환하고 큰 목소리가 아니어도 할아버지다운 사랑이고 위로이고 힘이다. 응원이다.

 초여름이면 여주집 화단에 채송화가 피어오른다. 조그만 초록색 손가락이 매일 아침 엄마가 주는 물을 한껏 마시고 오동통 살을 찌운다. 조만간 색색의 꽃이 피어나겠지.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벌과 나비도, 할아버지 채송화의 사랑을 먹는다. 내가 떠나온 회색 집의 누군가는 ‘어머, 여기 왜 채송화가 있지?’ 하며 의아함이 될 것이고, 작은 반가움이 될 것이다. 

 할아버지의 채송화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색색의 꽃송이 흔들리며 조잘조잘 말한다. 

왔니, 반가와. 힘내, 걱정 말고 잘 지내. 너에겐 가족이 있어. 여기는 너의 고향. 

그게 무엇이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할아버지의 채송화.

내 마음 한쪽 모서리에 할아버지의 수돗가가 있다. 그 수돗가는 항상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 깨끗한 물이 넘치게 흐르고, 물이 가득한 우물에선 귀뚜라미도 노래를 멈추고 느긋하게 쉴 수 있다. 나리꽃과 봉숭아가, 채송화가 한창이다. 


-----------------------------------------------------------------------

<생태 시민을 위한 동물 지리와 환경 이야기>는 

속초시 서점 '완벽한 날들'의 3월 정기 구독 도서였습니다.

윗글은 이 책을 읽은 뒤 떠오른 저의 이야기입니다.

저자: 한준호,배동하,이건,서태동,김하나  

출판: 롤러코스터  

발행: 2024.02.0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