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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의소아과 Mar 21. 2024

서이초교사 49재 추모에 부치는 글

 서이초 1학년 6반 담임선생님을 기리며

서이초 1학년 6반 담임선생님이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실에서 자살했다는 글을 커뮤니티 댓글을 통해 알았을 때, 나는 밤새 울었다. 나는 소아과 의사였지만, 그녀의 죽음이 슬펐다. 그녀의 나이가 23살임을 알았을 때 오열했다. 나는 그녀의 죽음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가슴이 아픈지는 49일이 지난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교사를 꿈꾸던 내가, 교사의 꿈을 접게 된 것은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부장선생님, 모두가 고일대로 고인 썩은 물에 젖어, 모든 일은 아래로 내려가는 마법을 부리는 꼼수의 대마왕, 책임 회피의 대가들만 모인 곳이 바로 학교라는 것을 알게 된 후였다. 문제가 될 만한 일들은 아랫사람에게 맡겨버리고, 문제가 생기면 아랫사람 탓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구는 그들을 마주했을 때, 젊고 열정적인 선생님들이 현장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목도했을 때, 나는 교실에 목매다는 것 대신 선생님의 꿈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렇게 선생님의 꿈을 포기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며 이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의사가 되고 싶다." 시작되는 자기소개서를 쓰고 의대에 진학했다. 의사가 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법조인 보호자가 법 운운하며, 내 선의에 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각종 판례와 내가 알지 못하는 의료법들을 들이대며, 내 사명감과 선의에 법적 책임을 묻겠다던 그날이었다. 나는 목매지 않았지만, 그날 좋은 의사가 되기에는 내가 여러 면에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로 나의 경과기록은 후에 다른 의사가 봤을 때 이 환자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정확성과 사실성을 내포한 진료 내용을 적는 것이 아니라 후에 판사님이 읽을지도 모르는 방어적 진료기록지가 되었다. 


그 이후 내 동료의사가 응급실에 당직을 서다가 담당 환자가 죽는 일이 발생했다. 환자가 태어난 지 100일 도안된 신생아였다. 그 작고 소중한 신생아가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 이미 병적인 상태로 살기 위해서 응급실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생아를 살리기 위해 그날 밤 가장 모든 것을 바쳐 일했던 내 동료의사는 살인으로 경찰서에 신고가 되었다. 신고 후 실제 법적 소송에 휘말렸을 때 마주한 경찰은 마치, 내 동료의사가 그 환자를 죽인 것처럼 취조했다. 그 동료의 매시간 매 분 매 행위 때문에 불쌍한 아기가 생을 마감한 것처럼 경찰은 따지고 들었다. 내 일이 아니었지만 동료의 압박은 나에게 더 크게 두려움으로 공포로 다가왔다. 그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동료와 나의 근무날짜가 다른 것 외에는 차이가 없었다. 동료가 운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운이 기가 막히게 좋았던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그 순간 목을 매달지 않았던 것은 나에게 법 운운했던 법조인 보호자의 백신효과였다. 동료가 얼마나 그 순간에 그 아이를 살리고 싶어 했는지, 얼마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했는지, 최선을 다했는지 동료들은 알았다. 경찰도, 그 부모도 심지어 생을 마감한 그 불쌍한 아기도 몰랐겠지만, 우리는 알았다. 동료가 목을 매달지 않았던 것은, 우리의 믿음도 일조를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동정이 아니라 너의 불행이 곧 나의 이야기이며, 네가 최선을 다했음을, 너의 한계는 곧 우리의 한계임을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의 나는 소송을 빙자한 협박을, 어린 내가 느꼈던 두려움으로 느끼진 않는다. 법 운운하는 어설픈 법알개들은 지천으로 널렸고, 나는 방어적 진료를 베이스로 방어적인 의료기록을 남긴다. 경찰은 대부분은 사건, 사고를 귀찮아하며, 직업적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비호의적이며, 남을 겁주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경찰을 상대할 때는 돈이 들더라도 변호인을 꼭 동반하는 것이 좋다. 변호인 없이 경찰서에 출석할 경우, 호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남을 도와줄 수 있어서 정말 멋진 직업이라 생각했던 의사인 나는 없고, 그저 사회인으로의 의사인 비겁한 나만 남았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최소 비겁하지는 않았다. 그 어린 친구가, 23살이면 아직 어린데, 너무 어린데 남들보다 영특하고, 남들보다 성실하다는 이유로 빨리 사회에서 한 역할을 맡은 그녀에게 이 사회가 얼마나 버거웠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녀의 고통을 감히 헤아릴 수 도 없다. 다만 내가 슬픈 건 너무 싱그럽고 소중하고 훌륭한 인재가 너무 일찍 삶을 마감했다. 그녀가 교실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삶을 마감한 지는 알 수가 없다.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그녀가 평안을 얻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절대 헛되지 않게 노력할 생각이다.


나는 이제 진상보호자에게 용기 내어 얘기한다. 우리는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 여기에 있는 거라고, 당신 역시 도움을 받기 위해 여기에 온 거라고. 그러니 도움이 당신의 분에 차지 않더라도, 도와주기 위해 여기 있는 우리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아 기분이 상해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악의라고 말한다. 맘카페에서 어떻게 글이 올라오든, 댓글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매도가 되든, 그래서 병원에 해가 되더라도, 무례한 건 무례하다 말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아이를 위해 존재하는 의료, 학교, 이 모든 시스템은 우리 구성원들이 너무나도 잘 구축했기 때문에 모두가 기본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 시스템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경험으로 구축된 것이며, 그러기에 매우 감사한 것이며,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이 기본적인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기본을 알려줘야, 그래야 이 사람이 다음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고 다음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지 않고 선의에 악의로 답하지 않는다. 비겁하게 내 턴에서 폭탄 돌리기처럼 넘기지 않겠다. 당신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다. 당신은 이미 삶을 마감했지만,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곧 나다. 나는 당신을 믿는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한다.  


마지막으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녀가 정말 평안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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