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벤허> 관람 후기
<벤허>의 배경은 로마의 지배로 박해받던 서기 21년의 예루살렘이다. 극은 실제 소설 『벤허』에서 참고한 유다 벤허의 독백으로 시작하고(엔딩도 마찬가지다), 유대인 노예들과 그들을 거칠게 탄압하는 로마 군사들의 잔혹한 당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첫 장면으로 넘어간다. 벤허가 이때 부르는 '희망은 어디에'라는 넘버에서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구세주가 되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현 기독교의 근간이 된 유대 신앙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나, 작중의 메시아는 기독에서 메시아로 인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증을 따르고 있다.
예루살렘이라는 배경과 예수를 연상케 하는 메시아의 존재 덕에 종교적 색채가 강한 극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본작은 오로지 유다 벤허의 성장을 다루고 있으며 메시아는 사실상 맥거핀으로 기능할 뿐임을 고려하면 극의 이해에 종교적 지식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중 메시아의 행적과 그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언급은 대부분 신약 성경에 기반하였으므로 안다면 흥미롭게 보이는 부분이 꽤나 있을 것이다.
먼저 연출 이야기를 안 하고 갈 수 없다. 올해 관람한 많은 작품들의 후기에 도전적, 파격적 등의 표현을 쓴 새로운 연출적 시도를 언급했었는데, <벤허>는 미디어아트 등의 연출 신기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도 대부분의 실체를 무대 위에 구현하는 본원적 연출을 알맞게 버무려 상당히 수준 높은 무대를 만들어냈다. <벤허>는 유서 깊은 원작에 기반하는 완성도 있는 서사와 웅장한 음악만으로도 걸작이지만, 이러한 무대 연출에 힘입어 그 음악과 이야기가 배로 생동감 있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관람한 작품 중 감히 으뜸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벤허>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라고 익히 알려진 전차 경주 장면은 임팩트가 약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원작 소설보다도 유명한 영화 <벤허>의 최고 명장면은 CG 하나 없이 촬영된 전차 경주 장면이지 않은가. 그만큼 뮤지컬 <벤허>에서도 많은 관객들이 기대하고 제작사에서도 하이라이트로 띄워주는 장면인데... 글쎄 가까이서 봤으면 몰입감이 강했을까? 무대와 먼 좌석에서 관람한 본인에게는 그저 그랬다. 그 정도 규모의 장치가 무대에 등장하여 말과 전차 자체를 구현해 낸 것은 멋있었고, 무대 회전과 후방의 미디어아트까지 활용하여 최대한 경주의 느낌을 살린 것은 좋았으나, 그 생동감과 역동감을 관객에게 와닿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혹자가 그냥 소형 회전목마 같다는 평을 남겼는데, 웃프지만 공감했다. 그것과 별개로 본인은 뮤지컬 <벤허>의 하이라이트는 '죽음의 질주' 장면이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벤허>의 또 다른 차별점은 앙상블이 오로지 남성 배우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군대, 검투사나 노예들은 물론, 유흥을 위한 무희도 전부 남성 배우들의 몫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은 고대 로마의 시대적 배경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26명에 달하는 남자 앙상블들이 만들어내는 액션과 군무의 무게감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만들어내는 이들의 중창은 관객들을 압도한다. 거기에 2막 초반의 '텔고' 장면을 포함해 모든 배우들이 상의 탈의를 하는 장면이 많기에, 하나같이 근육이 우락부락하다. 실제로 앙상블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몸을 만드는 데에도 고생을 많이 한다고.
유다 벤허의 성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극의 서사는 철저하게 유다 중심이다. 본인은 이 점도 매우 마음에 들었다. 조연들의 비중을 애매하게 신경 쓰다가 극에서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기 십상이니까. 다만 그 와중에도 메셀라라는 인물이 솔로 넘버 '나 메셀라'의 임팩트와 함께 적절한 동기와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아주 매력적인 빌런으로 호평받고 있으니, 여러 방면에서 정말 완성도 높은 극이라고 생각한다.
벤허는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메셀라에게 복수를 하려 했으나,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메셀라를 통해 듣게 된다. 그의 뜻에 따라 전차 경주를 하여 메셀라에게 승리를 거두지만, 그토록 복수하고 싶었던 메셀라는 허망하게 자결하고,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머니와 여동생은 문둥병에 걸려 더는 벤허와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벤허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울분으로 그 칼 끝을 끝내 메셀라 개인이 아닌 로마 전체, 나아가 세상을 향해 겨누었지만 그들의 왕이 되어 자신의 군대를 이끌어줄 거라 믿었던 메시아가 십자가행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양부를 잃은 슬픔, 친우를 죽여야만 했던 허망함, 다시는 어머니와 함께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절정으로 달한 벤허의 분노가 허망하리만치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벤허 역 박은태 배우의 표정연기, 진짜 소름 끼쳤다.
결국 벤허는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가 메시아와 직접 대면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저들을 용서하라'. 터트릴 일만 남았던 벤허의 분노와 원망을 세상이 아닌 메시아 자신에게 돌리는 한 마디였다. 당연히 그럼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모든 건 무엇이 되는 거냐 하늘을 향해 절규를 내뱉는 벤허였지만, 천둥소리와 함께 그의 앞에 온몸이 깨끗이 나은 어머니와 티르자가 나타났다. 그가 진짜 메시아라는 것에 대한 더없는 증명이며, 그 자신을 향했던 벤허의 복수심에 용서를 불어넣은 기적이었다.
벤허는 로마 귀족으로서의 부귀영화로 잊으려고도, 메셀라에게 복수하려고도 해 보았으나 운명은 야속할 정도로 그에게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메시아, 즉 신은 벤허에게 용서라는 답과 함께 그의 가족들을 건강하게 그에게로 돌려주었다. <벤허>의 주제는 여기에 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 증오와 폭력의 연쇄를 끊는 것은 복수가 아닌 용서에 있다는 것. 기적을 목도한 벤허는 마침내 신의 뜻을 깨달았고,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며 작품이 끝난다.
결국 <벤허>는 시대의 현실에 안주하던 소극적 귀족 벤허가 여러 고난을 겪으며 복수귀로 변모하지만, 비로소 깨달음을 얻고 내면적 성장을 이루어내는 이야기이다. 신의 이름과 그 설화를 빌렸지만 결국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하고자 하는 극이라는 점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고 느껴지더라. 또한 1막의 마지막 넘버 '운명'에서는 벤허가 복수를 다짐하며 '이것이 당신 뜻이었냐'며 격노와 원망을 쏟아내지만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부르는 '운명(Reprise)'에서는 훨씬 후련한 표정으로 '이것이 당신의 뜻, 나는 옳은가'라는 자신의 답을 당당히 내놓는 대비적 연출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지금껏 뮤지컬을 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보통 눈시울이 붉어지는 정도였다면 <벤허>는 관람 중에 끅끅거리며 말 그대로 오열한 작품이다. 글쎄... 무엇이 그리 마음을 울렸을까.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통을 이 악물고 견뎌가며 이루고자 했던 일이 처참히 실패하고 끝내 무너지는 젊은이가 가여워서였기도, 기어코 그 모든 인내의 보답을 받은 것에 감동을 받아서였기도 했던 것 같다. 2천 년 전 유대 귀족의 이야기이지만, 꿈이 좌절되고 가족과 이별하는 원초적인 슬픔에 고금은 없나 보다. 여담으로 본인이 너무 기대하고 감명 깊게 본 작품이라 한번 보라고 추천(+함께 관람)한 지인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너무 재밌게 잘 보고 왔다고 하길래 괜스레 기분이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