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리뷰
데뷔 앨범의 초동 판매량과 음원 성적만을 놓고 보았을 때 그다지 인상적인 결과가 아니었음에도 영파씨가 주목할 만한 루키로 떠올랐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들만이 가지고 있던 특수성 때문이었다.
그동안 아이돌팝 씬에서는 힙합의 틀을 따르는 곡이나 적어도 곡에 랩같은 힙합의 요소를 일부 차용하는 케이스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들처럼 본격적으로 자신의 앨범을 오롯이 힙합 장르로만 채워내는 걸그룹은 흔치 않았다.
예컨대 탄탄한 랩 실력을 자랑하더라도 메인 래퍼의 한 소절에 그치거나 앨범의 수록곡 가운데 한두 곡일 뿐, 앨범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힙합이 아닌 팝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아이돌 그룹 래퍼들을 압도할 정도로 화려한 실력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레퍼런스 삼을 대상을 명확히 하며 씬 안에서 스스로의 영역을 확립하는 이들의 등장은 비단 아이돌 팬들뿐만 아니라 힙합 리스너들에게 있어서도 주목할 만한 포인트였다.
그리고 데뷔 앨범 발매 4개월 만에 새로 내놓은 두 번째 미니앨범에서도 이들은 자신의 색채가 이전보다 짙어진 구성으로 다른 아이돌 그룹들이 가지 않는 길을 향한다. 동명의 유명 힙합 매거진에서 이름을 딴 이번 앨범에는 적어도 케이팝 아이돌에게는 보기 어려울듯했던 힙합 세부 장르, 그리고 힙합은 아니지만 힙합과 맞닿아 있는 장르들을 한 앨범에 담아 스스로의 정체성을 더욱 과감하게 드러냈다.
이 과감함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곡이 바로 타이틀 <XXL>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대표곡인 <Come Back Home>을 오마주한 곡으로, 단순히 오마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maybe maybe baby version Wu-Tang Clan', '남들이 하는 거 따라할 거라면 뭐하러 예술을 하냐고...(중략)...달리 또 Pablo, Abloh처럼 내 Vision은 완전히 다른 거' 라는 가사 그대로 씬을 먼저 걸어간 아티스트들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당당하게 드러낸다.
케이팝 아이돌 최초로 시도하는 레이지 <Scars>와 칩멍크 소울이 들어간 붐뱁 <나의 이름은(ROTY)> 등 힙합의 큰 테두리 안에서 각자 다른 장르를 담아낸 수록곡들과 최근 케이팝의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아프로비츠를 영파씨만의 감성으로 녹여낸 <DND>, 작년의 트렌드 장르이자 올해도 여전히 유효한 드럼앤베이스 트랙 <Skyline> 역시 타이틀 못지않게 리스너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물론 어디까지나 태생적으로 케이팝 아이돌이기에 장르적 타협이 필요한 점은 내심 아쉬울 수 있으나 그럼에도 지금까지 있어왔던 힙합 요소를 차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힙합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다. 우선 영파씨만의 문제가 아닌 특정 장르를 고집하는 아이돌 그룹의 태생적 과제인 지속성/안정성의 문제이다. 사실 다른 아이돌 그룹과 구별되는 정체성이 뚜렷한 음악을 하는 것은 음악적으로는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지만, 아이돌팝에 있어서는 음악적 성취가 곧 상업적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특정 장르에 집중하는 음악적 특성이 일종의 진입 장벽이 되어 팬덤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가 있다 보니 아이돌 그룹의 입장에서는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번 앨범에서는 수록곡 <Scars>와 <Skyline>에 장르적 요소를 줄이고 대신 케이팝 요소를 가미하는 방식으로 이를 풀어냈는데, 앞으로도 지금의 행보를 이어가려고 한다면 아이돌 팬덤과 힙합 리스너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절충안을 좀 더 고심해 봐야 할 듯하다.
더불어 팀의 퍼포먼스 측면에서도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안정적인 편이지만 <XXL>이나 <나의 이름은(ROTY)> 같은 곡에서 팀의 리더인 정선혜가 선보였던 인상적인 랩에 비하면 다른 멤버들의 존재감이 크게 돋보이지 않다 보니 다른 멤버들의 강점을 돋보일 수 있는 요소를 새롭게 마련하여야 한다.
새삼스레 하는 말이지만 단지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할지라도 필자 본인은 외적으로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과거의 성공을 반복하는 획일적인 아이돌팝에서 벗어나, 진입장벽이 존재하더라도 이들처럼 자신만의 정체성을 갖춘 팀이 많아질수록 씬이 정체되지 않고 더욱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어 보일지라도 꾸준히 자신만의 길을 걷는 영파씨의 발걸음을 내심 응원하게 된다. 이들이 앞으로도 지금처럼 아이돌 팬과 힙합 리스너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원하며 리뷰를 마친다.
By Latte (24.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