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응급상황 1 – 랩을 사랑한 아이
녀석의 턱은 남들보다 좀 많이 길었다. 랩을 자신의 몸보다 사랑한 아이는 래퍼 자이언티를 닮은 아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이언티의 긴 턱을 닮은 아이였다. 아이는 ‘밝음형’ 인간이었다. 나는 녀석이 울상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녀석은 모의고사를 망친 날에도 슬픔의 흔적 하나 없이 해맑게 웃었다. 주변 친구가 제발 좀 조용히 하라고 욕을 해도 웃고, 선생님들이 “너 때문에 시끄러워 죽겠다.”며 큰소리로 꾸짖어도 웃었다. 녀석은 뇌가 크게 다친 사람처럼 웃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 학원엔 떠드는 아이들을 벌주고, 심하면 발바닥을 때리는 선생이 있었는데, 녀석은 그 선생에게 발바닥을 맞고도 뒤돌아서면 “헤이, 선생님. 아주 좋았다구요.” 하면서 너스레를 떨곤 했다. 반가운 사람에게 인사라도 하듯 손을 들고 미소를 날리는 건 녀석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나는 녀석이 좋았다. 녀석의 자유로움과 미소가 좋았다.
나는 대한민국 사교육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비판하고자 기숙학원에 입사했다. - 교육 현실 비판은 내가 기숙학원에 들어온 다수의 이유 중 하나였다. - ‘직접 체험하지 않고 하는 비판은 비판이 아닌 하나의 의견에 불과할 뿐이니까.’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낳은 참담한 결과였다. 비판이고 나발이고 하루하루를 견디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도전을 좋아하는 삶을 살았지만, 기숙학원에서의 삶은 인간을 원초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게 했다.
녀석은 성적 따위로 인간의 행복을 매길 수 없음을 기숙학원 안에서 증명하고 있었다. 남보다 성적이 높지 않으면 어떠한가? 녀석은 나름의 노력을 했고, 지옥에서조차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최대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을 좋아했다. 착실한 아이 중에서도 나름의 자유를 갖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조용조용 자신만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며 기숙학원 생활을 견디는 아이들에게서, 나는 인간 존재의 잔잔한 위대함을 느꼈다. 가끔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자유의 감옥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느끼는 인간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위대하다. 그들의 존재만으로 고된 일상에서 우리 ‘갇힌 자’들은 위로를 선물로 받는다.
녀석과 인사할 때면, 나는 잘나가는 래퍼들의 안부 인사처럼 주먹과 주먹을 맞댔다. 녀석은 그때마다 “예압! 역시 정티쳐~ 받아 줄 줄 알았습니다.” 하면서 자이언티 턱 같은 미소를 보냈다. 가끔 (조금 역겨웠지만) 윙크를 날리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이놈은 뭐가 돼도 되겠다.’ 싶었다.
문을 “쾅” 하고 닫은 나는 잠기지 않는 문고리를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등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아쉽게도 문고리는 잠글 수 없는 구조였다. 몇몇 기숙학원에서는 학생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걱정하여 문고리에 잠금장치를 아예 달아 놓지 않는다. 내가 근무했던 학원은 전부 그랬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떨궜다. ‘나는 변태에게 심한 꼴을 당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손에 이어 다리까지 벌벌 떨려왔다.
팬티만 입고 콜라나 홀짝이며, 망상에 빠져있던 행복한 순간에 이런 황당한 사건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래서 인간은 어느 순간에건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 불행은 예상치 못한 평범한 날에 일상을 무너뜨린다. 공포와 함께 좌절감이 함께 찾아왔다.
그때, 번뜩이며 차 트렁크에 넣어놨던 호신용 쇠막대가 머릿속을 스쳤다. 차는 100미터 거리의 선생님 전용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문을 쾅 하고 닫자, 정박 변태 녀석도 놀랐는지 잠시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 잠깐의 정적 동안 방안을 급히 둘러봤지만, 무기로 쓸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쓸만한 도구라곤 책상 위에 찌그러진 콜라 캔만 나뒹굴 뿐. 저 콜라 캔으로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어쩌지 못한다. 콜라 캔은 재활용될 뿐이다. 믿었던 탄산의 배신이었다. 콜라 회사에서 콜라병을 유리에서 캔으로 바꾼 순간부터 배신의 그림자가 나에게 드리워 지고 있던 것이다.
‘거기서 쇠몽둥이를 가져와야 한다!!’
‘몽둥이를 잡으면 나에게도 다시 야수와 같은 용맹함이 샘솟으리라!!!’
하지만 주차장까지는 100미터도 더 되는 거리다. 문을 연 순간 정박 변태의 정박 펀치 공격을 당한다면 나의 계획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다. 나는 문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었다.
‘나더러 대체 어쩌란 말인가?’
나를 기숙 노예로 만든 신이 원망스러웠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어지러웠다. 머리를 레몬즙 짜듯 쥐어 짜봐도 위험에서 벗어날 탁월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괴한이 돌아갈 때까지 버텨야만 하나?’, ‘팬티만 입고?’하고 이상한 부끄러움이 몰려오던 순간,
얇은 철제문 사이를 두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선생 안에 계셔?”
거칠게 목을 긁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낯이 익다 못해 아주 탐스럽게 잘 익은 목소리다. 매트릭스 영화를 보면 파란 약과 빨간 약의 이야기가 나온다. 파란 약을 먹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고,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볼 수 있다. 인생은 영화가 아니다. 파란 약을 먹었더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빨간 약으로 바꿔 먹을 수 있다. 비록 부끄러움이 따를지라도 말이다. 이제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망상의 세상에서 진실의 세상으로 나갈 때다. 소름이 돋았다. 나의 바보 같은 망상을 뚫고 어떻게 얼굴을 마주한단 말인가.
“정 선생, 접니다. 잠깐 괜찮으셔?”
“아뇨. 아뇨. 잠깐만요 문 열지 마세요! 열지 마세요!”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내 목소리를 들은 노인은 나보다 더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이고 큰일 났어. 빨리 나와보셔”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확인한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문고리를 반대로 돌려 문고리에서 나의 손이 미끄러지게 만들었다. 역시 마스터에게는 다 방법이 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진실의 문이 열리고 나의 팬티는 반쯤 내려가 있었다.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인어공주처럼 누워 파닥거리며 한쪽 다리에 바지를 욱여넣었다. 그의 눈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니 제가 지금 팬티만 입고 있어서요.”
사감 선생님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 하고 있는데, 팬티만 입고 있는 겨 그래. 아이구.”
“그...그런거 아닙니다. 자, 잠깐만요. 옷 좀 입고 나갈게요”
급하게 바지를 입다가 나머지 발 한쪽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엉덩이를 드러낸 채 앞뒤로 몸을 왔다 갔다 움직였다. ‘하...’ 현타가 왔다. 사감 선생님이 ‘쯧쯔쯔’하고 혀를 차며 문을 닫고 나갔다.
“빨리 마무리하고 나오셔.”
“아, 아닙니다. 마무리할 일은 없어요! 아니, 없었어요. 아니 없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당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한심한 놈. 울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나는 살짝 찌그러진 콜라 캔을 화풀이하듯 완전히 찌그러뜨리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문밖을 나서니 놀란 아이들이 복도에 우글거리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들이 나의 모습을 확인하곤 목을 길게 빼고 물었다.
“선생님 뭔 일 났어요?”
‘났지. 근데 선생님 일보다 큰일은 없을 거야. 내가 방금 사감 선생님께 “꺼져 변태 새끼야!”라고 했거든’
“사감 선생님. 근데 진짜 무슨 일이예요?”
머리에 허옇게 눈이 내린 사감 선생님이 걱정 반 흥분 반 섞인 목소리로 나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의 동공 안에서 불안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구 걔 있잖어. 노래 중얼중얼 거리는 애.”
“아, 예. 근데 걔가 왜요?”
“걔 귀에서 피가 나. 그것도 아주 철철!”
피가 철철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