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유일하게 러시아 회화작품을 다루는 갤러리 까르지나는 한전아트센터 소속인 한전갤러리에서 7월 27일을 끝으로 러시아 모더니즘, 리얼리즘 작품들을 전시했었어요. 러시아 회화작품들이 현대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기에 전시회 마지막날에 스케줄을 겨우 맞춰서 다녀온 후 이렇게 리뷰를 쓰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회화는 아방가르드한 성격이 특징이죠. 예를 들면, 미니멀리즘 회화에 영향을 끼친 절대주의 작가 카지미르 말레비치, 세계 최초의 추상회화를 그린 바실리 칸딘스키 그리고 블라드미르 타틀린은 구성주의(구축주의) 작가로 활동하면서 세계 3대 조소 화가인 알렉산더 칼더의 키네틱아트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번전시는 아방가르드와는 달리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모더니즘, 리얼리즘의 러시아 화가 17명을 한전갤러리에서 소개했습니다. 전시는 1층에 두 개의 전시실과 2층 기획전시실에서 추상주의 그림 120여 점, 무드 풍경화 180여 점으로 총 300여 점을 작품을 소개한 규모 있는 전시였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에게 생소한 러시아 화가들을 소개하는 것도 있지만, 다양한 국가와의 해외 교류전을 통해 수준 높은 회화작품들을 국내에 전시함으로써 국내 예술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가치 있는 작품들을 한국에서도 접할 수 있게 예술적 가치와 교류에 대한 희망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게 저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명작 from Russia'전시회를 연 한전갤러리 제1전시실 전경, 출처 한전갤러리.
제1전시실에서는 소련이 붕괴되고 최초로 옥션 경매 작가로 러시아 추상화를 알린 알렉산더 그레고리예비치 시트니코프의 작품들로 시작해서 이고르 미하일로비치 오를로프, 올가 A. 쉬베데르스카야 그리고 올가 바실리예브나 불가코바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던 작품은 로맨틱 리얼리즘의 작가 이고르의 작품입니다. 제가 봐왔던 풍경화와는 조금 다른 구도와 원근감이 있어서 신기했어요. 풍경은 현실에 있을 법하지만, 그림 속 사물들의 묘사는 동화 속 이야기 같아서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잠자리와 꽃병>, <결국 날아오르다>의 작품에서 작가만의 주관적인 시선과 특별한 감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고르 미하일로비치 오를로프가 그린 '잠자리와 꽃병'(왼쪽), '날아오르다'(오른쪽), 출처. 한전갤러리.
다음으로 르네상스 느낌이 강했던 올가 A. 쉬베데르스카야 작품입니다. 작가님의 작품 속 여인들은 하나같이 우아한 표정과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특히 <아침 수영>에서는 두 여인이 물속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성의 미(美)를 잃지 않고 뒤에 배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작품만의 분위기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76줄의 사랑문구>의 작품은 한 겨울의 배경 속에서 여인이 눈에 제일 띄고 군대가 보입니다. 그리고 76줄의 러시아어로 된 사랑의 문구가 그려져 있죠. 군대가 성을 침략하는 가운데 귀족의 여인이 죽기 전 혹은 포로가 되기 전에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남기는 글을 남기는 것처럼 보여서 작품이 저에게 로맨틱하게 다가왔습니다.
이외에도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콜라주는 아니지만, 그림이 사각형 혹은 다른 모양으로 쪼개져 보이거나 덧대어 보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올가 A. 쉬베데르스카야 작가님만의 독창적인 언어로 이야기를 그려냈다고 느껴졌습니다.
아침 수영, 80cm x 150cm, Oil on Canvas, 2020. 출처 한전갤러리.
올가 A. 쉬베데르스카야의 작품 '76줄의 사랑문구'(왼쪽), '은방울꽃 공식'(오른쪽), 출처. 한전갤러리.
'명작 from Russia'전시회를 연 한전갤러리 제2전시실 전경, 출처 한전갤러리.
제2전시실에서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인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볼코프와 선명한 색채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인 전통 아르메니아 화파 므헤르 차티냔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선, 세르게이 작가님의 작품은 초현실주의 작품답게 상상력을 자극했고 러시아 정치이념인 공산주의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서정적이고 풍자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동물을 커다랗게 그려 사람의 친구처럼 그린 작품은 인간의 휴머니즘을 너머 동물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림 속 따뜻한 채색화풍이 이를 더해주는 거 같았어요.
흰 까마귀, 60cm x 80cm, Oil on Canvas, 2001. 출처 한전갤러리.
사실 러시아 초현실주의 작품은 태어나서 처음 봐서 되게 신선했어요. 세르게이 작가님의 작품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가을의 부케>입니다. 작품을 보면 화병 속에 꽃 대신에 도시 속 건물들이 빼곡히 있습니다. 꼭 화병이 도시이고 건물들은 도시 속의 피곤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낙후된 건물들은 테이블에 떨어져 있는데 아마 도시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부작용을 나타내고 쉴 곳 없는 남자는 화병밑에 그늘 속 이죠.
그림은 고전느낌이 나지만, 2015년 작품으로 현대 소시민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거 같아요. 그림이 빽빽해서 다소 답답해 보였지만 아마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제가 도시 속에서 쉴 곳을 찾지 못하고 피곤함과 답답함을 느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저 화병에 공원을 상징하는 꽃을 그려 넣었으면 어느 정도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가을의 부케, 65cm x 60cm, Oil on Canvas, 2015. 출처 한전갤러리.
'명작 from Russia'전시회를 연 한전갤러리 기획전시실 전경, 출처 한전갤러리.
2층 기획전시실에서는 러시아 리얼리즘 회화와 무드 풍경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말 사진처럼 그려진 작품들이 있고 풍경화 속 인물들을 통해 또 한 번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작품들도 있었어요. 전시실에는 러시아의 국민화가로 불리는 미하일 유리예비치 쿠가츠의 작품과 러시아 리얼리즘 풍경화의 대가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목신 그리고 생생한 붓터치로 작품에서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는 블라디미르 빅트로 비치 펜튜흐 등등 서로 각각 특징들이 있는 풍경화들이 전시가 되어 있어서 1층에 있는 작품들보다 감상하기가 편했습니다.
고로호배츠키 평원, 80cm x 120cm, Oil on Canvas, 2008. 출처 한전갤러리.
2층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작가는 이반 미하일로비치 쿠가츠 입니다. 이 작가는 할아버지인 유리 쿠가츠, 아버지인 미하일 쿠가츠 이렇게 3대를 이어온 화가 집안의 작가입니다. 쿠가츠 가문으로서 작품활동을 한다는 게 정말 부담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릴 적부터 많은 명작의 그림들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품들은 쿠가츠의 화풍을 이어받아 사실주의적 표현과 정교하고 섬세한 느낌이 두드러집니다. 아버지 미하일 쿠가츠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작품들이 밝고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늘 예쁜 그림들만 봐서 이러한 작품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특히 풍경을 흐릿하게 하고 앞에 놓인 꽃과 화병을 강조하기 위해 색채와 질감을 모두 풍부하게 표현하여 꽃정물화 형식의 작품이 인상 깊었습니다.
꽃 정물(플록스), 80cm x 70cm, Oil on Canvas, 2021. 출처 한전갤러리.
이반 쿠가츠의 아버지이자 러시아에서 무드 풍경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라고 평가받는 미하일 유리예비치 쿠가츠의 작품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미하일 작가님의 작품은 서정적이고 은은한 색채 표현을 합니다. 작품 속에는 인물들도 등장해서 스토리텔링을 하면서 감상을 할 수 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 중에서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전장으로>입니다. 사실 작품의 캡션을 보기 전에는 2차 세계대전 시기의 그림인 줄 알았는데 이 작품은 2020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 징병되어 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작품입니다. 미하일 작가만의 분위기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전쟁에 대한 고통을 작품으로 그린게 현재 러시아 국민들을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장으로, 90cm x 110cm, Oil on Cardboard, 2020. 출처 한전갤러리.
다음으로 작품 <먼 길>입니다. 작품 안에는 여인이 서있고, 설계자가 의도한 길이 아닌 사람들이 다니면서 생긴 길이 그려져 있습니다. 길은 여인이 걸어온 길이 될 수 있고 아님 가야 할 길이 될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아니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이라고 볼 수도 있죠. 작가님의 정확한 의도는 사실 모르겠지만, 관람객의 감상에 따라 한 여자의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저는 이 작품을 봤을 때 길을 등지고 있는 모습이 여인이 가만히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혹은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할지 생각하는 여인으로 보였습니다.
이외에도 미하일 쿠가츠의 은은한 색감의 풍경화가 많지만, 개인적으로 이 두 작품을 보면서 왜 작가님이 러시아의 국민화가로 칭송받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러시아인들의 삶이 제대로 묻어나 있는 작품들이 관람객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고 거기다가 풍경으로 심미감을 얻어내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인 거 같아요.
먼 길, 71cm x 101cm, Oil on Cardboard, 2014. 출처 한전갤러리.
또 기억에 남았던 화가는 바로 블라디미르 빅토르비치 펜튜희 작가님의 작품인 <봄의 아침>입니다. 사진에서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작품을 실제로 보면 정말 붓터치가 예술입니다. 작품들은 주로 러시아 북부, 시베리아의 마을 전경이 특징인데, 몇몇 작품들은 우리나라의 시골풍경과 흡사해서 한국에서 작품을 그렸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획전시실에는 정말 아름다운 풍경화들이 많고 거의 사진이라고 봐도 될 정도의 작품들이 있지만, 블라디미르 작가님의 작품은 유화의 질감을 잘 활용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성이 느껴졌습니다. 작품 속 붓터치를 보면 왜 그림은 그림스러워야 그림이지...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이번 전시에서 유화의 매력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어요.
봄날 아침, 50cm x 70cm, Oil on Canvas, 2019. 출처 한전갤러리.
미하일 이조토프의 '떠오르는 달'(왼쪽), '겨울 풍경'(오른쪽)
이 밖에도 정말 적고 싶은 작품들이 많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이만 줄일까 합니다. 이번 전시회에서 본 러시아 작품들은 뭐랄까... 아카데믹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작품 속에서 스토리텔링보다는 그림 그리는 스킬이나 테크닉 그리고 다양한 기법들을 위주로 그림을 감상해서 현대미술을 감상했다기보다는 고전미술을 감상한 거 같았습니다. 몇몇 작품들은 샤갈이나 모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가장 좋았던 점은 화가들이 옛 전통을 계승해서 현재까지 이어오는 모습이 우리나라 사자성어인 온고지신(溫故知新)이 떠올랐습니다.
현대미술은 시간이 지날수록 스토리텔링이 강조됩니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들을 미디어로 보여주기도 하면서 시각적 자극을 많이 추구하고 복잡해지는데 전시회에 출품된 러시아 현대미술은 따스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날이 웅장해지고 무분별한 충격적인 행위를 마다하지 않죠. 관심을 끌려는 몇몇 현대미술 작품들에게 '미술은 캔버스와 물감만으로도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어내고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