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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쁜파크 Jan 04. 2024

학원 없는 중1의 자기주도

평일 하루 중 유일하게 다 같이 모여 앉은 저녁 시간. 나는 숟가락 들기도 전인데, 아이들이 각각 '내가 말한 책 도서관에서 빌렸는지, (수학 문제집) 3-1 주문했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묻는다. '엄마도 바빴어. 아직 둘 다 못했어.' 저녁 설거지까지 마무리하고 여유가 생기니, 다른 것도 아니고 책 원하는데 빨리 준비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 1 딸의 수학, 영어 계획 메모


다음날 첫째 방에서 책상의 메모를 발견했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는 첫째는 아직까지 학원 없이 공부 중이다. 어려서는 나의 가치관으로 학습지를 시키지도 않았고 교과 학원도 보내지 않았는데, 아이가 크면서 원하면 보낼 생각이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초6 겨울방학에 '엄마, 수학 학원을 이제 다녀야 할까?'라고 물었다. 주변 친구들이 기존 영, 수에 추가로 국어, 과학도 다님을 알고는 있으니 딸도 어렴풋이 중학교에 대한 부담은 있었으리라. 그러나 친한 친구가 쉬는 시간까지 수학학원 숙제를 풀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며 과한 숙제는 싫다는 생각, 학원 버스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들 것 같다는 이유, 친구의 영어 학원 초청 행사에 다녀오면서 밤늦게 끝나 피곤할 것 같다는 이유가 섞여 EBS 인강으로 해보겠다며, 수학 개념서 1-1을 사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수학은 뒷전이고, 당시 해리포터 원서에 빠져 해야하는 일과 약속을 제외한 남은 시간에 밤낮없이 읽더니 10일 동안 두꺼운 시리즈 책을 모두 읽어 내려갔다. 그때 했던 말이, '엄마, 수학도 해야 하는데... 일단 이게 너무 재미있으니까 이거부터 읽으려고.'였다. 그렇게 꾸준히 책을 보던 아이가 이 메모를 발견했을 때는 책이 뒷전이 되었고, 중3 수학 개념집까지 진도를 나가면서, 중 1,2 영어 문법과 수학 심화를 보고 있었다.  


1학년 1학기 때 자유학기제로 중간, 기말시험을 치르면서 점수와 수행평가에 더 마음이 기울었는지, 시험 없는 1학년 2학기가 되자 수학과 영문법을 해나가는 중이었나 보다. 아이가 수학이든 영어든 새로운 단원을 접한 날이면 저녁 식사시간에 어렵다는 말을 하는데, '한 학기 동안 그 양을 혼자서 해 나간 게 대단하다.'라는 위로를 건넨다. 나의 진심이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주변 지인이 신기해하면서 아이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물어 온다. '언니는 애들 학원 안 보내는데, 안 불안해?' 우리 부부는 일단 대학을 목표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을 원하면 가지만, 원하지 않으면 안 가도 되고 졸업 후 공부가 필요하다 느끼면 그때 해도 되기에 점수, 성적을 푸시하며 학원 보낼 생각이 없다. 대신 기본 생활을 잡아주며 아이의 마음은 지켜주려 했다.


첫째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대체로 확실하다. 부끄러움이 많아 앞에서 리드하거나 발표하는 것을 싫어한다.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도 특히 불편해하고, 세심한 아이라 조리원 신생아실에서도 울면 우리 딸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원하는 일을 할 때는 달랐다.


초2 때 도서관에 갔다가 '별자리 수업' 안내문을 발견하더니, '엄마, 나 이거 듣고 싶어.' 도서관 강의실에서 주 1회, 2시간 별자리 수업을 4주 동안 듣고, 마지막으로 양주에 있는 송암스페이스센터에 가서 밤에 별자리를 보고 오는 걸로 마무리된다. 아는 사람 없는데 혼자 가는 거 괜찮겠냐, 무엇보다 천문대 가는 날이 아이 생일이라 천문대에서 저녁 먹고 별자리 보고 오면 밤 10시즘 될 텐데 괜찮겠냐 물었다. 아이 생일에는 명절 마냥 이모, 삼촌까지 모두 모여서 생일파티를 했는데 그럼에도 천문대에 가겠다는 아이, 단체로 버스 타고 밤늦게 돌아와서 신나하는 아이를 겪으며, 자신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 안에서 원하는 것은 열심히 한다는 걸 알아갔다.


초5 때는 한라산을 등정하고 왔다. 어렴풋이 백록담까지 다녀오고 싶다고 하더니, 제주도 여행 가자는 이모의 제안에 그럼 한라산 꼭대기까지 가자고 아이가 먼저 말했고 이모랑 둘이 제주도로 떠났다. 나 포함 주변 어른들이 힘들 거라고 하니 아이는 매일 운동하며 준비했고, 이모랑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힘든 12시간의 한라산 등반을 마무리했다. 날이 맑아 백록담의 경치는 운 좋게 잘 감상했으나, 내려오는 길이 너무 힘든 나머지 땅바닥에 털썩 눕기도 하고 마침내 한라산 입구 도착 했을 때는 차에 타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단다.  


보통 엄마표 영어 습득 방식으로 영어를 접하며 문법을 배우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중학교 입학 전에 문법을 한번 훑으라고 권한다. 그런데 그때도 원서에 빠져 있던 아이라 나도 문법을 강요하지 않았다. 1학년 2학기 때 영문법을 스스로 시작하면서 모르는 것을 내게 물어 올 때, '너 책에서 다 봐서 알 텐데 책 다시 읽어 봐.'라고 하니 언제 책을 읽었지 싶은 표정이다. 책에 빠져서 잠도 늦게 자던 모습이 1년도 안 됐다고 알려주니, '맞아 그랬네'하고 웃으면서도 아직은 문법을 잡는다. 크리스마스에도, 연말에도 친구 만나고 들어와 인강 듣고 공부하는 언니를 보며 둘째가 묻는다. '언니는 왜 크리스마스인데도 공부해?'


스스로 해나가는 아이가 기특하면서도 저렇게 하는 공부는 맞을까, 학원 수업이나 학교 수업도, 우리나라 입시도 맞다고만 할 수 없고, 책, 글쓰기, 토론, 운동, 악기 등 할 게 너무도 많은 요즘. 그래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부족한 게 많은 아이일 수 있지만, 원하면 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는 요즘이라 그저 아이의 모습을 응원하고 그 모습을 보며 아이에 대해 알아간다.


얼마 전에 조카가 전북에 있는 상산고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얘기를 나누다 보니 딸이 학교에서 받은 진료 수업 이야기를 전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아직 모르지만, 일단 인문계 고등학교로 가고 싶고, 그런데 잠은 집에서 편히 자고 싶으니 불편한 기숙학교는 싫고, 집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외고는 제2 외국어를 굳이 중점적으로 하고 싶지 않기에 싫다고 한다. (물론 합격 가능성과 상관없이.)

p. 213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마지막 부분에 개츠비가 젊었을 때 적은 계획표가 나온다. 개츠비 아버지가 닉에게 분 단위 계획표를 보여 주며 성공한 개츠비를 따라서 해 보라는 듯한 뉘앙스를 보이는데 이 계획표에 대해 엄지작가들과 팟캐스트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들에 대한 환상일 수도 있다고. 딸의 메모로 글을 쓰는 나를 보니 개츠비의 아버지가 생각나며 웃음이 난다.


환상이라도 좋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열심히 할 거라는 환상에 더해, 아이가 스스로 해나가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이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는 힘이다. 모호함의 연속인 삶에서 아이는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스스로 찾고 알아가는 힘을 키우는 중이고, 어떤 교육이 맞는지 정답은 없는 상황에서 나는 주변이 아닌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에 대해 알아가는 일이 내가 줄 수 있는 응원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별자리를 좋아했었나? 한라산은 왜 올라간다고 했대? 그때 책에 빠져 읽었었나? 그렇게 공부를 했었나?' 이런 과정을 거쳐 너를 찾아갈 딸의 기록을 대신 남기며, 너의 메모 중, '토. 일 : 그냥 할 수 있는 거.' 부분이 유독 마음에 드는 엄마는, 지금처럼 계속 응원할게.


이렇게 아이가 나를 키우고, 나는 아이에 대해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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