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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쁜파크 Mar 15. 2024

앵앵거리는 쇠파리로 남고 싶지 않아서

소크라테스 <변론>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두 달에 걸쳐 읽었다. 철학은 늘 뿌연 연기에 둘러 쌓인 느낌이다. <변론>을 읽는 동안 짧지만 통과하기 어려운 터널에 갇힌 듯했다. 그러나 나만의 생각이 솟아나는 순간들이 있었고, 어렴풋한 빛이 되어 나를 안내해 주었다.       


70대의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론한다. 그는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했다. 당시에는 변호사가 없으니 피고소인이직접 변론하고, 판사가 없어서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의 다수결로 형이 결정된다. 심지어 항소심 절차도 없어서 재판의 결정과 집행이 빠르다.   


고소인은 형벌로 사형을 제시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의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무죄와 가치를 증명했다. 그 과정에서 다소 터무니없는 비유를 들었다. '나는 일종의 쇠파리야.' 말 주변을 맴돌다가 귀찮아서 죽임을 당하는 쇠파리라니. '쇠파리'를 떠올려 본다. 어렸을 때, 시골의 소 축사에서 본 쇠파리가 그려졌다. 소 배설물이 늘어진 축사에는 파리가 끊이지 않았다. 축사 관리자는 파리 잡는 끈끈이 테이프를 천정에 여러 개 걸어 놓았고, 소들은 긴 꼬리로 찰싹 쳐서 파리를 잡았다. 사람들을 찾아가 질문을 던지는 소크라테스는 고소인들에게 윙윙거려 성가신 존재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쇠파리'의 비유는 우스우면서도 정확했다.

© wheelbite_media, 출처 Unsplash

물론 많은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 주변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의 대화법을 듣고 싶어했다. 한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 개혁적인 가르침이 되기도 하고, 앵앵거리는 눈엣가시로도 여겨지는 상반된 모습. 그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받아 드렸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지금 나의 말은 주변에 어떻게 들릴까 고민하게 되었다.

Benjamin Jowett의 영어 텍스트


온라인 영어 독서모임 브이클럽에서 진행한 <Apology>의 일부분이다. 고소인 밀레토스(Meletus)에게 소크라테스가 반론할 때, 반복되는 구문이 눈에 띄었다.


질문을 정리해 보면, '행하는 주체는 믿지 않으면서, 주체의 행위를 믿는 것이 가능한가?'로 모두 연결됐다. 말은 믿지 않으면서 말의 서커스를 믿을 수 있는가? 연주자는 믿지 않으면서 연주는 믿을 수 있는가? 신은 믿지 않으면서 신의 힘과 능력은 믿을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앞서, 소크라테스는 위의 본문 첫 줄에서 밝혔다.


I am pretty sure that you do not believe yourself. / 밀레토스! 너는 네 자신을 믿지 못해.


소크라테스의 반증을 종합하여, '주체자인 너를 믿지 못하니, 너의 고소장도 믿을 수 없다.'라는 결론에 나는 도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한 수사학에서 로고스(논리), 파토스(감성), 에토스(신뢰)를 강조한다. 이중 에토스(신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으며, 얼마나 신뢰를 주는지 가리킨다. 말하는 자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데, 쉽게 쌓을 수 없어서 가장 어렵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부분에서 고소인, 밀레토스 자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그의 고소장이 거짓이라고 반증한 것은 아닐까?


나의 이야기가 매일 마주하는 아이들과 남편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로 남지 않고, 마음에 닿길 원한다. 아이들이 단지 엄마라서 좋아했던 시기를 지나 한 사람으로서 나를 바라볼 때, 마음이 움직이고 사랑이 생기길 바란다. 그동안 쌓인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이성과 감정에 더하여, 나의 모습 자체가 믿음을 줄 수 있도록 이제는 나를 가꿔야겠다.


<변론> 마지막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남을 비방하기보다 '자신을 향상시켜라' 말한다. 아이와 남편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을 때, 상대를 탓하기보다는 나를 향상시키는 일에 더 비중을 두어야겠다. 방학동안 꾸준히 운동하는 나의 루틴을 보던 중학생 첫째가 헬스장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엄마가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책 제목을 살피는 아이의 시선이 느껴지고, 컴퓨터에 앉아 무언가 쓰는 내 뒷모습에 아이의 시선이 머문다. 핸드폰 사용을 줄이라는 말 전에, 나부터 폰을 멀리 치워둔다. 아이들이 주변을 따뜻이 챙기길 바라는 만큼, 내 주변을 먼저 둘러본다.


쇠파리처럼 앵앵거리고 끝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글로서 나를 가꾼다. 두 달 동안 만난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나의 삶도 돌아보게 한다. Examine your life.


© spencerdavis,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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