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와 해물로 디톡스
이런 기분이 드는 날이 있다. 온갖 부정적이고 추한 것들이 내 머리속에 잔뜩 들어앉아 있어 제발 이것들좀 떼어내고 싶은데 진득하게 눌어붙어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 않는 날.
예를 들면 누군가가 끔찍이도 싫은 나머지 그의 만사형통이 못마땅하거나, 거대한 슬픔에 사로잡혀 압도될 것 같은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 감정은 날씨라 했던가 그냥 두면 지나간다고. 물론 맞는 말이지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우산 하나 없이 속수무책으로 비를 맞기보단 요즘의 나는 작은 시도들로 이런 감정들에 잠식되지 않으려 애쓴다.
샤워하기, 가벼운 운동이나 산책, 독서, 수면 등등 여러 방법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나는 우선 먼저 디톡싱 메뉴를 먹으며 마음을 달랜다. 신체의 허기짐이 마음의 허기짐으로 번지기도 하고, 한국인 특유의 '밥부터 먹자'는 정서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려나.
이럴 때 먹는 요리는 복잡해서도 안되며, 느끼하고 기름진 맛보다는 가볍고 산뜻한 맛이 좋다. 파스타를 한다면 토마토 파스타가 좋겠지. 육류가 들어가기 보다는 신선한 해산물을 화이트 와인에 살짝 볶아 개운함을 더한 맛이 더 잘 어울릴 테다.
그리하야 만든 해산물 토마토 파스타. 레시피는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변형해 보았다.
자투리 양파와 마늘, 알리오 올리오 하다 남은 이탤리언 파슬리, 토마토를 다이스로 다져준다. 파슬리는 옵션.
다이스한 양파와 마늘을 약불에서 볶다가 노릇해지면 새우를 넣고 볶아준다. 새우는 뻑뻑한 식감보다 탱글한 식감의 새우가 더 어울린다. 토마토 소스는 반드시 홀토마토를 사용할 것. 시판 토마토소스는 깊고 진한맛이 부족한데 비해 캔으로 된 이태리산 홀토마토는 지중해의 뜨거운 햇볕을 받고 자란 토마토 맛의 정수를 느끼게 해준다. D.O.P등급을 받은 캔이라면 더욱 좋다.
8-9분간 삶은 링귀니면을 소스에 볶아준다. 중불에서 살살 볶다가 면이 거의 익으면 불을 끄고 올리브오일과 면수 반 국자를 붓는다. 토마토 파스타 역시 만테까레를 거쳐야 면과 소스가 자연스레 어우러진 맛이 난다. 다만 수분이 많아 오일파스타보다 착 붙는 느낌은 덜 했다.
접시에 파스타를 담고 다진 파슬리를 올려주면 근사한 한 끼가 완성된다. 파슬리는 건조된 파우더와는 전혀 다른 맛이 나며 향긋한 맛이 어느 파스타와도 잘어울려 냉장고에 소량씩 구비해두면 요긴하다.
정성껏 만든 파스타를 한 입 먹으며 드는 생각. 요리는 분명 몸 뿐이 아니라 마음을 고치는 데에도 탁월하구나. 시원한 샤도네이 한잔과 상큼한 토마토와 푸릇한 올리브오일의 조화로움이 꽉 들어찬 머릿속을 비워주는 느낌. 그래, 나는 원래 이토록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는데.
건강하고 공들인 음식을 먹는, 스스로에게 베푼 호의로 나는 조금 더 나다워지고 너그러워졌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미워하고 슬퍼하기보다는 이 순간을 더 즐기게 된다. 폭우 속에서 나를 방치하지 않는 가장 효과적인 우산은 역시 내겐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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