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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희 Aug 02. 2023

'의 좋은 형제' MZ편

결혼 십 년 만에 주신 맏이의 돌잔치로(95년 6월생) 전국적으로 들썩일 때, 현기증으로 신호를 보내면서 서둘러 우리에게 와 준 막내(97년 1월생). 둘은 1년 7개월 터울의 형제다.


얼마 전 이 둘이 각자의 휴가기간을 맞춰, 3박 4일로 일본 여행을 했다.


맏이는 해외로는 처음이었다. 4세 때부터 비행기도 탔고, 아빠 등에 업혀가며 한라산, 설악산을 오르기도 했었지만, 타국으로는 첫여행이다. 직장에 휴가 신청을 하고, 여권을 만들고, 시력에 맞춰 선글라스도 장만한 맏이가 새안경을 쓰고 ‘어때요?’하며 내게 물어왔다. 그동안 중‧고등학생으로 오해받았던 '동안의 느낌' 보다는 어른스레 느껴졌다. 나는 ‘오, 멋있는데!’하고 엄지를 들어 올렸다. 꼭 먹어봐야 할 음식, 가봐야 할 곳, 기념품 등 리스트도 작성하며 맏이는 나름대로의 여행맵을 그려나갔다. 무릎 관절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라 동행이 어려웠던 나를 위해 미리 장도 봐두고, 외가에 모시고 가 할머니도 찾아뵙고, 병원도 미리 다녀오는 등. 꼼꼼히 안팎의 여행 준비를 했다.


사실 맏이는 이제 갓 새직장에 입사를 했던 처지여서 경비와 상황 (집에 남아 있을 엄마의 보행 걱정)등이 여의치 않아 해외여행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간신히 설득해 용기를 낸 형편이라 나는 여행을 유보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집안 어른들과 사려 깊은 아우의 조언으로 그렇게 맏이는 첫 여행준비를 하게 되었다.


-


맏이는 속 정이 깊고, 이타적이며, 감수성이 풍부하다.

그가 서너 살 때, 우리는 목회 일로 귀가가 늦는 일이 빈번했기에 아이들 둘이서 부모를 기다려야 했다. 요즘 분위기론 용납되지 못 할 처사였다.저녁 늦게까지  둘이 놀며 기다리다 아우가 먼저 잠들면 침대에서 행여 떨어질세라 베개 등으로 아우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졸린 눈을 비비며 부모를 기다렸다. 우리가 들어서는 기척이 나면 반가움에 콩콩 내달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안기곤 했다.

기특하고, 고맙고, 미안한 일이 많았던 맏이다.


학생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1년 7개월, 제대로 두 살 터울도 아닌데 아우는 물론 아우의 친구들에게까지 항상 제법 터울 진 형처럼 잘 다독이며 지켜봐 주는 맏이다. 아우는 타 지역의 명문학교 기숙사에서 학교생활을 했다. 어디에 있든지 한창 먹어야 할 시기, 고교시절이었다. 맏이는 자신은 괜찮다며 아우가 더 필요할 테니까 아우의 용돈을 더 보내주라고 했다. 기특하고 고마왔다. 그렇게 지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된 어느 날 형제끼리 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맏이네 기숙사에서도 학교 앞 대형마트서 당번을 정해놓고 야식, 간식거리를 사날라서 먹곤 했었다고. 배도 고프고 사 먹고 싶었지만 참았단다.

너무 미안해서 가슴을 쳤다. 쓰리고 아팠다.


아버지의 병환, 갑작스러운 조기은퇴, 준비되지 않은 퇴임 등의 상황 앞에서 묵묵히 학업을 중단(대학 3년)하고 취업을 해 가장의 짐을 진 맏이. 퇴근하면, 아니 근무 중에라도 신체적, 정서적, 물질적 부양에 전념하는 진심을 보고 아는 이들은 모두 ‘요즘 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굳이 누구의 말을 빌지 않아도 이 아이를 낳고 함께 살아온 엄마인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그러나 이런 정성이 무색하게 (아니다, 그분의 뜻대로) 더 좋은 본향으로 남편이 가셨다. 남겨진 가족은 모두 제 탓이라고 가슴을 쳤다. 가까이했던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


맏이의 어린 가슴에 젊디 젊은 아버지는 얼마나 사무칠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막내는 일찍부터 객지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친구 관계가 유난히 좋아서 주변에는 늘 친구가 많았다. 막내 덕분에 초, 중, 고 뿐 아니라 대학까지 교회 교육부서는 늘 부흥했다.


막내는 집념이 강했고 . 탈랜트가 많았다. 그러나 노력하는 성실함이 오늘의 그로 세워 주었다. 국제 디자인 어워드 ‘레드닷'에 수상작을 낼 때에도, 기본 몇 백 장의 스케치를 했다고 그의 형과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미술 실기로 대학 진학을 한 것이 아니므로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아버지를 존경했고, 그의 교훈을 소중히 여겼다. 조석으로 전화를 했고, 아침 축복기도를 놓치지 않았다. 지방의 작은 교회의 목사인 아버지가 병환으로 쓰러지자 명문대 마지막 학기를 휴학하고 간호를 위해 달려왔다. 회생이 어렵던 아버지를 간호하면서도 더위를 무릅쓰고 밤 작업을 해서 아버지가 입원한 대학병원 서비스를 연구하여 <뇌출혈 환자 보호자의 간병과정에 대한 연구>라는 졸업논문을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멘탈이 포기될 지경에서도 투지로 이긴 노력이 가상히 여겨져 좋은 점수를 받아, 무난히 대기업에 연구원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막내는 장례를 마치고 맏이에게 말했다. “형이 있어서, 형이 부모님과 함께해서 내가 맘 놓고 공부할 수 있었고, 이제 취업도 하게 되었어. 그간 형이 너무 고생했어. 이제 나도 도울테니 형은 좀 쉬면서 시간을 갖고,하고 싶은 공부를 더 했으면 좋겠어.”


 이들의 마음 쓰는 것을 보고 남편이 떠나셨다고  넋 놓고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기쁨과 감사의 눈물로 가슴이 따뜻해졌다.


막내는 이십댄데 해외여행을 자주했었다. 3국 정부주도의 학생 워크샵을 중국에서 했고, 군 복무 시에는 포상으로 유럽 4개국을 여행했고,  군 전역하고 바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40일 도보로 여행했다.그리고 회사 입사 후에는 일본 출장 등.

이번 여행 두 주 전에도 일본 출장을 다녀왔었는데, 이런 경험을 토대로 형의 처음 해외여행을 혼자서 오롯이 준비한 것이다. 형 여권준비를 돕고, 형의 자존심을 지켜가며 사려 깊은 배려로 여행을 결심하게 하는 일, 비행기 티켓팅, 환전, 숙박 예약, 여정 ,이동수단 등등.


형은 세종에서 기차로, 아우는 서울에서 지하철로 인천공항에서 만나 비행기로 출발. 오사카에 도착. 교토를 거쳐 도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이라 했다. 출발하자마자 시시각각,연신 카톡으로 영상통화, 문자, 사진을 보내온다. 마치 나도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맏이와 막내. 착하고 귀한 두 아들의 아름다운 눈이 보고 서 있는 그 위에서 나는 마냥 행복지경에 빠져든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죄송하지만 이 행복이 오래오래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의 좋은 MZ형제를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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