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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Apr 20. 2023

백사실 계곡을 따라 걸으며 만난 삶과 예술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천천히 걷기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며 세검정초등학교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버스에서 내린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탕춘대터’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뜬금없이 나타났다. 길가에 무심한 듯이 서 있어 걷다 보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탕춘대는 연산군이 경치 좋은 곳에 만든 돈대로, 흐르는 물을 보며 연회를 즐기던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의 역사적 유물이 이렇게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삶 속에 남아 있다니.’ 새삼 놀라웠다.

조금 더 걸어가니 서울특별시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세검정’이 눈앞에 나타났다.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인조반정 때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씻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 ‘세검정’이다. 정자 밑의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니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서 덩그러니 남아 있는 정자가 옛 조상들의 처절한 삶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길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오르막 계단이 나왔다. ‘무릉도원’이라는 부제가 붙은 ‘백사실 계곡’ 안내판이 돌담과 함께 정겨웠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니 무릉도원이 아닌 삶의 현장이 눈에 띄었다. 집들이 빽빽이 들어찬 좁은 오르막길 산 밑으로 마을 주민들이 일군 계단식 텃밭이 있었다.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애써 가꾸며 먹을 것을 손수 키우는 마을 주민들의 삶이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텃밭 한쪽에 놓인 붉은색 플라스틱 물통마저 친근하게 느껴졌다. 또 산 밑에 의문의 돌집이 있었는데, 옛날에 닭장으로 쓰던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닭은 없고 이런저런 물건들이 널려 있으며 가꾸지 않은 풀만 무성한 가운데 흰 나비 두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무릉도원이 곧 현실의 행복인지도 모르겠다.

그 마을이 끝나는 곳에 현통사가 있었다. 현통사 앞 너럭바위는 압도할 정도로 넓었다. 그러나 물줄기는 너무나 미약해서 폭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만약에 물이 더 많이 흐른다면 훨씬 웅장한 모습일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

현통사를 지나면서부터 숲길이 시작되었다. 사이사이 가을 햇빛을 내려주는 그늘이 계속되니 몸과 마음이 상쾌해졌다. 그 숲길 중간에 별서터가 있었다. 별서터는 백사 이항복의 별장지였다고 알았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추사 김정희의 소유였음을 입증하는 문헌자료를 확인했다고 한다. 숲 사이의 넓은 평지에 주춧돌과 작은 연못의 흔적만 남아 있다. 한쪽에 옛 돌담과 붉은 벽돌의 굴뚝 기둥이 눈에 띄어 실제 삶의 현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물이 흐르는 이곳에서의 삶은 여유와 휴식이었음이 분명하다.

백석동천(白石洞天)’ 이 새겨진 바위를 지나 언덕에 오르니 북악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며 시야가 탁 트였다. 시원했다. 창의문까지 가는 긴 부암동길을 따라 내려오다 발견한 담쟁이와 가을꽃들이 가을 정취를 더 느끼게 해주었다. 꽃이 아름다운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돌담 사이사이로 자유롭게 뻗어나가고 있는 담쟁이도 꽃 못지않게 살아있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차를 마시며 산을 바라볼 수 있는 예쁜 카페와 개성이 있는 집들을 구경하며 한참을 걸으니 창의문에 다다랐다. 인조반정 때 이 문으로 의군이 들어와 반정을 성공시켰다고 하니 세검정과 함께 역사적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창의문을 지나 길 건너편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었다. 쓸모없이 버려지게 된 옛 청운수도가압장을 문학관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하얀 콘크리트 외벽과 거친 콘크리트 벽면, 가압장 물탱크를 그대로 활용한 듯한 영상실 등이 감옥에서 고뇌의 삶을 마친 윤동주의 삶을 잘 표현한 듯하였다. 특히 제1전시실과 제3전시실로 연결되는 제2전시실은 열린 우물로 불리는 공간인데, 파란 하늘의 구름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떠올리게 하였다. 윤동주는 낯선 타향의 감옥 안에서 구름이 떠 있는 고향의 푸른 하늘을 떠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검정에서 백사실 계곡을 거쳐 윤동주 문학관까지 천천히 걸어 돌아보면서 우리네 삶의 흔적이 곧 예술이 되고, 삶과 동떨어진 예술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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