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3.29
나는 걷기를 즐긴다.
걷기에 대해 관심이 생긴 건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을 읽고서부터이다. 그 책을 읽던 20여년 전의 상황은 가정과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주체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피곤한 가운데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분노와 억울함이 마음을 잠식해가는 상황이었다. 그때 <화>라는 제목에 끌려 읽게 되었다. 천천히 한 걸음 걸은 후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또 한 걸음 걸으면서 크게 숨을 쉬다보면 마음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걷기를 통한 명상, 그 내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틱낫한 스님이 있다는 파리의 ‘플럼빌리지’에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오래도록 먹고 자는 일에 지쳐 ‘플럼빌리지’는 커녕 자연 속에서 걸어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일상에서 벗어나 내 마음을 들여다 볼 물리적인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러다가 15년 전 이유없이 몸무게가 7kg이 빠지는 일이 생겼다. 놀라서 찾아간 병원의 의사가 갑상선 항진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휴식과 운동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암이 아닌 게 어디야?’ 마음을 쓸어내린 후 시간을 내어 집 근처의 산과 숲길을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이미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고, 특히 무릎이 아파서 무리하게 걸을 수는 없었지만, 내 몸과 마음을 돌보는 데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30분 이상을 걷기도 힘들었다. 조금씩 집의 뒷산을 다니면서 천천히 몸이 회복되었다. 그때 걷기가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좋은 행위인 것을 실감했다.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시작한 건 퇴직한 3년 전부터이다. 여전히 무릎은 아프지만, 요즘은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하루 4~5시간의 트레킹에 참여하고 있다.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을 내 발로 걸으면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걷기를 좋아해서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에게 작년 한 해 동안 힘든 일이 계속 생겼다. 옆에서 위로하기도 힘든 안타까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같이 움직이기 어려웠다. 나도 친구도 어떻게 마음을 정리할 지 모르던 시간이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언제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이미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이 될 지 모르는 나이가 되고 말았구나!‘라는 평범한 진리가 뇌리를 스쳤다. 물론 젊을 때도 예측불가능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나이가 든 상황에서의 예측불가능한 일은 젊을 때에 비해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타격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친구보다 쉽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빠지기보다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마음을 확실히 갖게 되었다. 혼자서라도 계속 트레킹을 다녔고, 그런 나를 친구는 부러워만 했었다.
조금씩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있던 친구가 오랜만에 우이령길 걷기를 제안했다. 비교적 걷기 쉬운 길을 맨발로 걸으며 진달래를 보고 싶다고.
미리 예약을 하고 북한산 우이역 2번 출구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같이 가는 길이어서 약속 시간보다 늦게 오는 친구를 기다리는 일이 힘들지 않았다. 햇살이 적당하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날씨에 길가에 앉아서 함께 할 친구를 기다리는 일은 생각보다 편안하고 즐거웠다. 시간보다 많이 늦게 나타난 친구는 굉장히 미안해 했지만, 별일 아니라는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은 뒤 출발했다.
도로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서 친구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을 준비를 했다. 친구는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맨발 걷기를 하는 중이다. 발바닥이 아플 것 같은 길을 천천히 걷는 친구에게 보조를 맞춰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걸으니 산길이 시작되었다. 나무들은 아직 겨울의 색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줄기 끝에 아주 조그맣게 올라오기 시작하는 새싹들이 연한 연두색을 띠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더워진 날씨에 비해 나무들의 싹은 이제 봄을 시작하고 있나보다. 겨울 나무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분홍색 진달래는 햇빛을 받아 천연의 분홍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 산수유도 있었고, 산개나리도 있었지만 풍성하지 않아서 진달래의 찬란함을 따라갈 수 없어 보였다. 나무의 잎이 초록을 띄기도 전에 꽃의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산속의 진달래꽃에 취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그날 햇빛이 내리쬐는 진달래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중간 쯤 걸으니 테이블이 있는 휴식 공간이 나타났다. 준비해 간식을 먹으면서 쉬고 있으니 길고양이가 나타나 옆에 앉는다. 그 길고양이는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천연덕스럽게 앉아서 ‘여기는 내 집이야.’하고 말하는 듯하였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사소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친구와 함께 걷는 즐거움이 아닐까 한다. 한참을 쉰 후에 이어 걸으면서 본 북한산의 오봉은 웅장했다.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 앉은 바위 덩어리가 마치 떨어질 듯 위태로운 모습 속에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자연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다고나 할까?
6.5km의 짧은 거리지만 햇살 따뜻한 오후에 찬란한 진달래와 웅장한 바위를 벗삼아 걸으면서 친구와 담소를 나누었던 기억은 오래도록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