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말로 살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처음을 기억하십니까. 첫 울음. 첫 배변. 첫 옹알이. 첫 뒤집음. 첫 일어섬. 첫 걸음마. 첫 부모의 손. 첫 달리기. 첫 무릎 보호대. 첫 넘어짐. 첫 상처. 첫 출혈. 첫 통증. 첫 치유. 첫 헬멧. 첫 씽씽카. 첫 자전거. 첫 버스 탑승. 첫 지하철 탑승. 첫 자동차 핸들. 첫 모유. 첫 미음. 첫 당근 퓌레. 첫 뭇국. 첫 미역국. 첫 소고기. 첫 케이크. 첫 촛불. 첫 과자. 첫 초콜릿. 첫 등원. 첫 인형. 첫 장난감. 첫 친구. 첫 손 편지. 첫 고백. 첫사랑. 첫 이성친구의 손. 첫 뽀뽀. 첫 키스. 첫 말싸움. 첫 화해. 첫 거절. 첫 좌절. 첫 프러포즈. 첫 신랑 입장. 첫 출산. 첫 출근. 첫 월급. 첫 휴가. 첫 여행. 첫 차. 첫 집. 첫 혼주석. 첫 부모와의 이별. 첫 임종의 울음. 그리고, 첫 방송. 아이의 처음이었다가, 저의 처음이었다가, 제 아버지의 처음이었던 순간을 모았습니다. 여러분의 순간이기도 하겠죠. 하루에도 몇 번씩 경험하는 것인데, 어쩐지 ‘처음’이라는 단어가 붙으니까 괜히 설레집니다. 모든 단어의 배열 마지막에 둔 ‘첫 방송’. 저에게 이 순간은 마냥 설레지만은 않았습니다. 괴로웠고, 버텼고, 두려웠고, 긴장했다가, 당황한 채로 허망해졌습니다.
첫 직장에 배치된 부서는 ‘라디오국 아나운서부’였습니다. 신입사원에게 주어지는 최초의 방송 진행 업무는 [10시 라디오 뉴스]였습니다. 편성표에 5분으로 배정이 되어 있는 것이지, 광고를 제외하면 4분 20초의 뉴스였습니다. 훈련의 시간은 석 달 정도. 오전 9시에 출근을 해서 가장 많이 한 업무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사무실 문 앞에 배치받은 신입의 자리에 앉습니다.
2. 사무실 구석에 앉은 선배에게 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뉴스를 읽습니다.
3. 선배들에게 출근 인사를 합니다. (선배가 지각한다면 부끄러움은 그의 몫입니다.)
4. 실시간으로 선배들이 주는 피드백을 메모하고, 수정합니다. (발음, 끊어 읽기, 어미)
5. 뉴스 교육을 받기 전까지 리딩을 멈추지 않습니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민망하지 않냐며 점심을 사주는 선배도, 지나가듯 툭툭 말을 던지는 선배도, 차 한 잔과 함께 웃음을 섞어 말을 건네는 선배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사고만 안 내면 돼.
그때부터였을까요. 제 목표는 무사고 방송 진행이 되었습니다. 세 건에서 네 건의 뉴스를 읽고 날씨까지 전달하는 시간이 4분 20초를 넘어가지 않도록 연습했습니다. ‘한국관광공사’나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 특별위원회’와 같은 어려운 발음을 틀리면 다시 읽었습니다. 혹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해하며 하루에 2L의 물을 연신 들이켰습니다. 그때의 저는 왜 목표를 무사고로만 잡았을까요. 실수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만 가졌을까요. 어조가 물결치고, 발음이 어그러지면, 이건 잘못된 거라고 자신을 다그치기만 했을까요. 그럼에도, 나아지고 있으며 잘하고 있다고 자신을 응원하지 않았을까요. ‘잘할 거야!’라는 독려는 없이 ‘잘해야만 해!’라는 지시만 했을까요. 원고를 볼 때 내려간 시선과 웅크려진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로 첫 라디오 뉴스를 진행할 부스의 ‘ON-AIR’ 불이 들어왔습니다.
4분 20초의 뉴스는 아래와 같이 마무리됩니다.
1. (지금까지 아나운서) 김지현이었습니다.
2. 10시 뉴스를 마칩니다.
3. (방송사명) ○○방송입니다.
만약에, 분량이 넘칠 것 같다면 1번에 해당하는 이름부터 삭제합니다. 그래도 과하다면 프로그램 마무리 문장을 덜어내야 합니다. 꼭 송출되어야 하는 게 방송국의 이름인 거죠. ‘Half call sign’이라고 부르는 멘트를 처리하지 못하면 사고였습니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기겠어.’라며 지나가듯 일러준 선배의 말을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요. 오래된 말처럼 ‘설마’는 사람을 잡았고, 그 주인공은 떨고 있는 신입 아나운서인 김지현이었습니다. 날씨 원고를 바라보는 저는 ‘오늘의 최고기온’에서 멈추었어야 했습니다. ‘서울과 대전의 지역별 기온’까지만 말해야 했습니다. ‘바다의 물결이 먼바다에서 1.5m로 인다.’는 것까지 읽고 나서야 시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10시 04분 18초임을 확인한 저는 과연 방송국의 이름을 외쳤을까요. 아마도 그날 차량으로 이동하며 라디오를 듣는 분이 계셨을 겁니다. 이 문장을 들은 사람이 많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급하게 지하철을 타다가 열차에 가방이 끼인 채로 출발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가방은 다음 정거장에 가면 뺄 수라도 있지, 마이크를 타지 못한 ‘…ㄹ 마칩니다.’는 갈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냐는 선배들의 질문과 측은하게 바라보는 동기들의 눈빛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저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숫자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10시 04분 21초. 10시 04분 22초. 10시 04분 2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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