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친구의 첫 만남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 자락 아래 '검듸'가 고향인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인근에 있는 전주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떠나 본 적 없던 정읍을 이제는 놓아주어야 했다. 전주가 그리 먼 곳은 아니었으나 정읍을 벗어나는 것이 나에겐 어렵고 두려운 일이었다. 내가 떠난 정읍에서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터울 있는 언니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오빠는 한 학기 만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재수를 준비하던 때였으므로 나는 대학생활이 어떠한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다 우리 학번부터 학부제라는 것을 시작한다고 했다. 학부제는 1학년 동안 세 개 정도의 학과를 모아 놓고 학생들에게 여러 학과를 경험해 보고 2학년에 가서 학과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 덕분에 학과별로 모이는 것도, 직속 선배도, 동기도 없이 1년 동안 소속감 없는 채로 지내야 했다. 언뜻 보면 좋은 제도 같지만 안 그래도 낯선 데다 소속이 없으니 뭔가 붕 떠 있는 느낌은 나에게 무척 힘든 일이었다. 다른 동기들은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여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벌써 삼삼오오 어울려 다녔으나 나는 가지 않았으므로 그 마저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숫기도 없고 먼저 다가가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분명 지망하는 학과가 있음에도 선배들에게도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았다.
유일하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다니던 교회에서 만난 오빠였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도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기에 이것저것 대학 생활에 관련한 것들을 물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오빠는 정읍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는 언니와 사귀는 중이었고, 언니와 언니의 네 명이나 되는 자매님들의 나를 향한 경계에 나는 그마저도 시도하지 못했다. 장거리 연애 중이라서 불안한 터에 내가 가까이 있으니 뭔가 좀 거슬렸었나 보다. 여자다운 면이 전혀 없는 나를 여자로 봐준 것이 고맙기는 하나 그렇다 해도
'아니! 복학생에다 나이도 많고 겁나 지 잘난 척하는 놈이드마는 내가 꼬리를 쳤어 어쨌어? 뭘 어쨌다고 나를 그렇게 쏘아보고 말이여!!!‘
라고 속으로 욕은 했다만 소심한 나는 그 오빠와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나마 한 가지 정보를 얻기는 했는데 바로
'교양 과목 책을 다 사야 하는 것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교회 오빠는
"교양 과목 책을 뭐 하러 사냐? 살 필요 없어. 그냥 시험 보면 돼~"
이 따위 말을 해주었고 곧이곧대로 들었던 나는 결국 죄다 C학점을 받았더랬다.
꼭 이런 애들 있지 않나. 남들 이런 식으로 안심시켜 놓고 혼자 책 사서 열심히 하는 애들. 아니면 본인은 잘나셔서 책 없어도 A+을 맞았을 수도 있는 약간 밥맛없는 스타일.
그렇게 나는 혼자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기숙사를 비워두고 수업만 끝났다 하면 자꾸만 정읍집으로 내려가곤 했다. 낯선 이곳에서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집으로 내려가 내 가족을, 나의 정읍을 지키고 싶었다.
버스는 전주를 지나 김제를 거쳐 정읍으로 향했다. 차창밖에 보이는 풍경을 보다 보면 그렇게 경치가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멀리 보이던 미루나무에 걸린 조각구름들이나 논에 불을 지펴 뿌한 연기 속에 어스름하게 서 있던 농부의 신기루 같은 장면 등 버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매료되어 혼자 몰래 눈물짓기도 했다. 버스는 일반 승용차와는 다른 맛이 있었다. 좀 더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각도와 넓고 깨끗한 창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빠의 봉고차에서 볼 때보다 더 풍부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버스가 정읍에 도착하면 늘 아빠가 봉고차를 몰고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터미널 앞에서 떡이나 간식을 사서 운전하는 아빠 입 속에 넣어주고 맛있게 먹는 아빠를 보며 집으로 가던 길은 늘 행복했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던 아빠가 있어서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다 아빠는 내게 이제는 주말에만 집에 오라고 하셨다. 내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기숙사비 아깝게 왜 자꾸 내려와?'
'그럼 나 그냥 여기서 다닐까? 통학차도 다녀~'
'안돼! 귀찮어! 기숙사에서 살어!'
매몰차 보였어도 아빠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기숙사에 또 혼자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대에서 있었던 교양 수업을 들은 후 여자 화장실을 찾고 있었는데 공대라 그런지 여자 화장실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하던 중 한 여학생이 기숙사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가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 나는 갑자기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혹시 기숙사 생이세요?'하고 말을 걸었고 키가 크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걸음걸이가 당찬 그녀는 좀 어이없다는 듯 '네' 하고 대답했다.
‘엇! 나도 기숙사 살아요. 몇학년이세요?... '
그렇게 해서 만난 우리는 함께 기숙사 점심을 먹기로 약속하였고 나는 신이 나서 만나기로 한 기숙사 현관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거기서 또 한 명의 여학생을 소개받았다. 그 둘도 어제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후 우리 셋은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말하기를 미영이는 좀 어딘가 정신이 이상한 애가 자기를 쫓아온 줄로 생각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