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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김 Jun 26. 2024

아빠! 어디가!

우리가 사랑했던 봉고와 함께한 여행

나 어릴 적엔 여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을까? 그런 게 있기나 했으려나.

 어딘가 멀리 간다는 것은 친척집을 방문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아빠는 방학이 되면 우리들을 데리고 서울에 사는 작은 아빠나 큰 아빠 집에 우리를 데려다주셨다. 그런데 그걸로 끝! 아빠는 어딘가로 일하러 가버리고 없고 우리만 거기 남아 작은엄마나 큰엄마의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며칠을 지내다 오는 것이다. 그땐 다들 살기 어려울 때라 우리가 왔다고 해서 특별히 어디를 데려가는 것도 없었고 그냥 사촌들과 놀다 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서울이라는 곳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보고 싶은 사촌들을 볼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렜던 기억이 있다.     

작은 엄마집에 얹혀있던 어느 날은 밥을 먹고 칫솔을 사가지고 오라고 작은엄마께서 심부름을 시키셨다. 아무래도 내가 칫솔 그런 것도 없이 빈손으로 왔었나 보다. 그런데 사촌과 함께 칫솔을 사가지고 오는 길에 놀이터에서 놀다가 그만 칫솔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아. 그때 그 눈치란 참. 난 또 왜 눈치 없이 칫솔을 잃어버렸을까.     

또 한 번은 아빠가 오빠와 나를 또 작은엄마네 집에 데려다 놓았다가 집에 내려올 때는 우리 둘이 알아서 내려가라는 특명을 받았다. 아빠는 그 당시 아파트를 짓는 일을 하셨다. 십장인지 반장님인지 하는 직책으로 그래도 꽤나 높은 자리라고 하셨다.      

 터미널에서 아빠가 우리들의 표를 끊어주고는 버스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드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던 기억이 난다. 그땐 우리를 그렇게 작은집 큰집으로 보내는 아빠가 원망스럽다기보다는 고생하는 아빠가 안쓰러워서 눈물이 났다. 나는 아빠가 늘 짠했다.     

어쨌든 오빠는 나를 데리고 버스를 탔고 휴게소에서는 햄버거도 사주었다. 그때 오빠 나이가 5학년이나 되었을까. 나는 그때처럼 오빠가 든든한 적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그전에도 그 뒤로도 없었다.

휴게소에 들러 본 것이 나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휴게소의 규모에 놀랐고 맛있는 음식들이 많은 것에 또 놀랐지만 버스를 잘 맞게 탈 수 있을지가 큰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긴장한 탓인지 나는 그 여행에서 두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하나는 오빠 따라 남자화장실로 들어간 일이었다. 그런 신식 화장실은 처음이었을까? 문을 잠그는 방법도 몰라 그냥 들어갔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남자 어른이 앞에 떡하니 서있었다. 그때의 창피함이란.     

또 하나는 그러고 나서 당황한 나는 다시 차에 타면서 햄버거가 의자에 있는지 모르고 햄버거를 깔고 앉아버린 것이다. 그 덕분에 내 바지는 똥 싼 바지처럼 되어버렸다. 정읍까지 내려와 시내버스를 타고 버스에서 내려 다시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우리 집까지 난 그 꼴로 가야 했다.

나의 휴게소에 대한 첫 기억은 이러하다.

아무튼 간에 우리에게 여행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아빠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 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아빠가 사업을 해본답시고 빚을 많이 졌다가 실패한 뒤로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우린 그 시절 새벽 5시부터 울리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주로 그 담당은 막내인 나였다.

"아빠 계시냐?"

" 안 계세요~"

" 어디 가셨냐?"

" 몰라요~"     

라는 멘트들을 기계적으로 반복해야 했던 나였다.

그래도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빚독촉을 하는 분들도 양반이었지 않나싶다. 너무 어린아이가 받아서 그랬을지는 몰라도 욕하거나 소리 지르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아빠는 빌린 적 없다 내가 오히려 피해자라며 우리에게 변명했지만 결국 아빠는 감옥이라는 곳을 가게 되었다. 갚을 이유가 없다고 버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아빠가 감옥에 가기 전 어느 여름방학이었다. 새벽에 갑자기 집에 온 아빠는 우리들을 몰래 데리고 나갔고 그렇게 우리의 첫 여행이자 마지막 여행이 시작되었다.     

우리 집에는 베이지색의 '봉고'가 있었다. 승합차종류들이 다 그렇겠지만 의자를 접으면 짐을 실을 수도 있고 또 의자를 눕히면 침대처럼 누울 수도 있었다. 아빠가 일할 때 필요한 차였고 친척들이 놀러 올 때면 다 같이 태우고 물놀이도 갈 수도 있었던 고마운 차였다. 저녁 즈음 '달달달달~~' 하고 봉고차 소리가 들리면 아빠차라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우리들은 '아빠~'하면서 달려나가 아빠를 와락 껴안으며 반겼다. 그 시절 우리 삼남매는 아빠를 참 많이 좋아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빠와 다툼이 많았던 오빠조차도 어릴 때엔 아빠를 많이 따랐다. 아빠가 피곤한 몸을 방바닥에 뉘이면 언니와 오빠는 양 옆으로 아빠를 차지하고는 나오지를 않는다. 그럼 막내인 나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아빠 배 위에 올라 껴안아 주곤 했다. 봉긋 올라온 아빠 배가 들락날락 할때마다 내몸도 같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때의 그 편안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아빠의 분신같던 봉고를 타고 우리는 여행을 시작했다. 다는 기억할 수 없겠으나 전국을 다 돌아다녔던 듯하다. 코펠 하나 들고선 밥도 해 먹고 라면도 끓여 먹으면서, 잠은 당연히 봉고차 안에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그 중 서울랜드와 강릉 경포대 바닷가가 기억난다. 서울랜드에서는 놀이기구 3종이용권을 구입해서 3가지를 탔는데 그 중 후룸라이드가 기억에 남는다. 경포대에서는 모래에 발을 담그며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 서울랜드의 상징 지구별 앞에서 시커멓게 타서는 촌스럽지만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우리 삼 남매의 사진도 남아 있다.     

사진에는 없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아침에 눈떠보니 지리산 계곡 옆에 있었던 기억이다. 콸콸콸 세차게 내려오는 냇물에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어느 호텔에서도 그렇게 계곡 바로 옆에서 아침을 맞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변 국밥집에서 아침을 먹은 기억도 있다. 우리는 여러 명소들을 가보았는데 절대 입장료를 내진 않았다. 사찰을 방문할 때면 아빠는 언제나 매표소 바로 코앞에서 차를 돌린다. 왔다 가는 게 중요한 것이지 꼭 저 안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서울랜드는 들어갔으니 그게 어딘가.

어느 날은 공주 인근을 지날 때였나 보다. 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는 코펠에 물을 담아 라면을 끓여 먹고 다시 차를 타고 출발하려는데 길가에 개구리참외라는 것을 팔았다. 처음 먹어보는 비싸고 색다른 과일을 선뜻 사주는 아빠를 놀라 바라보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아빠는 또 새벽녘에 우리를 집 앞에 내려주고 다시 떠났다. 그 이후로 아빠는 감옥에 가셨고 1,2년이 지나 나오셨다. 그사이 엄마 혼자 저 봉고차를 몰고 여기저기 다니며 살림을 꾸리느라 또 얼마나 애썼을지 그때는 생각을 못했다.

 아빠가 집에 오시고 우린 세차장을 시작하면서 바빠졌고 그러다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여행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거칠고 세련되지 못했던, 날 것 그 자체였던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언니는 말했다. 그때의 여행이 너무 좋아서 아이들과 여행을 많이 하고 싶다고. 그런 추억을 꼭 만들어 주고 싶다고 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호화로운 여행보다 행복한 여행이지 않았나 싶다.       

 우리들의 유년이 눈칫밥에 빚독촉에 가난에 시달렸다 할지라도 이런 여행을 계획할 만큼 낭만적이면서도 거친 아빠의 사랑과 모험적인 삶이 있어서 우리는 지금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인생은 참 파란만장했다고도, 복도 지지리 없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영향으로 한 때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악착같은 마음들이 있어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는 그런 욕심들이 어느 순간 다 사라져 버렸다. 덧없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겠지. 그 덕에 나는 결국 이렇게 근근이 먹고사는 모험하지 않는 월급쟁이가 되었다.     

아빠는 나에게 공무원이 되라고 하셨다. 자신처럼 사업 같은 건 절대 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따분해 보이던 공무원이 되는 게 싫었던 나는 다른 길을 모색했지만 결국은 돌고 돌아 공무원이 되었다. 아빠가 원하는 삶이니 기뻐하실까.

 그래도 가끔 나는 생각한다. 내 안에 아빠의 DNA가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사업을 하면 잘할 것인데 안타깝다고. 하지만 꼼꼼한 남편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는 덕에 감히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아빠의 역마살 DNA를 살짝 비틀어서 언니와 나는 자주 여행을 꾸린다. 이제는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스케줄을 꼬기가 힘들어지면서 우리의 여행에 대한 열정이 다소 사라졌다만 언젠가는 아빠가 우리에게 해준 여행코스대로 그렇게 진짜 날것의 여행을 한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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