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나다운 게 뭔데?
친구:너 오늘따라 왜 그렇게 예민해? 너답지 않게
주인공: 나다운 거? 도대체 나다운 게 뭔데? 모르겠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흑흑
예전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던 드라마 대사다.
자아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사실 대부분은 자기의 감정을 깨닫지 못한 채 썸 타던 남자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모습을 보고 나서 느끼는, 섭섭한 감정에 사로잡혀 예민해진 여주인공이 하던 말이었다.
나도 요즘 이 대사를 생각하고 있다.
아쉽게도 썸 타는 남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나는 자아를 찾는 중인가 보다. 이제 와서...
발단은 줌바댄스였다.
얼마 전부터 한약을 먹은 뒤로 살이 찌기 시작했다. 44년을 사는 동안 항상 과민성대장증후군에 시달리던 나에게 용하다는 한의원에서 지어먹은 한약이 어쩐지 약발이 잘 받는 거 같더니 배 아픈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화가 잘 되고 내보내지는 것들이 줄어들자 영양분은 차곡차곡 내 몸에 쌓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까지 내 몸은 하체비만이긴 하지만 큰 몸무게 변화 없이 평생을 유지해 왔고 상체만 본 사람들은 날씬하다고 말하기도 하던 정도였다.
그 후 갑자기 몸무게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지던 중 얼마 전 여행지에서 요즘 유행하는 인스타 감성의 사진을 찍어 보고 싶어 경치 좋은 곳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있는 뒷모습을 아들에게 찍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웬걸. 아주 등짝이 두툼하고 둥글둥글한 게 참.. 좋게 말해 귀엽다. '안녕자두야'라는 만화 속 자두네 엄마 같다.
인스타 감성은 당연히 아닐뿐더러 내가 언제 이렇게 살이 쪘나 싶은 생각에 꽤나 내적 충격을 받았다.
거기다 상체에 붙은 살들 때문에 무릎도 아파지고 몸이 더 처지는 것이 더 이상 안 되겠어서 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평생 운동이라는 것을 진득하게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다못해 걷는 것도 하지 않는다. 저질체력에 직장과 육아, 집안일만으로도 나의 에너지는 모두 소진되어 집에 오면 저녁밥 짓기 전까지 잠을 보충해야만이 겨우 밥을 지을 수 있는 체력이 채워진다. 더군다나 커피나 비타민 등등 힘이 나게 하는 영양제 따위들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물론 반짝하는 효과는 있지만 소화력이 약하다 보니 그런 것들이 더 몸을 보대끼게 해 먹을 수가 없다.
운동을 시도해 본 적은 여러 번 있다. 어릴 땐 택견을 배워보고 싶었다. 우리 것에 관심이 한참 많았던 시절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택견동아리에 혼자 너무도 당당하게 들어갔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인 내가 남자들이 대부분인 그곳에서 버티긴 좀 힘들어 나왔던 적이 있다. 그래도 '이크 에크' 하면서 돌아다니면 아빠와 언니가 배꼽 잡고 웃던 기억 덕택에 택견복을 산 돈이 아깝지는 않다.
공무원 시험공부를 할 때는 '공부에는 체력이 필수지' 하며 새벽 수영에 도전했다가 공부는 안 하고 12시까지 잠만 자서 일주일 만에 접은 적도 있다.
그 외에 탁구, 필라테스도 해보았지만 3개월을 넘긴 적이 없었다. 몸은 몸대로 아프고 실력도 늘지 않으니 재미가 붙지 않았다. 그런 내가 비교적 어려울 게 없는 걷기라도 꾸준히 할 위인은 더더욱이나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시작은 거창하나 늘 끝은 흐지부지 돈만 날리며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는 진짜 운동을 안 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위기감에 안 할 수는 없다는 절실함은 있었으나 무엇을 해야 내가 꾸준히 할 수 있을지가 매우 고민되었다. 반복되어 온 포기에 시작도 하기 전에 나를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나는 줌바댄스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동기 언니가 3년을 꾸준히 다니고 있다는 말에 비록 나 자신은 믿을 수 없어도 그 언니를 따라다니면 포기하지 않도록 나를 잡아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였다. 물론 내 옆에는 나와 비슷한 체력과 끈기 없음을 가진 또 다른 언니가 함께했다.
우리 둘은 줌바댄스를 가는 첫날부터 야심 차게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학원까지 걸어갔다. 이왕 운동 시작한 거 걷기까지 추가해 보자는 마음이었는데 결국 걷기는 하루 만에 접혔다. 가자마자 지쳐서 도저히 댄스 할 힘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다 우리의 줌바댄스 도전기가 더 빨리 종료되기 전에 걷는 건 포기하고 줌바댄스에 집중하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운동도 운동이지만 내가 댄스를 춘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교회 다닐 때 율동정도는 해봤지만 팔만 까딱댔지 발이나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뻣뻣한 통나무다. 몸만큼이나 내 성격도 마찬가지로 뻣뻣하다. 내성적이며 어디 나서기를 극구 꺼리는 내가 어디 가서 몸을 흔들며 춤을 춰봤겠는가.
이런 극 I 성향인 내가 줌바댄스를 한다 하니 주변사람들은 정말 많이 놀라워했다.
"네가? 춤을 춘다고? 푸하하하하 “
맞다. 내가 줌바라니. 나는 그동안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운동신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낯가림도 심한 나는 친구들을 만나도 앉아서 수다 떠는 정도지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라? 그런데 의외로 댄스 이게 생각보다 해볼 만하다. 필라테스나 탁구, 수영 같은 것들은 하고 나면 그렇게 몸이 아팠는데 줌바댄스는 그렇지는 않다. 거기에 춤은 진짜 개떡같이 추는데 이게 왠지 흥겨워서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곳에 오는 사람들은 내가 감히 소화할 수 없는 화려하고 짧은 옷을 입고 온다. 뒤에서 보면 진짜 아이돌 가수처럼 보일 정도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이거나 더 나이 많은 분들이 그런 옷을 입고 와서 춤을 추는데 어찌나 열정적으로 추는지 처음엔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나와는 너무 다른 세계의 사람들 같았다. 그런데 보다 보니 그렇게 입었을 때 춤선이 더 예뻐 보이고 보기에도 더 좋았다.
그렇게 3개월이 어느덧 지나갔다.
춤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지만 아직도 내 흥은 그대로이다. 아직까지 질리지 않았고 의기소침해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들은 노래를 하루종일 흥얼거리기도 한다.
'오호~! 웬일이지? 이럴 리가 없는데. 벌써 그만둬야 맞는데?'
나는 그 비결이 뭘까 생각해 보았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흥겹다는 것. 노래에 맞춰 운동을 하니 힘들어도 하게 되는 이상한 힘이 있다. 그래서 노동요라는 게 있구나 싶었다.
두 번째로 누가 아무도 나에게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생을 춤이라는 것을 춰본 적도 없고 걸을 때조차 엉덩이 한번 흔들지 않는 유교걸인 내가 추는 춤이 얼마나 가관일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그런데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강사님은 앞에서 흥을 돋워 주시기는 하지만 한 번도 나무란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나무랄 까닭도 사실 없다. 줌바댄스를 다니는 이유가 춤을 잘 추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건강해지고 싶어 운동삼아 하는 거 아닌가? 꼭 잘 추지 않아도 몸을 움직이면 된다. 그렇게 치면 당연한데 왜 이리 무심한 선생님이 고마운지.
세 번째, 나 스스로가 나를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그 방법은 바로 거울을 보지 않는 것이다. 앞쪽에 자리한 화려하고 예쁘게 꾸민 선배님들에 가려 뒤쪽은 거의 보이지도 않지만 잘 추지 못하는 나를 보지 않으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따라 춤을 춘다.
마지막 네 번째는 줌바댄스가 내 감정을 승화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아이와 다툰 후 속상한 마음 그대로 줌바를 하러 가게 된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같이 다니는 언니도 몸이 좋지 않아 빠지게 되어 이런저런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우울한 상태인 적이 있었는데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니 뭔가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좀 나려고 하면서도 가뿐해지는 기분이 묘했다. 이것이 바로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봤던 나빌레라~ 하는 승무라는 시에서 슬픔을 몸짓으로 승화하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요즘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모습과는 다른 뭔가 흥에 겨운 것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앞에서 말한 '도대체 나다운 게 뭔데?'에 대한 답이 이것이다.
나다운 것과는 다른 삶을 사는 내가 낯설지만 흥겨워하는 나도 나쁘지 않다. 비록 댄스 본능이 내 안에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흥겨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정적이고 얌전한 것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구나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과는 다르게 어릴 적 흥이 많고 까불기도 잘하던 아이였다. 그렇게 까불다가도 남들 앞에만 서면 엄마 뒤에 숨는 아이여서 엄마는 항상 나에게 '으이그 이 방안퉁수!' 하면서 나무라셨다.
덜렁대고 까불고 즐거운 것을 숨기지 못하던 아이, 그렇지만 낯가림이 심한 아이. 그게 나였다.
어릴 적 나는 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게 싫었다.
옆집 미주라는 아이는 언제나 얌전하고 차분했다. 치마를 입어도 조신했고 하얀 얼굴에 웃을 때도 살짝 미소만 보이는 참 예쁜 아이였다. 나도 그런 아이가 되고 싶었지만 까맣게 탄 얼굴에 늘 덜렁대고 코 찔찔이다가 남자애들과 자치기 하며 노는 게 좋고 치마는 죽기보다 싫었던 아이였다. 기분이 좋으면 나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는데 나는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미주처럼 예쁘고 조그마한 웃음을 지어보려고 애썼다. 그럼 무언가 속 깊은 아이 같고 똑똑한 아이처럼 보였으니까. 어차피 남들 앞에 서지도 못하는데 얌전한 아이인 게 차라리 나았다.
그렇게 나는 나를 감추려고 했었나 보다.
그래서 크게 웃는 것도 잊어버렸나 보다.
그래서 어릴 때의 까불대고 즐거운 흥이 이제야 줌바에서 발현됐나 보다.
이젠 크게 웃는 나를 싫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보니 어린 내가 웃는 게 참 예쁘다.
아! 그런데 줌바의 한 가지 단점이 있다. 살이 안 빠진다는...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