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보이스에서 톰과의 대화 이후 R은 마음속 어딘가가 묘하게 흔들렸다.
'두 번째 목소리를 어떻게 찾지...'
호텔로 돌아온 그날 밤.
R은 무슨 이유에선지 오래전 부터 쓰던 노트 하나를 꺼냈다.
손때가 묻은 표지 위엔 흐릿해진 글씨로 '생각, 끄적임' 이라 적혀 있었다.
그 노트는 R이 지금까지 무심코 써내려간 마음의 조각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페이지마다 날짜는 흐트러져 있었고, 어떤 날은 단 한 줄뿐이었으며,
어떤 날은 감정이 폭발하듯 빼곡했다.
지금까지는 그냥 흘려보냈던 문장들.
한 장, 또 한 장.
오래된 시간들이 들춰지듯 페이지를 넘기던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나의 문장이 시선을 붙잡았다.
그건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조용히 남겨둔 작은 신호 같았다.
“억울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하지 않으니 점점 고립되었고,
그렇게 외로워질 줄은 몰랐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저 서운했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싶었다.”
낯익은 감정이 서서히 R의 안을 파고들었다.
오래 묻어두었던 외로움과 무력감이 다시 살아났다.
버몬트를 떠나 이 곳에서 한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 버텨왔지만,
그건 단지 감정을 눌러둔 채 살아왔다는 뜻이었다.
무시한 감정은 언젠가 다시 떠오른다는 걸,
이제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이번엔… 반복하지 말자."
그는 조용히 펜을 들고, 노트 빈 곳에 다시 끄적였다.
'내 감정은 언제나 일상 속에서 무너지고, 또 일상 속에서 회복했다.
다시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무너지고 상처받던 마음이 정말 사라진 것인지,
혹은 잠시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인지 이제, 그 감정과 마주해야 할 때...'
감정은 언제나 느낌으로만 지나가려 하고,
기억은 자꾸만 무시된 채 흘러가려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
그 감정이 사라지지 않도록,
다시 잊히지 않도록,
글자는 조용히 번져갔고,
그의 감정은 펜 끝에서 비로소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토요일 아침.
R은 조나단을 만나기 위해 그의 명함에 적혀 있는 주소로 차를 몰았다.
그날, 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날 들었던 말이 왜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는지. 감정은 조율해야 한다는 말이,
왜 그토록 생소하면서도 절실하게 들렸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외면하지 않고,
내 안에서 흔들리는 감정을 제대로 마주해보고 싶었다.
그의 차는 맨해튼을 벗어나면서 도시의 소음이 점점 희미해졌고,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좁은 국도를 따라갈수록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가로등도 드문드문 보이고, 신호등도 없는 시골길. 작은 숲길이 나왔고,
오래된 느티나무 하나가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느티나무를 지나자 낡고 낮은 간판 하나가 R의 눈에 들어왔다.
Corner of Peace SINCE1989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철제 간판.
손으로 직접 그린 듯한 글씨.
그리고 낡았지만 깨끗이 정리된 외관.
모든 것이 과거의 어느 장면처럼 조용하고 또렷했다.
R은 차를 세우고 천천히 차 문을 열었다. 차 문을 닫는 소리조차 울릴 만큼, 주위는 고요했다.
주변엔 오래된 차량과 부품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바깥 벽면은 옅은 청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고,
페인트가 벗겨진 곳마다 시간이 쌓인 흔적이 느껴졌다.
앞마당 한쪽에는 빨간색의 작은 벤치가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손님들이 잠시 앉아 숨을 고르는 장소 같았다.
간판 아래엔 오래된 등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가늘고 질긴 가지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 부드럽게 건물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오래도록 품어왔음을 보여주듯이.
창가에는 햇볕을 받고 있는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무언가가 망가지거나 지쳐도 다시금 편안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R은 마치 그의 고향에 와 있는 듯 한 익숙한 모습에 편안함을 느꼈다.
그 순간, R은 자신이 왜 이곳을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저 대답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조용히 안착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 조나단의 모습이 보였다.
조나단을 본 R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눈빛, 모든 걸 묻지 않고도 이해할 것 같은 미소.
R은 조용히 눈을 마주쳤고, 아무 말 없이,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필로그
감정은 무시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말하지 않고 눌러두었던 감정은
결국 형태를 바꿔 다시 돌아온다.
무기력으로, 짜증으로, 이유 없는 피로감으로.
그래서 회복은,
무언가를 애써 바꾸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온 일상 속에서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감정이 흔들릴 때 우리는 너무 쉽게 ‘내가 틀렸다’고 결론 내린다.
그래서 자신을 부정하거나 억누르거나, 바꾸려 한다. 하지만 감정은 틀림이 아니라, 흐트러짐이다.
그저 중심을 다시 잡으면 다시 흐를 수 있다.
감정 조율은, 지금의 나를 인정한 채 살짝 방향만 되돌리는 일이다.
감정이 망가진 게 아니라, 살짝 어긋났을 뿐이라는 걸 기억하자.
감정은 바꿔야 할 결함이 아니라, 조율해야 할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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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서툴지만 로딩 중입니다』 1부, 1화~10화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도시에서,
서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R의 이야기에 함께 걸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11화부터는, 조금 더 깊은 감정의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말 한마디,
외면했던 감정의 조각들,
그리고 마주할 용기를 미뤄둔 어떤 진심까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서툰 마음이 자라는 순간들과
R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여정을 조심스레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