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9화 감정의 흔적들

by 슬미탐
제 9화 표지.png

“이제 출발하셔도 됩니다.”


그는 R에게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R은 잠시 고개를 끄덕인 뒤도 가만히 서 있었다.

손에 쥔 명함 하나.
그 작은 종이 한 장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리처럼 자신을 어디론가 이끌고 있는 것만 같았다.


R은 그에게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를 한 뒤 차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도, 밤공기의 온도도,
모두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R은 그것을 애써 외면했다.

호텔에 도착한 R은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를 꺼내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날 밤, R은 조용히 명함을 다시 꺼내 들었다.

칼리브레이터? 명함을 손에 쥔 채로 그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스스로 외면한 감정은 다른 모습으로 돌아곤 해요.
무기력, 짜증, 피로, 혹은 냉소로. 감정이 이런 신호를 보낼 때는

외면하지 말고 자신을 제대로 들여 봐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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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은 번역되지 않은 외국어처럼 마음 한편에 걸려 있었지만,

R은 애써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파악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후회는 조금 늦게 찾아왔고,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말들이 공중에 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미팅이 길어졌다.
브리핑을 마친 캐런에게 회의실을 나서며 마이클이 말했다.

“좋아요. 캐런!

이 카피의 전달 방식은 조금 더 감정선을 고려해 보면 좋겠어요.”


이상하게, R은 마이클의 말이 유난히 가슴에 오래 머물렀다.

“전달 방식.”
“감정선.”


예전 같으면 그냥 넘겼을 말에도 마음이 스쳤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몇 번씩 치고 올라왔다.


회의가 끝난 후에도 R은 자신이 마시던 머그컵을 한 참 바라보았다.

머그컵 안쪽에 남아있는 커피 자국,

별것 아닌 흔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눈을 떼기 어려웠다.


‘커피 한잔도 이렇게 흔적이 선명하게 남는구나…’

그 순간 문득,
자신의 마음속에도 그런 자국들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마셨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감정들.
지나간 줄 알았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어딘가에 이렇게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워지지 않고,
말하지 않았다고 사라지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남아 있는 어떤 감정의 얼룩들.


‘사람 마음도… 결국은 이런 거겠지.’


그는 조용히 컵을 내려놓았다.
그 안에 남겨진 흔적처럼, 그의 마음에도 지우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있음을
조금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회의실을 나서는 클레어와 눈이 마주쳤다.


“R 씨, 괜찮으세요?”

R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네? 아, 네. 그냥…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서..

커피가 다 식었네요..”


그는 늘 하던 대로 친절하게 대답했지만, 클레어는 R의 그 모습에 묘한 공기를 느껴졌다.

클레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회의실을 나섰다.
R은 자리에 남아, 아직 미지근한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머크컵의 온도는 아주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퇴근 후, 도시는 어딘가 느슨하게 흐르고 있었다.

호텔로 향하던 R은 문득 세컨드 보이스가 떠올랐다.

톰이 다음에 오면, 세컨드 보이스 의미를 알게 될 것이란 말.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R은 세컨드 보이스로 향했다..


세컨드 보이스 문을 여는 순간, 낡은 문짝이 가볍게 삐걱였고,
안은 낮은 조명과 낡은 가죽 의자 특유의 냄새로 가득했다.


혼자서 물 잔을 닦던 톰은 R을 발견하고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어서 와요”


R은 머쓱은 듯 저 기억하세요?


그럼요, 이곳에 온 손님들을 기억하는 게 제 또 다른 취미입니다.

톰은 R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R은 바 구석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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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로...

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곳을 지나다 생각나서요..”


톰은 자연스럽게 맥주 한잔을 밀어주었다.

맥주를 받은 R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톰 아저씨는 이곳에 오래 계셨어요?


그 말은 들은 톰은 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흐르던 재즈 음악이 그 순간엔 멀어지고, 공기 속에 고요함이 하나 둘 내려앉기 시작했다.


“여기 머문 지 벌써 수십 년이 됐지요...”

R은 말을 이어 갔다.


“지난번에… ‘Second Voice’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다음에 오면, 그 뜻을 알게 될 거라고.
그런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니, 그냥… 감을 못 잡겠어요.”


톰은 바 너머 벽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나도, 처음 그랬죠…

이 바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땐 그저, BAR 이름인 줄만 알았지요.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뜻을 조금 알게 되더군요.


R은 벽면에 걸려 있는 낯익은 사진에 시선이 멈추웠다.

“저분, 혹시 톰 아저씨예요?”


바 내부사진.png

그의 눈빛은 멀어진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맞아요,

난, 젊었을 때 트럼펫을 연주했어요.”


R은 그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톰의 현재 모습과 ‘트럼펫’이라는 악기가 선뜻 연결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 외모도, 촌스러웠고, 시골 출신이라. 뉴욕 같은 대 도시에서 나 같은

시골 촌뜨기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쉽지는 않더군요.”


“사실, 트럼펫 연주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었죠.

배운 것도 없었고, 가족도, 친구도… 다들 멀리 떠났고...”


톰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처음 내가 뉴욕에 왔을 때 첫 번째 목소리는,

늘 누군가에게 내 연주를 들려주기 위한 거였죠,


트럼펫 연주를 잘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고, 박수를 받고 싶었고,
어쩌면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명처럼 느껴졌죠.”


R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았어요,

중간에 사기도 당하고, 몇 번의 실패를 하고 나니까.

어느날 두 번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 누구한테 들려주려고 내는 게 아닌, 내 자신한테 들려주는 거였죠."


R은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톰은 마치 그 목소리를 아직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듣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렇게 갈 곳 없던 내게, 이곳은… 집이 되었고,

내 인생이 머무는 장소가 된 거죠.


가끔은 떠날 이유가 없다는 게, 남아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그 말 끝엔 쓸쓸함보다, 오래된 체념에 가까운 담담함이 맴돌았다.


“그래도… 나름 운은 좋았어요,

아무도 받아 주지 않던 나에게, 이곳에서 연주를 할 수 있었으니.. ”


“그럼… 지금도 트럼펫 연주 하세요?”

R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톰은 눈빛이 흔들리며, 대답을 이어갔다.


“아니요, 지금은 연주하지 않아요..

오래전, 비 오는 그 날 이후로..


R은 톰이 말하지 못하는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었음을 직감했다.


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떴다.


상처도, 후회도, 꿈을 접은 마음까지도, 다 거기에 남아 있어요.

어쩌면 그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로 하는 목소리였죠..

그 목소리가, ‘Second Voice’라고 생각해요.


그래, 어쩌면 지금도 괜찮아...


톰의 말을 들은 R은 잔을 움켜쥔 손에 작은 떨림이 전해지는 걸 느꼈다.

언제부턴가, 자신도 모르게 '첫 번째 목소리'를 내려고 발버둥 쳤던 기억이 스쳤다.


멋진 척, 괜찮은 척, 여유로운 척.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에,
세상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에 맞추려고, 스스로를 잃어버릴 뻔했던 순간들.


R은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맥주잔 너머로, 낡은 무대가 흐릿하게 보였다.


세컨드 무대.png


낡은 마이크 하나, 희미하게 반짝이는 조명 하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무대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누군가 한때 꿈꾸었던 시간이,
고스란히 머물러 있는 듯 보였다.


무대 위, 아무도 없는 그곳에
마치 오래된 선율이 여전히 떠도는 듯했다.


그리고, 자신도 아직, 자신만의 두 번째 목소리를 잊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R은 아주 작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필로그


우리는 종종
세상이 듣고 싶어 하는 첫 번째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다.

괜찮은 척, 멋진 척,
모든 게 잘 돌아가는 척.

그런 ‘척’들이 차곡차곡 쌓일수록,
내가 진짜로 듣고 싶었던 내 안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마침내는 사라져버린다.


그런 감정과 생각들은 커피 자국 처럼, 내 마음에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두 번째 목소리
그건 세상을 위한 소리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조용히 건네는 말이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어쩌면 어제도, 오늘도
우리는 그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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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화 예고


R은 조나단이 했던 말이 계속 생각이 났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의 명함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