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립각

by 조대리
다운로드 (10).png illustrated by 조대리

최근 챗GPT를 통해 사진을 '지브리풍' 그림으로 바꾸는 일이 유행하는 일이 있었다. 너도나도 본인의 프로필이며, 가족사진들을 지브리풍으로 바꿔 실물과 비슷하네 아니네라는 등의 시답잖은 투정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화풍을 프롬프트 몇 글자로 손쉽게 가져다 쓰는 일이 저작권에 위배되는지 등등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은 물론, 방구석 전문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었다.


어느 기사에서 보니, 요즘은 학생들이 숙제도 챗GPT를 이용해 작성하는 일이 잦아져서,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손쉽게 답을 찾아내려는 성향이 강해져, 응용력이나 통찰력이 저하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있더라.




나는 어떤 이유에서 이건, 챗GPT를 사용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가상의 존재와 자판으로 두드리는 몇 마디 글자들로 소통한다는 것 자체가 맘에 들지 않기도 하고, 사소한 질문이 되었든, 어떤 이야기를 꾸리는 데 있어 떠오른 아이디어가 되었든, 내 머릿속에서 나온 무형의 자산이라면 자산이 도저히 가늠하기 불가능한 어떤 미지의 공간 안에 떠돌게 되고, 나 아닌 누군가의 무형의 자산들을 취합해 내게 전달해 준다는 자체가 몹시 못마땅하달까.


인공지능 AI로 통칭할 수 있는 시스템이 비단 챗GPT만이 아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 곳곳에 적용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인간의 형상을 쏙 빼닮은 안드로이드가 집안일을 돌보고(바이센테니얼 맨(1999)),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자식을 대신하는 존재가 되고(에이아이(2001)), 사고로 부모를 잃은 조카의 또래 친구가 되기도 하고(메간(2022)), 안드로이드나마나 그냥 채팅만으로도 인간과의 소통에 서툰 한 남자의 연인이 되기도 하는(그녀(2013)) SF 영화 속의 이야기가 멀지 않은 미래에 실제 우리에게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지구상 어느 곳에서 이미 인간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 시제품이 이미 제작되어 출시 전 마지막 테스트를 하고 있을 수도.




언젠가, 친구와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서로가 자신의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할 필요는 없었으나,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친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가벼운 수준의 토론이었다.


내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의문은, 인공지능 AI로 인해 인간의 노동력이 대체된다면, 일자리를 잃은 인간들의 설 자리가 좁아질 테고, 그렇다면 AI를 통해 양산되는 문화 콘텐츠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거다. 당장 먹고 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인간들이 AI로 만들어진 영화, 드라마를 비롯해, 광고, 숏츠 등 아무튼 영상의 형태로 제작되는 온갖 문화 콘텐츠를 즐길 수나 있겠냐는 것이다.


AI가 각본을 쓰고, AI로 생성한 가상의 배우가 연기를 하고, AI가 편집해서 완성한 영화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당장은 그 AI로 만든 영화를 봐주는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이 돈을 벌어 지갑을 채우고, 그 돈을 써서 집에서 정기구독 중인 OTT를 통해 보든, 극장에 가서 티켓을 사서 보든, 어쨌든 돈을 쓰는 주체는 아직은 인간이다.


그런데, AI로 대체되는 직종이 속출하면서 인간의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좁아진다고 치자(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기는 하지만). 당장 오늘 무엇을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한 인간에게 OTT 정기구독이며 극장 티켓 구입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때, 친구가 말했다. 사회적인 복리후생을 확대하면 될 일이라고. 어차피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산업혁명 때도 있었던 일이라고.


영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지만, 과연 그것이 모든 우려를 말끔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모범답안일까.


하긴, 머릿속에 뒤엉켰던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똑 떨어지는 답이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챗GPT는 정답을 알고 있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생애 첫 순간들을 기억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