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익숙한 이웃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고양이들
네비를 찍어도, 전화를 걸어도, 수소문을 해도 찾을 수 없는 집이 있다. 경기도 광명시 광명2동 88-8번지 선문빌라 203호. 전화번호는 02) 2614-4302. 광명사거리역 10번 출구에서 광명재래시장으로 들어와 후문으로 100m 직진 후 오른편으로 돌면 정면에 보이는 벽돌 빌라.
지금은 재개발로 없어졌다. 동네란, 사람들이 생활하는 여러 집이 모인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만 모여있는 곳이 아니다. 까치집도 있고, 개미집도 있으며, 길냥이들도 제법 구역을 정해 살고 있다. 재개발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어떤 사람과 어떤 생명은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분명, 옆집엔 노부부가 살았다. 약간의 마당과 검은 대문을 가진 단독주택이었다. 여름이면 메리야스만 입고서 현관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했던 할아버지가 올여름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고등어 등줄기 무늬가 그려진 회색 고양이만 현관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앞집은 익숙한 그 이름, '하이츠' 빌라였다. 지하를 포함해 5층 짜리 건물이었는데, 우리 형의 여자사람친구가 그 빌라에 살았다. 근데 그 집도 온데간데없다. 턱시도를 입은 것처럼 배만 허연 검은 고양이가 하이츠 빌라 유리문에 비칠 뿐이었다.
윗집에는 갓난아기를 데리고 있는 신혼부부가 살았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갈등은 없었다. 하지만 계단 중간층에 놓인 유모차는 항상 내 자전거와 주차 시비를 가리고 있었다. 역시 그 집도 사라졌다. 내 자전거가 최후 승리를 얻어 계단 중간층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유모차가 있어야 할 중간층을 바라보면, 계단에서 내려오는 것은 치즈 같이 노란 고양이가 내려오다 눈을 마주친다.
인간은 이사 가면 된다. 까치는 날아가면 된다. 하지만 길냥이들은 그 골목이 전부이지 않은가.
2018년 8월 13일, 전역하고 돌아온 내 동네 광명2동의 풍경은 온통 고양이들 뿐이었다. 군복무 동안 재개발 진행에 속도가 붙었고 이웃들이 떠난 것이다. 사람들이 빠지자 동네는 삽시간에 폐허가 되었다. 이사 가며 버린 가구와 부서진 창문들, 비행 청소년들이 아지트로 삼은 단독주택, 그런 가운데 우리 집은 마지막까지 자리했다.
나는 언제 이사를 가는지, 가면 어디로 갈 것인지 부모님께 묻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며 동네를 찬찬히 향유했다. 가끔씩 인기척이 느껴질 때 보면 역시 고양이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동네에 살면서 사람과 살지만 않았다. 이 동네에서 자라던 시절 모두 고양이가 있었다.
갑자기 이 묘한 생명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이사 가면 된다. 까치는 날아가면 된다. 하지만 길냥이들은 그 골목이 전부이지 않은가. 혼자서 빈 동네를 독차지하던 즐거움은 사라지고 걱정과 동정의 마음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사람 대신 마지막까지 우리의 이웃으로 남아있는 고양이들을 모두 거둬들이기로 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재개발 공사가 시작되면 고양이들은 펜스 안에 갇혀 죽을 운명이었다. 다행히도 고양이들은 광명2동의 유일한 인간인 우리를 잘 따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부모님은 이 고양이들을 진작에 중성화하셨었고, 장소를 정해 사료를 제공하고 계셨었다.
사실 나는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어, 턱시도, 치즈 3마리의 고양이를 거둬들이는 것에는 찬성했다. 고양이들의 운명까지 생각하며 그 생명을 거두길 바라는 부모님의 모습이 좋았기도 했다. 나한텐 언제 그렇게 상냥하고 섬세했을까 싶은 손길과 표정을 고양이들에게 자주 꺼내 보이셨다. 부모님의 잊힌 감정을 깨워준 것 같은 고양이의 역할에 내심 고마움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아 꼴찌로 떠나는 우리 집에게 광명2동이 주는 위로 같이 느껴졌다.
생명들을 화해시키는 고양이
고양이들은 아직도 부모님 집에 있다. 몇 해 전 결혼하면서 출가한 나는 이 광경이 익숙하지 않다. 여기저기 고양이 털이 많은 것과 괴상한 동작과 자세로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꽤나 신경 쓰인다. 하지만 이 녀석들을 미워할 수 없다. 사라진 본가 향수를 떠올리게 해서 밉지 않고 정이 간다.
게다가 부모님의 관계가 전보다 좋아 보이는 것은 뜻밖의 횡재다. 나를 낳고 키우는 동안 부모님은 서로에게 소원해지셨다. 어느 가정이 그렇듯이 혼자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늘어나는 행복과 비례해서 감내해야 할 책임과 무게도 커졌기 때문이다. 더 행복하게 잘 살아보려고 결정했던 선택들이 갈등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고, 자라는 동안 나는 나 때문에 부모님이 멀어진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서 광명2동은 마냥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 생각해도 우수가 찬다. 학원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열린 창문 밖으로 부모님의 성난 대화가 들리면 그대로 집 동네를 몇 바퀴씩 돌았던 시간이 생각난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일처럼 회피했었는데, 이 묘한 생명이 부모님의 대화 주제와 분위기를 곧잘 변화시켰다. 부모님의 지치고 상한 마음을 회복시키는 매개체가 되어주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이 아름다운 화해의 실마리가 고양이 덕분이라 생각했다.
생명 그리고 사랑, 최재천의 <곤충사회>
재개발로 인해 거두어들인 고양이가 우리 집에 미친 영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고양이가 가족이 되면서, 고양이라는 생명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유모차와 아기들이 임신 후에는 눈에 들어오듯, 이제는 길 위의 고양이들이 자꾸 눈에 띄었고, 그들의 안부와 안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생명이다. 인간은 이웃이다. 그렇다면, 생명도 이웃으로 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설정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고양이는 나의 이웃이 될 수 있었다. 이따금씩 사회적으로 도마에 오르는 캣맘을 싸잡지 않게 되었다. 생명을 이웃으로 볼 줄 아는 마음은 상당히 인간적인 마음이다.
작년에 아내가 곤충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곤충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적게 나온다) 알라딘에서 득템해온 최재천 교수님의 ‘곤충사회’가 생각난다. 우리 인간들은 서로 인간만이 생명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몇백 몇천 년 전부터 우리는 사실 인간 외 수많은 생명과 동거 중이고 협력 중이며 이웃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명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은 어디까지일까. 넓으면 넓을수록 사랑이 많은 사람이겠다. 나는 우리 인류가 발전할수록 사랑이 비례했으면 좋겠다.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각으로는 분노가 치밀었으나, 막상 마주하면 나와 똑같이 반짝이는 눈동자와 들어오고 나가는 숨결을 보게 된다. 생명에서 나오는 고유한 존엄함을 막상 마주하니, 침이 고인 입은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다.
재개발로 사라진 이웃, 덩그러니 우리 집과 함께 남은 고양이들. 비로소 고양이를 생명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그때부터 나의 사랑은 더 넓어지기 시작했다. 2025년, 건강도, 돈도, 진로도, 만남도 좋아지길 바라지만 무엇보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