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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Nov 18. 2023

과학과 종교의 대립

과학과 종교는 함께 갈 수 없는 것인가?


내가 처음으로 ‘신’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는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쳐다 봄으로 써였다.


이십 대 유럽 자동차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고개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경이로움에 전율이 왔다. 저렇게 많은 별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며 하늘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니 어찌 우주에 Cosmos 질서와 법칙이 없다 할 수 있으며 또 우주질서와 법칙이 있다면 그를 관장하는 이 없겠냐는 의문이 처음으로 강렬하게 일었다. 그 후 성경을 읽게 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해서 여기서 종교라 함은 타 종교가 아닌 기독교를 말하고 주로 과학과 종교의 대립은 동양의 대표 종교인 불교와의 충돌이 아니라  창조론과의 대립이 있는 기독교와 서양 과학 문명의 대립으로 봐야겠다.      


물론 나에게 기독교로 출발한 종교는 이후 다른 종교의 공부로도 확대되었다. 그리고 내가 맨 먼저 느낀 신의 존재에 대한 경이로운 감정은 지나고 보니 이스라엘의 부족신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기독교의 전신 격인 유대교의 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Universal Law, 대 우주의 법칙과도 같은 신이었으니 다분히 이미 과학적 사고와도 상통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있는 태양계 같은 것이 우리 은하에만 천 억 개가 넘고 그런 은하가 우주에는 현재 지구에서 관측가능한 은하로만 1700억개 이상 있다 한다. 우리 은하는 라니아케아란 초은하단에 속해있는데 이 은하단 안에만도 무려 10만 개의 은하가 있고 이런 대규모의 초은하단도 우주의 일부분에 불과하다하니 우주는 실로 어마하다.


그러니 어찌 변두리 은하계인 우리 은하에서도 변두리에 위치해있는 태양계안의 8개 행성중 하나인 이 지구에만 우리같은 지적인 생명체가 살고 있고 그 중 일부가 믿는 신이 우주안의 유일신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거의 없다고 본다. 아마도 신이 있다면 전 우주를 총괄하는 신,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사람들의 영혼을 공평하게 다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않을까 싶다. 종교적 이름이나 겉옷의 색갈이 어떻든간에.






종교와 과학은 간단히 말하면 서로 다른 영역이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지식과 이론을 정립시킴으로써 증명해 가는 분야이고 종교는 특정 교리와 영적인 경험을 통해서 정립되는 윤리적 의미나 가치관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신념 체계다.     

그런 두 영역의 대표적 충돌이 교회가 천 년 이상 고수해 왔던 천동설에 대한 지동설과, 그리고 성경에 근거한 창조론에 반기를 든 19세기 중반 다윈의 진화론일 것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종교적 판단과 생각을 코페르니쿠스가 뒤집었고,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라는 종교적 관념을 다윈의 진화론이 깨트려 버렸다.   

  

 다윈 이후 진화론자의 필독서로 여겨지는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또 다른 책인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에서 "종교적인 신념을 품고 있다면 지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라고 말했. 그만큼  지구가 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계몽주의 시대 이후 사람들에게 종교는  비합리적, 비과학적, 비이성적 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유지해 가려는 많은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이 옳든지 창조설이 옳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한다는 생각을 어쩔수 없이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분법적인 양자택일의 구도 과학과 이성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맹목적인 믿음만으로 버텨야 할지 고민하는 처지로  몰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과학과 종교‘ 중 단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설정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제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나 통념에서 벗어날 만큼 과학은 눈부신 진보를 이루었고 마치 우주에 나가보면 신을 믿지 않을 수 없듯이 과학자이면서, 아니 오히려 과학자이기에 더 확실한 신앙을 가지게 된 경우도 보면서 두 전혀 다른 분야가 *통섭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보고 또 그리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더 이상 과학과 종교 그 둘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거나 기독교인이면 성경무오설이나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믿어야 하니 과학적 사고나 이론을 무조건 거부해야한다거나 자신의 절대 (맹목적)신앙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고 본다.      


그렇게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와 무신론적 유물론적 사고로 볼 수 있는 과학은 종교적 절대주의와 종교를 망상이라 믿는 과학적 합리주의로 극단적 대립을 해왔지만 이제는 그러한 극단적 대립을 지양하고 두 관점의 중도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수용하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 본다.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과학과 종교를 별개의 영역으로 보면서 두 영역이 서로 다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가지며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이 없는 종교는 맹인이다.


그의 이 말은 신앙심 없는 과학은 불완전하며 과학 없는 신앙심은 맹목적이라는 뜻이다.     


과학은 본래 자연 현상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종교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윤리적 가치 등과 같은 영역을 다룬다. 따라서 과학은 자연현상에 대해  "왜" 와 "무엇"같은 질문을 하며 답을 찾고, 종교는 우리는 "누구인가"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등과 같은 존재론적 철학적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과 종교는 함께 존재할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영역에서 다른 종류의 질문에 대답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각자 개인적 신념과 세계관에 따라 두 영역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가 다를 수 있으며, 다른 이들의 사고체계를 존중하고 서로 다른 관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과학과 종교가 역사적으로 충돌한 것은 과거 종교인과 과학자들이 각자 자기 영역의 한계를 제대로 잘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과학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파악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종교는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가치 판단에만 관계해야 하것으로써 근본적으로 서로 영역이 다르다. 따라서 종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학자들의 학설과 맞서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도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 가치 체계에 대해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것 또한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다만 과학이 제시하는 지식을 참작해서 무엇이 올바른가 하는 가치 판단을 제공하는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예를 들면, 과학자가 유전자 복제 기술을 개발하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가에 대해서는 기술을 가진 그들의 윤리, 도덕의식이 부족하고 불확실할 수 있기에 그에 대한 도덕적 선악 문제나 가치 판단의 문제를 종교적 가치 체계가 제시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이 자연 현상을 연구하고 서술하는 학문이라면, 종교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와 행동 기준,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가치 판단을 제공하기에 과학이 방법을, 종교가 목표를 제시해 주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양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지닌다.     


따라서 과학이 종교까지 대체하려 한다거나 종교가 과학의 방법과 목적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둘 다 잘못된 거라고 보고 아인슈타인은 종교 없는 과학은 무력하고, 과학 없는 종교는 눈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역할과 기능을 가지면서 또한 서로 다른 탐구 방법론과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관찰과실험, 측정과 검증 등의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현상을 연구하논리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는 반면에 종교는 신념과 영적 경험, 직관 등을 통해 존재의 근본적인 의미와 삶의 방향이나 가치관을 규정하고 나아간다.  이러한 서로 다른 방법론과 접근 방식은 서로를 보완하여 개인의 세계관과 신념에 보다 다양한 관점과 입체적인 사고방식을 줄 수 있다 본다.


그럼으로 서로 다른 점을 상호존중함으로써 상호보완이 되는 과학과 종교는 충분히 양립이 가능하다고 본다.

열린 마음으로 하는 상호존중, 그리고 통합적 사고로는 둘 다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과학과 종교의 양대산맥이라 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서로의 한계와 영역에 대해 무지함으로써 충돌했던 두 영역의 대표적인 상충되는 부분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창조론과 진화론이다.

종교적인 신념은 모든 생명체가 창조주에 의해 그것도 6일 만에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니, 이를 창조론이라고 한다.  반면에 과학은 가장 단순한 생명체인 미토콘드리아부터 진화해서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복잡하고 오랜 진화과정을 통해 생물의 다양성으로 발전해 왔다고 설명한다. ( 개인적으로는 어떤 종목에 있어서는 진화론을 믿고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지만 인류의 경우 종별 창조는 따로 있었다고 나의 뇌피셜로 믿는다 )


둘째, 세계의 형성과 시대

종교적 신념은 세계의 형성에 대해 특정한 시대를 주장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창세기 기록에 근거하여 아담 이후 예수까지를 4000년 정도로 보니 지금 세계가 6,000년 정도 전에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학은 지질학적으로 지구 형성은 약 46억 년 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지구와 현생인류의 나이는 다를 수도 있다 본다. 수 차례 빙하기를 거치면서 멸종과 새로운 시작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셋째, 기적과 자연법칙

종교적인 신념은 종종 기적적인 현상을 포함하기에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기적을 믿는다. 그러나 과학은 자연법칙에 따라 설명되는 현상을 연구하고 이해하려고 하기에 이러한 기적적인 현상은 과학적인 설명과는 모순될 수밖에 없다.

( 나는 개인적으로는 성경의 부활을 문자적 부활로 보기 보다는 영적의미로 받아드린다. 마치 예수님이 포도주와 빵을 내 '피와 살'이라 말했듯이 성경의 기록중 다른 많은 부분도 그런 은유적 표현의 메타포로 쓰여졌다고 본다. )


이런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두 영역은 엄연히 다른 분야이므로 서로 상호보완적 관계로 나아가면 앞으로 급변하는 미래사회를 살아갈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본다.


아래 스테인드 글라스의 그림은 종교와 과학, 두 영역이 서로 협력해서 동반성장해 감으로써 가운데 더 큰 빛으로 나아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Yale University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다. 과학을 헌신, 노동, 진실, 연구 및 직관으로 의인화하고 종교를 순결, 믿음, 소망, 경외, 영감으로 의인화해서 과학과 종교의 조화로운 협력을 나타내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화합을 이루는 장면을 그리는 작품 "교육" (1890).   


                




지금까지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역할과 기능 그리고 서로 다른 방법론과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언급했다.


다시 거듭 반복해도 과학이란  수학적 논리와 실험적 방법을 통한 합리적 이해로 탐구하는 지적 활동인 반면, 종교는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고 절대자의 도덕적 계명과 규율을 따르려는 행위를 말한다.

즉, 신을 숭배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두 영역이 겉보기에는 달라 보일 수 있어도 둘 다 진리를 향한 의지를 갖고 나아가려는 공통의 목표를 가졌음을 본다.


자연계의 법칙을 통해서 이치를 규명하려는 것이나 주어진 진리를 토대로 그런 삶을 살아가려는 것이나 둘 다 사실과 실제에 촛점과 근거를 둔 인간의 선한 의지들로 본다. 그 둘은 둘 다 세계를 나름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실행하려는 의지를 갖고 나아간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즉 진리를 향한 공통 목표로 나아간다는 점이 동일하다.      


지금 우리는 4차 혁명시대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차, 드론, 가상현실(VR) 등으로 대표되는 우리 시대를 4차 혁명이란 말로 처음 표현한 클라우스 슈밥은  "이전의 1, 2, 3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적 환경을 혁명적으로 바꿔 놓은 것처럼 4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 질서를 새롭게 만드는 동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네이버 지식백과]4차 산업혁명(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4차 산업혁명은▷1784년 영국에서 시작된 증기기관과 기계화로 대표되는 1차 산업혁명▷1870년 전기를 이용한 대량생산이 본격화된 2차 산업혁명▷1969년 인터넷이 이끈 컴퓨터 정보화 및 자동화 생산시스템이 주도한 3차 산업혁명에 이어 ▷로봇이나인공지능(AI)을 통해 실제와 가상이 통합돼 사물을 자동적·지능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가상 물리 시스템의 구축이 기대되는 산업상의 변화를 일컫는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과학과 물질문명이 눈부신 발전을 이뤄 향후 5년 뒤의 세계질서와 앞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이런 우리도 궁극적으로는 종교적인 문제를 떠나서 생각하거나 살지는 못한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은 생로병사를 느리게든 빠르게든 겪을 것이고 마지막엔 죽는다.


고로 죽음 이후의 사후 세계인 영적인 문제도 회피할 수는 없다.


또한 인간복제에 이르는 기술을 가졌지만 그의 사용에 대한 윤리적 문제는 여전히 종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증기와 전기를 거쳐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3차 혁명을 거치고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해 줄 인공지능의 4차 혁명시대에 이르렀어도


여전히 인류는 불공평한 분배로 인한 가난과 빈곤을 퇴치하지 못했고 집단적 폭력과 이기적 욕심, 종교적 분리의식으로 나라와 나라사이의 전쟁과 불화가 끊이지 않는다.


나는 이 모든 것은 과학과 기술이 아닌 도덕적 윤리나 종교 철학적 가치로 해결해가야 할 문제들일뿐이라 본다.




이렇게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살아가면서 과학과 종교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 않은 이는 없고 다 한 번쯤 부딪히며 고민하는 문제들이다. 어쩌면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첨단 과학과 물질문명의 끝을 살아가야하는 인류와 우리 모두가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최후의 질문이 될 수도 있는 것이 과학과 종교, 이 두 영역의 문제이고 그 둘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해서 이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현재 가장 널리 쓰이는 설명방식을 소개해본다.


이 분야의 연구 개척자인 이언 바버는 1988년 과학과 종교의 관계 설명 방식을 4가지 유형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유형을 갈등, 대화, 통합, 독립으로 분류했는데 서로 충돌한다는 갈등 모델, 서로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무관하다는 독립 모델, 과학과 종교가 통합된다는 통합 모델, 종교와 과학이 대화하며 상호작용하는 대화 모델로 나누었다.       


갈등 모델(Conflict model)     

갈등 모델은 과학과 종교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예측 모델을 다룬다. 즉, 과학이나 종교 어느 한쪽이 다른 편을 소멸시켜야 끝날 것이라는 극단적인 관점을 포함한다. 즉 싸워서 갈 때까지 가야 끝난다는 이 주장은 종교 광신도에서부터 극단적 무신론자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      


독립 모델(Independence model)     

 독립 모델은 과학과 종교를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본다. 앞서 언급한 갈등 모델의 지속적인 충돌에 불안해진 사람들은 과학과 종교는 각자 다른 규칙을 지닌 별개의 학문으로 보기를 원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이 모델을 지지하는데, 대표적으로 스티븐 제이 굴드가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를 주창했는데, 이는 과학과 종교가 대립이 아닌,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여 준다. 허나 대표적인 갈등 모델 지지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는 여전히 과학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NOMA를 주장하면서도 과학을 탄압하고 과학에 간섭할 수 있다고 했다.

독립 모델은 가장 많은 신학자와 과학자가 지지하는 모델이긴 하지만 상호 간의 침해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류했을 뿐이라는 비판을 감안하면 이 모델은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대화 모델(Conversation model)

오래 동안 사람들의 굳건한 소망이자 믿음이었던 종교는 갈 수록 바닥으로 그 입지가 추락하였다. 실제 유럽을 가 보면 모든 화려하고 큰 성당은 텅텅 비어있다. 더러는 콘서트장으로 활용되거나 레스토랑, 전시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뉴욕의 어떤 큰 교회가 한 때는 디스코장으로 쓰였다고 들었다.

그러니 이제 종교도 살아남으려면 과학과 서로 대화하며 상호작용으로 윈윈해 나가야할 것이다. 종교가 갑이든 시절은 이미 끝난지가 오래다.


통합 모델(Integration model)    

대화 모델에서 더 나아간 것이  통합 모델인데 통합 모델은 과학과 종교 간에 더 깊은 결합을 의미한다. 자연신학, 자연의 신학, 체계적 종합이 있는데, 자연신학과 자연의 신학은 자연의 섭리와 과학의 성질을 이용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체계적 종합이 일반인이 생각하는 과학과 종교의 통합이라 할 수 있겠다. ( 개인적으로 이 통합모델은 과학보다 신학을 우위에 두고 과학을 통해 신학의 입지를 더 강화하려는듯한 인상을 가지기에 별로라 생각한다 )


어떤 모델이 더 합리적이며 바람직할까?

이언 바버는 대화 모델이나 통합 모델을 더 옳은 것으로 선택했다. 우선 두 영역의 상생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갈등모델은 배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에 대한 탐구, 즉 인간의 기원과 같은 요소와 우주의 탄생, 생명 윤리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종교와 과학은 끊임없이 여전히 충돌 중이므로 독립 모델도 인정받기 힘들다. 게다가 인류의 암흑기라고도 불리며 암울한 시대상을 가졌던 중세나 양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는 과학의 시대는 결코 종교나 과학 이들 둘 중 하나가 독립적으로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천년동안 지속되었던 중세의 암흑기가 종교가 준 대표적 폐해였다면 과학기술의 혁신을 이루었던 20세기의 두 세계대전은 원자폭탄 하나만 봐도 인류에게 물질문명의 발전에 대한 희망의 거품에 대해 찬 물을 끼얹고도 남았다.


통합 모델은 종교와 과학의 통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나 너무나 다른 이론을 억지로 끼어맞추기 하려는 것도 아니라 본다. 인간 기원이나 우주 탄생등과 같이 어차피 통합될 수 없는 부분은 인정하고 가야한다.      


그런 점으로 보면 대화 모델이 좀 더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적이지 아닐까 싶다. 대화 모델은 종교와 과학의 조화로운 발전을 도우며 서로가 진리를 찾아가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종교나 과학 어느 한쪽이  없어질 수도 없고, 완전히 통합될 필요 또한 없다 본다. 서로는 서로 다른 부분은 인정하고 방해하거나 대척하는 대신 대화로 교류해 나가면서 오히려 서로 지원하면서 서로의 발전으로 윈윈하며 나아갈 수 있다 본다. 


결국 자연계에서든 영적세계에서든 진리를 탐구하여 인류의식에 기여한다는 근본적인 목적에서 이 둘은 같기에 그런 면으로 상생하며 서로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EBS 영상~신/다윈 part1


https://youtu.be/GSBkl1b81J8    



Ps

*통섭~ 統攝 , consilience ~큰 줄기(통)를 잡다(섭),
즉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의미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범학문적 연구를 일컫는다.

삼성경제연구소 부사장 윤순봉은 “20세기는 분할된 전문지식의 시대였지만
 21세기는 통합된 거대 지식의 시대”라며 “가령 외국인과 통화하면서
자동으로 통역이 되는 자동 번역 휴대전화를 만든다면 세계시장을 제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휴대전화를 만들려면 정보기술(IT)뿐 아니라
언어학·심리학·인지과학 등 인문학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2007년 9월 최재천은 생명과학전공 교과과정 개편 회의에서
학부 1, 2학년생들을 상대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마음껏 넘나드는
생명과학 강의를 개설하자고 제안했으나, 학교 측으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그는 “학문 융합이나 통섭에 대한 공감대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 같아요.
학문 간의 벽이 그 만큼 높기 때문이겠죠”라고 개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통섭 [統攝, consil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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