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별 Dec 12. 2023

인공지능 AI와 함께 하는 미래 (4)

인간을 넘어서는 포스트 휴먼시대가 열리려나?

포스트 휴먼(Post-Human) 이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인간-기계 융합체를 말한다.


주로 인공 지능, 생체공학, 로봇공학, 유전공학 등의 기술적인 발전으로 가능하다.

인간이 앞으로 한계를 넘어 새로운 능력을 가지게 되는것이 가능하다면 과학 소설에나 보던 이야기가 이제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날 지도 모른다고 추측해보게 된다.   

  

포스트 휴먼은 인공 지능의 도움으로 인간의 사고력, 학습능력, 추론능력 등이 지금과는 다른 수준이 될 것이다. 인공 지능과의 연결을 통해 인간은 초인적인 정보 처리 능력을 갖게 되며, 빠른 계산, 정확한 판단, 예지능력 등을 갖출 수도 있다. 이러한 발전은 의학 분야에서도 활용되어 인간의 건강과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 외부 기기나 인공 장치를 통해 노화와 같은 신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인공 신체 부위를 이용하여 신체능력을 강화시키고 감각을 확장시킬 수 있다, 등등 이런 것들이 포스트휴머니즘적 관점이다.     


이렇게 현 인류보다 더 확장된 능력을 갖춘 존재로서, 초능력 인간으로 상상되는 진화 인류, 생체학적인 진화가 아니라 기술을 이용한 진화로 반영구적인 불멸을 이룰 것이라고 여겨지는 인간을 포스트 휴먼(Posthuman)이라고한다.     



인류진화에 대한 그림~~ 호모사피엔스에서 포스트휴먼인 호모데우스로?



인간 초능력에 대해 생각하면 내가 보  영화 <루시>가  떠오른다.


 영화에서 루시는 인간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초능력 인간으로 등장한다. 단 몇 분 만에 외국어를 마스터하는가 하면  엄청난 시력과 청력을 가지고 아주 멀리 있는 작은 소리까지 전부 들을 수 있다. 주인공 루시가 이러한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직까지 뇌의 일부분만 사용하는 우리 인류가 뇌과학의 발달로 뇌의 더 넓은 부분을 사용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는 설정하에 영화로 만들어진 거라 한다.


루시는 인류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인류화석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뤽 베송감독은 과학의 발달이 가져올 초능력을 가진 신인류의 시작을 의미하려고 이 '루시'란 이름을 따 왔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저...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거죠?"

"우리는 뇌를 단지 10%밖에는 쓰지 못하지. 지금 자네가 투여한 약은 100%를 사용할 수 있게 해 줄 걸세." (영화 중 대사)     




그러나 영화의 이 대사부분은 적확치는 않다고 한다. 사실인즉슨 신경 과학자들은 우리는 뇌의 모든 영역을 사용하고 있는데 다만 지극히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라는 거다.     


참고로 인간의 두뇌에는 약 210억 개의 뉴런이 있는데 당연히 모두 동시에 활성화하는 것은 아니고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할 때가 아니면 일상적으로는 10% 정도만 활성화된다. 그러나 필요시에는 그 활성화 비율이 치솟는다. 뇌는 인간 몸무게의 2% 밖에 되지않지만 산소나 칼로리의 20%를 소모하는 기관이다. 해서 평상시에도 두뇌를 100% 가동한다면 뇌는 지금보다 10배의 산소와 칼로리를 소모하고 인간의 심장 허파 위장 간 등 모든 기관들도 그런 자원공급을 감당해야 하므로 지금보다 3-4배의 체중과 호흡 영양섭취 등을 해야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우리 뇌를 100%를 다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을 위하여 100%를 항상 동시에 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신체 다른 기관인 심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장은 분당 최대 200번 가까이 뛸 수는 있지만 평상시에는 일부러 그렇게 빨리 뛰지는 않고 분당 80번 정도만 유지하다가 매우 격하게 운동을 하는 등과 같은 상황에서만 분당 200번까지 뛰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과 함께 바야흐르 휴먼시대에서 포스트 휴먼시대로 접어드는 것일까?!!     


기술이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진화해 기술 개발 의 속도에 어마어마한 가속이 붙는 지점을 특이점이라고 한다. 레이 커즈와일은 그 지점을 2045년으로 예측하고, 이때를 기점으로 인공 지능 기술 개발 속도에 엄청난 속도가 붙어 인공지능이 사람의 지능 을 압도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로봇공학자인 영국의 게 빈 워릭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2050년이 되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로봇들이 지구를 지배해 인간들은 이러 한 기계의 통제를 받아 노예처럼 살 것이라 예측한다 .     


그런데 이 보다 더 불편한 진실도 있다. 내가 인공지능 AI를 언급하면서 인류를 화성에 데려다 주겠다는 일론 머스크를 정말 매력적인 인물로 본다고 했는데 사실 이는 더 지켜볼 일이다. 그는 단순히 기계를 똑똑하게 만드는 시도를 넘어 인간의 뇌에 인공지능을 삽입해 인간의 지능 자체를 폭발적으로 개선하려는 연구도 함께 진행 중이다.      


일론 머스크는 인간 뇌와 컴퓨터의 결합을 시도하기 위해 '뉴럴 링크(Neuralink)' 라는 뇌연구 스타트업을 설립하여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뉴럴링크는 뇌에 아주 작은 인공지능 기기인 '뉴럴레이스(neural lace)'를 이식하는 기술 개발을 목표로 하는데 이 기기를 사람의 뇌에 이식하면 사람은 컴퓨터는 물론 인터넷과도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사람이 똑똑한 인공지능을 자기 뇌 속에 가지게 된다는 거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컴퓨터로 옮길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 인간이 문자와 언어로 대표되는 '인지혁명'을 통해서 다른 종족들을 제거하고 인류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과학혁명'으로 인공지능을 탑재하게 되는 인간을 마치 신에 비유하여 호모데우스로 명명하였다. 이런 호모데우스형 인간을 포스트 휴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인류는 이제 사피엔스단계에서 신적인 인간인 호모데우스로 나아가게 될까?


이제 갈 수록 데이터가 지배하는 이 알고리즘의 세상에서 우리 ‘사피엔스’가 일일이 처리하지는 못할  쏟아지는 정보들을 우리가 취사선택할 능력과 힘이 없다면 우리는 이 엄청난 데이터 덩어리들을 처리해줄 인공지능에 의지할 수 밖에 없고 이미 그렇게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뉴럴레이스를 뇌에 이식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칩을 통해 컴퓨터와 연결되고 각종 지식을 인간의 머릿속에 불러오 는 것이 가능해지니 그야말로 천재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뇌에 있는 기억들을 컴퓨터로 옮긴 뒤 컴퓨터에서 삭제도 가능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도 않은 것도 컴퓨터에서 다운로드하여 뇌로 주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뇌에서 컴퓨터로 옮긴 후 다시 복사하여 저장한 뒤 이것을 다른 사람의 뇌로 넣어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상황을 상상만 해 봐도 벌써 어지럽고 속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뉴럴링크는 일론 머스크가 참여한 뇌신경과학 회사다. 뉴럴링크는 컴퓨터가 인간의 뇌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각종 마비 증상과 실명, 우울증, 정신분열증 등 지금까지 의학적 치료가 불가능했던 복잡한 신경 질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목표다. 뉴럴링크는 뇌에 칩을 이식하는 제품을 개발 중이며, 이 칩은 머리카락보다 얇은 1024개의 작은 전극에 연결돼 있고, 무선 충전할 수 있는 배터리로 전원을 공급받는다. 뉴럴링크는 미국 식품의약국(FDA)로부터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 승인을 받았으나 하지만, 뇌와 관련된 모든 수술은 신체적 손상과 거부 반응이라는 내재적 위험을 안고 있다. 뉴럴링크의 안전성 논란에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단기적인 신체적 위험과 장기적인 의학적 우려, 그리고 윤리 문제다.






지금도 사람들은 사실  스맛폰으로 정보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외부에 존재하는 정보들이고  우리 뇌에 칩을 심어 머리 뚜껑을 열고 그 모든 것들을 쏟아붓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만약에 만에 하나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도 나에게 유해한 정보들이 흘러들어온다면 그 때는 어찌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사람의 뇌는 사실 하드웨어처럼 작동할 뿐인데 말이다.


우리의 신경망 조직은 정보처리 속도와 기능이 지금 인공 신경망과 아주 흡사하다. 아니  인공신경망 Artificial Neural Network 이 인간의 신경구조인 뉴런 Neuron 을 본따 만들었으니 당연하다. 그러니 이 모든 시스템은 같은 원리로 작동하고 있기에 정말  우리 뇌와 컴퓨터의 뇌가 함께 가동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 휴먼시대가 도래한다면 아니 이미 어느 정도 도래하였다면 진정한 휴먼시대는 끝나가는 건가?     


(우리 몸속  뼈, 근육, 장기등은 연로해질 수록 취약한 부분들이다. 해서 이미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제 정신작용을 주관하는 뇌마저도 대체 가능한 시대로 접어들었다니.... 여러 생각, 감정이 교차한다.)


인공지능과 인간 뇌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면 이제 인간과 인공지능이 어쩌면 공생 공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가장 낙관적으로 보면 논리나 기억, 판단, 사고력까지 부족한 우리의 뇌가 아주 좋은 시스템의 뇌로 업그레이드 됨으로써 보다 안정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여길 수도 있다.     


혹자는 포스트 휴먼 혹은 트랜스휴먼 초인간이 꿈꾸는 목표는 영원한 생명, 영생이라고도 한다. 더 이상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런 꿈의 실현이다. 그런 점에서 인공지능이 해법이 될 수도 있다. 인공지능은 늙지도 죽지도 않고 하드웨어가 낡으면 바로 교체하면 되니까. 소프트웨어는 복제하면 그만이고.     

논리적으로는 가능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인공지능이 하드웨어를 계속 교체시키면서도 소프트웨어 복제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계속 보존해 간다면 그것이 곧 영원한 사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          






포스트 휴먼을 논하기 전에 먼저 human, 인간이란 뭔가? 철학적 존재론적 영성적 정의를 먼저 해야겠지만 이 글은 과학기술과 관련된 글이니 그냥 넘어간다.


대신 그간 휴머니즘으로 간주되어 온 인문학적 가치나 정의를 잠간 살펴보면 휴머니즘은 무엇보다 신이나 다른 것이 아닌 인간 존재를 가장 최우선으로 중요시하고 인간의 능력과 성품 그리고 인간의 현재적 소망과 행복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정신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생각이나 사상을 인간주의, 휴머니즘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정작 인본주의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을 위한다 하지만 사실은 힘센 인간이 약한 인간을 정복하여 지배해온 역사가 아니었던가? 휴머니즘의 본질대로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따라 역사가 흘러오지 않았다는 것은 단적으로 근세 서양 열강들이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을 약탈하였던 제국주의 역사가 분명히 보여준다.


지금도 세계는 신본,인본이 아니라 이제는 자본이 주인이 되어 경제적 부가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구조로 흘러가고 있다.    

 

자본과 패권을 둘러싸고 각종 충돌과 알력과 갈등 그리고 전쟁까지 일어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이다. 이것이 여전히 이기와 탐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류 휴머니즘의 현실 주소다.           


포스트 휴먼은 이러한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인류역사를 가져오게 될까? 기술의 힘을 입어서 탐욕이 아닌 이성 합리 논리적 공평무사한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들로 거듭나서 보다 온전한 존재의 신인류로 진화해 갈 수 있을까?



포스트 휴먼과 비슷한 개념으로 기술적 혁신의 도움을 받아 훨씬 뛰어난 능력을 획득한 사람을 트랜스휴먼 (Transhuman)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유전자 개조를 받거나, 신체 장기를 하드웨어로 대체하는 경우를 포함한다.


이렇게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은 과학기술을 이용해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성질과 능력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으로 장애, 고통, 질병, 노화, 죽음과 같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운동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함께 점점 더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고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앞으로의 생명과학과 신생기술이 인간의 각종 한계와 문제들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사실 인간한계를 극복하려는 이러한 트랜스휴머니즘 사상은  오래전 부터 있어 왔었다.

마시면 젊어지는 분수의 물을 얻으려했던 기원전 수 천년전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이나 영생을 바래서 불로초를 구하게 했던 진시황에 이르기 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죽음을 초월하고 영원히 살려는 바램과 욕망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9세기 과학의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드디어 이제 과학으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 어쩌면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제 이 트랜스 휴머니즘 사상과 운동은 노화를 제거하고 지능, 육체, 정신을 강화시키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이성의 응용으로 인간 조건 개선의 가능성, 정당성을 지지하는 지적 문화적 운동으로 자리잡았다.              





트랜스휴머니즘 관점에서 보면, 트랜스휴먼(transhuman)은  휴먼 에서 포스트휴먼으로 이행 중인 중간단계의 사람으로 본다.  반면, 포스트휴먼은 더 이상 휴먼으로 분류될 수 없는존재로서 물리적·정신적 능력이 우리 인간 능력을 뛰어넘는 초능력형 인간을 의미한다.      


포스트휴먼은 과거나 현재의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지 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질병과 노화에 훨씬 더 내성이 있다. 포스트휴먼의 가장 쉬운 예로는 슈퍼인간과 사이보그를 예로 들 수 있다.     


슈퍼인간은 유전공학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생식세포에서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를 제거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지능이나 외모를 개량하는 유전자를 보강하게 되면 소위 말하자면 맞춤아기(designer baby)가 생산될 수 있다.

정말 2030년대 이후에 이렇게 설계대로 만들어진 주문형 아기가 출현하면 유전자가 보강된 슈퍼인간과 그렇지 못한 자연인간으로 사회계층이 양극화될 수 있다. 정말 영화 "가타카" 에서 보던 일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식으로 슈퍼인간은 자연 인간과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하여 그 자손을 퍼뜨려 결국 현생인류와 유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종인 포스트 휴먼종 으로 진화해 갈 수 있다.     


미래인류의 두 번째 형태는 사이보그이다. 사이보그는 기계와 유기체의 합성물을 뜻한다.

즉 말해서 과학기술로 몸과 마음의 기능을 개선시킨 사람들, 이를테면 인공장기를 갖거나 신경보철을 한 사람들이 사이보그에 해당 한다. 의수나 의족을 한 장애인들도 그렇게 분류될 수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사이보그라 할 때는 인공지능과 연결된 사람을 뜻한다고 본다.          


암튼 우리가 포스트휴먼을 말할 때 우리는 대체로 두 가지를 상상한다.


인간이 테크놀로지를 통해 또는 테크놀로지와 결합하여 전통적인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인간이 창조한 인공적인 존재가 마침내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과 가까워지는 것을 포함한다.     


많은 로봇공학자들이 인간형 로봇을 개발하여 인간과 로봇이 상호작용하는 시나리오를 구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어떠한 마음의 대비나 선택이 필요할 지! 각자가 생각해보고 인간에게 더 나은 선택이 되기만을 바란다. 목적은 인간이되 도구로서 잘 사용되는 과학기술의 결과물들이 되기만을 바라면서 짧게 어설퍼게 살펴 본 인공지능 AI에 대한 소고를 마친다.




Ps : 이상 AI 시리즈는 내가 뭘 알아서 알고나서 쓴 게 아니라 뒤 늦게나마 이걸 알아야한다는 단순한 의무감으로 써 본 글이다.
뉴스에서 날마다 새로운 인공지능 에이아이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는 지금 2023년 12월 12일 이 시대에






포스팅을 마치고 다시 뭔가 미진하여 찾아보다 좋은 관점이 돋보이는 책을 발견했다. 일단 지금 읽지는 않아도 책서평을 가져와 본다. --- > 포스트휴먼이 온다 (이종관 저)               


인간은 포스트휴먼이 될 것인가?

‘트랜스휴머니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포스트휴먼의 개념적 윤곽은 1998년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이 「트랜스휴머니스트 선언」에서 말한 내용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응용이성을 통하여, 다시 말해서 노화를 제거하고 인간의 지적, 신체적, 심리적 능력을 대폭 향시키는데 두루 이용될 수 있는 기술의 개발을 통하여 인간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가능성과 희망을 높이는 지적이고 문화적인 운동이다.” 한마디로 ‘트랜스휴먼’ 또는 ‘포스트휴먼’이란 첨단 기술을 통해 성능이 향상된 인간을 가리키며, 트랜스휴머니즘은 이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넓히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에 숨겨진 유물론적 환원주의와 기능주의의 문제


 저자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유물론적 환원주의’와 ‘기능주의’라는 두 가지 결정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설명한다.     

유물론적 환원주의는 인간 두뇌의 기능을 물질로 환원하여 재구성하려는 시도로서, 뇌과학이나 나노기술의 철학적 바탕을 이룬다. 그러나 이 입장은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의 체계를 물질로 환원함으로써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화폐를 그 물질적 기반인 종이로 환원할 수 없듯이 지능이나 의식 역시 뇌세포나 반도체라는 매체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기능주의는 지능이 물질적 기반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일종의 프로그램이라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지능을 ‘몸’과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기능으로 본다는 데 오류가 있다. 인간의 지능이란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행동양식에 따라 가변적이고 지향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몸을 실체적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몸에 고유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결국 몸이 구현하는 지능과 반도체의 지능은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상과 같은 입장에서 인공지능 내지 인공생명 기술이 말하는 지능과 생명의 완전한 재현이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능과 생명은 단순히 탄소라는 물질에 기초하거나 그것으로 환원할 수 있는 기능이 아니라, 생명체로 활동함으로써 자신의 환경을 구성하고 통일된 의미 체계로 재조직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과 도구,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깊이 탐구했던 하이데거를 통해 이러한 논의를 심도 깊게 펼쳐간다.     


아이패드, 가상현실, 3DTV, 구글 글래스의 가능성과 한계   

  

저자는 우선 아이패드를 인간이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도구의 의미를 잘 구현한 기기로 평가한다. 도구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인간에게 밀착된 기기로서 도구의 존재방식을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가상현실이나 3DTV는 인간의 지각을 교란함으로써 의식을 파괴하는 위험성이 있다. 그것들은 사용자의 눈과 몸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그의 지각에 개입함으로써 실재보다 나은 모사현실을 제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각은 단순히 데이터로 환산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을 교란할 때 인간의 경험세계는 무너져버릴 수 있음을 경고한다. 

구글 글래스와 같은 웨어러블 컴퓨터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지각과 행동은 입출력되는 데이터들이 아니라, 지각되는 세상을 지각과 동시에 구성해내는 적극적 활동이다. 그러나 구글 글래스는 인간의 눈과 몸을 단순한 렌즈나 기계적 구성요소로 간주함으로써 인간-환경 간의 상호작용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가상현실과 웨어러블 컴퓨터 등의 미래 기술을 분석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지각과 행동이 매우 종합적이면서도 적극적 지향성을 갖는 존재양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지각을 통해 과거-미래의 시간성을 통일해 나가고, 주변 세계를 구성하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창출해가는 고유한 존재 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저자는 하이데거, 후설, 메를로퐁티 등 현상학자들의 인간 존재론과 지각이론을 참조함으로써 인간의 존재양식을 뚜렷하게 밝혀내고 있다.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디지털 경제     


트랜스휴머니즘의 비전은 인간 성능의 개조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사회적 활동 전반을 재구성하는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초지능(superintelligence)과 함께 초연결(hyperconnectivity)의 개념은 사물인터넷 기술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과 사물을 언제나 망에 접속시킴으로써 사회와 환경을 전면적으로 재편하려 한다. 이런 초연결이 IT(information technology) 또는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로 불리는 네트워킹 기술에서 시작된 것은 당연하다. IT기술은 특히 금융을 중심으로 한 현대 경제체제에서 위력을 발휘하며 위험과 가능성을 동시에 열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한마디로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경제 성장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 내용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존재양식을 가능케 하는 ‘일’과 ‘창의성’을 고갈시키는 방식의 4차 산업혁명이 아닌, 인공지능과 인간의 협업을 근간으로 하는 적응형 자동화(adaptive automation)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시간 나시는 분들은 이런저런 영상을 함 보시기 바란다 ㅎㅎ


 https://youtu.be/3R7ys0mEmaI?si=hCl_caCKqMhjK57R


https://youtu.be/U3ZO8ysn8mQ?si=t-Ue9223zGonf8Xu



엉여공부에도 좋은 ㅎㅎㅎ

 https://youtu.be/Xr2G0kSYRmM?si=h4-SCIi065yZ4Vr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