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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수도 보르도

프랑스 한 달 살기로 여기도 괜찮겠네

by 김별



보르도 여행과 잊지 못할 호스트이야기


나는 여행할 때 항상 이전 여행지의 추억을 모두 그곳에 비우고 떠났다. 다음 여행에서 새로운 경험과 만남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위함이었다. 사진 정리나 감사 인사 등, 이전 여행지에서 마무리할 모든 것을 마친 뒤 마음과 짐을 가볍게 하여 다음 목적지로 향하였다.

20대 5년을 보냈던 툴루즈와 다정했던 서바스 가족과의 작별은 아쉬웠지만, 보르도로 향하는 길에는 다시 설렘이 가득했다. 그리 멀지 않은 두 도시인데도 여태껏 보르도를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이 또한 인연이 닿아야 하는 여행의 섭리려니 생각하였다.


KakaoTalk_20251111_072037624_05.jpg 생 안드레아 대성당과 고풍스러운 보르도 건물들



예기치 못한 환대, 샹탈과의 만남


사실 보르도 호스트를 구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보통은 몇 주 전부터 연락을 해야 하는데, 툴루즈에 머무르던 중 이삼일 전에야 부랴부랴 알아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디종에서 만난 장에게 부탁하였으나 쉽지 않다는 소식에 호텔행을 각오하던 찰나, 툴루즈 호스트 피에르로부터 보르도의 샹탈이 2박 3일 동안 호스트를 해주겠다는 반가운 소식이 도착했다.

그리고 샹탈과 통화 후 픽업 장소까지 문자로 안내받았을 때, 어마어마한 짐가방을 들고 다니던 우리에게는 그것 또한 감동이었다. 샹탈은 "Kim, 기차역에서 트램 C선을 타고 뮈사르에서 내리세요. 그곳이 제가 주차하기 편한 곳이니 미리 기다리고 있을게요"라고 말해줬고, 약속 장소에 내리니 그녀는 10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떠나올 때는 역까지 다시 우릴 태워주었다.


친구 같던 그녀, 샹탈의 이야기

KakaoTalk_20251111_072037624.jpg 샹탈집과 그녀가 해 준 라클레트 요리

샹탈은 59년생인데 사회복지사 일을 마치고 은퇴하였다. 가까이 사는 딸이 자주 방문을 하고 있고 나중에 말한 바로는 남편과는 일찍 별거하였다. 딸이 사춘기 시절 성장통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서로 다투기는 해도 결코 오래가지는 않는다며 모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딸은 태국에 1년 거주하였고 일본 만화를 좋아하여 일본어도 공부한 아가씨였다. 전에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음에도 지금은 새로 시작한 버스 기사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 하였다. 야간운전이 힘들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혼자 일하는 시간을 좋아해서 괜찮고, 야간 근무라고 특별히 위험한 건 없어요"라고 담담히 답하였다.


싱글인 샹탈과 나는 유난히 대화가 잘 통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많이 웃었다. 내가 왜 이렇게 대화가 편할까 궁금해하자, 샹탈은 "서로에게 열려 있고 신뢰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말해주었다. 이에 내 나름대로 샹탈을 분석해 보니, 샹탈은 독일인의 엄격함이나 라틴계의 수다스러움보다는 프랑스인 특유의 쿨하고 소탈한 면에다 마음까지 넓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본가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18살에 보르도로 와서 공부한 뒤,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을 돕는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최근에는 20년 전 환자에게서 연락이 와서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손자가 의사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이전 환자는 그녀의 도움에 감사하다는 말을 했는데 샹탈은 자신이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도 기억해 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녀가 서바스 회원이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전부터 서바스 정신인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인사치레가 아니라, 그녀가 그간 살면서 베풀어온 친절에 응답하고 싶어서라도 한국에 꼭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샹탈의 집은 보르도 근교의 크지 않은 단독주택으로, 작은 마당이 있고 들어서면 왼편이 거실이고 그다음이 작은 주방이다. 그리고 오른편에 그녀의 침실과 딸이 오면 쓰는 방, 그리고 서재가 있었다. 우리는 좁은 방보다도 넓은 거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큰 짐가방을 펼쳐놓기 좋고 피아노도 있는 거실 겸 다이닝 룸이었는데 식탁이 가운데 있었다. 거실용 소파는 펼치면 침대가 되기에 그걸 사용했다.


불편할 것이라 생각했던 소파 침대에서도 잠을 잘 잤다. 무엇보다 공간이 넓어 큰 여행용 가방과 나머지 가방들을 펼쳐놓기 편하였다. 남편과 나는 이번 여행에서 '짐 싸기의 오류'라는 교훈을 얻었다. 꼭 필요한 얇은 내의나 외투 대신 한 번도 입지 않은 얇은 옷과 불필요한 전자제품, 남편의 카메라 가방까지 더해져 짐이 너무나 무겁고 부피가 컸다. 여러 교통수단을 갈아타며 이동하느라 고생했던 만큼, 다음 여행부터는 꼭 수정해야 할 중요한 피드백을 얻은 셈이었다.


잊지 못할 저녁 식사와 유쾌한 티키타카


샹탈은 우리가 도착한 날 점심부터 미리 준비해 둔 치킨요리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그래서 저녁은 내가 한국 요리를 해주겠다며 같이 시장을 본 뒤 제육볶음을 해주었다. 샹탈이 집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는 날이라 그녀의 피아노 선생님인 친구도 함께 먹었는데 처음 맛본 매콤한 오이무침과 쌈 싸 먹는 제육볶음을 모두 좋아했다. 샹탈은 내가 떠나온 뒤 남은 음식을 친구와 함께 먹었는데 너무 맛있다며 레시피를 달라고 하였기에 나는 곧바로 왓츠앱으로 보내주었다.


*제육볶음 레시피

고기를 잘게 썰어 설탕 약간과 버무려 준다. 다진 마늘과 피시 소스로 간을 하고, 잘게 썬 양파를 넣어 함께 버무리면 좋다. 그다음 고춧가루나 매운 소스를 조금 첨가하여 다시 버무린다. 미리 양념에 재워 두었다가 30분 후, 프라이팬에 센 불에서 시작해 불을 조절하며 뒤적이면서 잘 익혀준다. 준비해 둔 상추에 싸서 맛있게 먹으면 된다.


다음 날 저녁, 남편과 내가 보르도 시내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니 샹탈이 미리 저녁 식사를 준비해 두었다. 번거로운 특별 요리 도구와 치즈까지 준비해 1년에 두어 번 정도만 한다는 * '라클레트' 요리를 해주었다. 샹탈은 감자도 예쁜 걸 사려고 일부러 근처 시장에 다녀왔다며 웃었다. 우리가 치즈를 녹여 먹는 라클레트를 재밌게 해 먹고 있으니 피곤해서 자고 있던 딸이 나와서 합류하였다. 딸이 이 요리를 정말 좋아한다며 맛있게 먹는 딸을 보며 샹탈은 미소를 지었다.


* 라클레트(raclette)는 동명의 치즈인 라클레트를 녹여 감자 등을 찍어 먹는 음식으로, 스위스, 프랑스에서 즐겨 먹는다. 프랑스어 "라클레트(raclette)"는 "긁다"를 뜻하는 프랑스어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반 경질 치즈를 반으로 갈라, 자른 면을 전열기로 녹인 다음, 녹은 부분을 긁어낸 것에 감자 등을 찍어 먹는다.


식사 후 남편이 디종 행사에서 불렀던 동요 두 곡을 조에와 하모니카로 합주해보고 싶다고 말하자, 딸은 "20년 만이에요!" 하며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샹탈은 딸이 오랜만에 피아노 치는 모습을 흐뭇하게 영상으로 찍었고, 동요 노래가 너무 서정적이라며 좋아했다. 나는 두 모녀가 앞으로도 내내 알콩달콩 친구처럼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샹탈과 티키타카가 재밌었던 내용 중 하나를 소개한다. 내가 프랑스에는 365가지가 넘는 치즈가 있어 매일 바꿔 먹어도 될 정도라고 하자, 샹탈은 자기 아버지도 우유가 남아돌아 버리다가 나중에 치즈를 만들었다며, 프랑스 치즈는 시중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을 거라고 말해 함께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대대로 보르도 근교에서 살아온 조상들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프랑스에는 대혁명 이전에는 기록된 가계도인 족보도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부모들은 소작농의 삶을 이어갔는데, 자신이 자랄 때만 해도 지주에게 소출의 50% 이상을 바쳤다는 이야기에 나는 기가 막혔다. "아니, 대혁명의 나라에서 그건 너무 심하지 않나?" 하며 믿기지 않는다고 하자, 샹탈은 웃으며 "왜? 빅토르 위고의 나라? <레미제라블> 생각나?"라고 반응하였다.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그녀의 말에 우리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이 바로 이심전심일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그녀와 나는 코드가 잘 맞았다.


와인의 수도, 보르도를 거닐다


KakaoTalk_20251111_072037624_01.jpg 널찍한 도로, 거리와 잘 생긴 거리의 악사


KakaoTalk_20251111_072037624_02.jpg Place de la Bourse의 물의 거울(물에 반사시키는 건물이란 단순한 아이디어로 도시의 명소가 된 케이스)
KakaoTalk_20251111_072037624_03.jpg 와인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와인박물관과 맛있었던 로마식 피자

보르도는 내가 살았던 툴루즈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세계 와인의 수도'답게 시원하게 뻗은 큰 도로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도심까지 연결된 트램 교통망은 뭔가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었는데, 실제로 교통수단과 교역은 바다와 강을 끼고 있는 보르도의 핵심 포인트라고 할 수 있었다. 곳곳에 부의 향기가 느껴지는 부티크와 숍이 많았다. 예를 들면, 여인들의 란제리, 속옷, 프랑스 망사 스타킹을 신은 마네킹들이 보여주는 쇼윈도의 모습들이다.


보르도 와인 박물관을 가서 와인과 교역의 역사도 훑어보았다. 깊이 공부를 해야 할 정도로 자세하고 방대한 내용들에 놀랐다. 나는 여행하면서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은 곳을 미리 점찍어두는 편인데, 남편에게 툴루즈와 보르도 중 어디를 선택하겠냐고 물으니 남편은 툴루즈, 나는 보르도를 택하였다. 탁 트인 공간을 선호하는 내게는 같은 가론 강이지만, 넓고 시원하게 재정비된 보르도 시의 강변 풍경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었다.

KakaoTalk_20251111_072037624_04.jpg 가론강변에서 피크닉 하는 사람들과 산책길


친구처럼 친밀하고 따뜻했던 보르도 호스트 샹탈, 그리고 유서 깊은 와인의 도시 보르도를 잊지 못할 것이었다. 보르도를 떠나며, 샹탈을 소개해 준 장에게 짧은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Jean, 당신 덕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보르도라는 도시를 발견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그러니 언젠가 프랑스에 있는 친구들이
한국에 오게 된다면
저 또한 두 팔 벌려 환영하겠습니다."
** Kim 드림


이 기사는 오 마이뉴스에도 채택되었습니다~^^

- 프랑스 한 달 살기로 여기도 괜찮겠네 : https://omn.kr/2g022


PS:


* 짐 싸기 팁 몇 가지
가장 비중이 큰 옷은 돌려 입기와
겹쳐 입기로 최대한 양을 줄인다.
옷의 수량은 줄이고 가장 부피가 큰 외투를 입고 떠난다.
얇은 티셔츠, 카디건, 가벼운 외투등
두께가 다른 옷들을 여러 벌 챙겨
겹쳐 입으면 어떤 날씨에도 대응할 수 있다.
색상은 기본 무채색 옷 위주로 50% 정도 챙기고,
나머지 50%는 밝은 색으로 준비하면
적은 옷으로도 다양한 코디가 가능하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모든 옷은 돌돌 말아서 넣거나,
의류 압축팩을 사용하면 부피를 확 줄일 수 있다.
미용, 세안용품은 멀티 아이템으로
샴푸와 린스 올인원 제품이나 고체 비누 같은 걸
활용하면 부피도 줄고 훨씬 간편하다.
그 밖에 화장품은 소분하여 넣거나
샘플 & 일회용품을 더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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