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도 저무는 11월의 마지막 날
재작년 큰 수술 후 나는 매번 정기체크를 하러 다닌다. 그리고 가는 김에 큰 아들도 만나고 결혼한 작은 아들 내외도 만날 겸 길을 나섰다.
올 가을은 시월 한달을 프랑스에서 보냈기에 며칠 전 비바람에 예쁜 단풍이 다 지지 않길 바랬다.
운전하던 남편이 무지개가 떴다~!기에 사진에 담았다.
서울에서 내려와 혼자 지내는 아산 큰 아들집은 지리산 시골집에 이어 내게 세 번째 안식처다.
이튿날 새벽 용인 S병원에서 채혈과 CT 촬영을 마쳤다. 피검사 결과를 기다린 끝에 주치의 김박사님을 만났다. 꼼꼼히 검사 결과를 확인하시곤 "건강하십니다"라는 말씀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나를 수술하신 김박사님은 우리나라 대장암 부분으로는 첫째로 꼽을 수 있는 분이시다. 입원 당시 주말에도 내원하셔서 환자를 돌보는 모습에서 히포크라테스적 정신이 느껴졌다.
검진 후 기분이 좋아진 나는 집에 있는 아들에게 나오라 해서 신정호로 갔다. 엄마가 기분이 좋아서 쏠게~하며 00하우스로 갔다. 검사 때문에 아침도 굶은 나는 이거 저거 시켜 놓고 먹으려는데 아들 표정이 밝지 않았다.
붉은단풍과 빨간 산수유 열매
먹고 호수 한 바퀴를 하는데 단풍이 마지막 열정의 자태를 뽐낸다. 특히 산수유 빨간 열매가 탐스럽게 빼곡히 달려있어 어릴 적 추억을 생각하며 몇 개 따 먹어보았다. 새콤한 미각이 나를 어느새 어린시절로 데려다 준다.
신정호 호수가를 돌며 11월 막 바지에 가을을 만끽한다.
마지막 붉은 울음을 토하듯...
떨어진 낙화들....
반 바퀴를 돌 무렵 아들이 ‘ 옴마, 사실 아까 점심 안 먹으려다 엄마 기분 맞춰주려고 먹긴 했는데 속이 안 좋다’ 한다. 나는 깜짝 놀라 왜 그러냐니까 얼마 전부터 가슴 중앙이 꽉 막힌듯 답답하고 아픈게 이삼 주 되었다 한다.
나는 왜 진작 말 안했냐며 남편에게 말하니 당장 병원가자 한다. 아들은 안 그래도 요즘 준 의사격인 AI한테 물어봤는데 역류성 식도염 일 수 있으니 약국가서 약 사먹으면 된다 한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우려에 일단 가까운 내과에 갔더니 식도염 으로 진단하고 약을 처방해주었다. 어쨌든 약 복용과 식단 조절로 관리하며 조심하기로 했고 요즘 운동부족이었던 아들에게 경각심을 준 계기가 되었으니 감사했다.
약 먹고 금새 나은 것 같은 아들이랑 아산 농협 마트 ‘이순신점’을 갔다. 새로 생긴 곳인데 엄청 넓다.
다음날 오는 둘째 내외를 위해 장을 보며 매장안을 이러 저리 걸은 덕분에 운동 하루 복용치 만보를 넘어 일만 오천보를 달성했다.
둘째는 이튿날 서울에서 기차로 천안아산역에 도착했다. "저녁에 고기 구울 테니 점심 먹을 곳은 알아서 찾으라" 했더니, 차 안에서 도착 시간에 맞춰 '육회 방앗간' 예약을 했다. 새로 짠 참기름과 들깨가루로 고소하고 담백한 육회와 비빔밥 맛이 깔끔했다.
점심을 먹고 둘째는 '빵 돌가마'에서 시그니처 빵을 사겠다고 했다. 지난번의 긴 줄을 생각해 내키지 않았지만, 이번엔 줄이 짧아 편하게 빵을 고를 수 있었다. 대전의 성심당, 군산의 이성당과 함께 아산 뚜쥬르 빵 돌가마도 유명해 며칠 동안 빵순이인 나는 빵으로 배 부르게 생겼다.
빵 돌가마에서 양손 가득 빵을 사고...
아산 곡교촌은 은행나무길로 유명하다. 작년처럼 눈부신 풍경은 아니었지만, 바닥에 깔린 은행잎과 나목 사이로 걷는 마음은 즐거웠다.
30대로 접어들면서 살이 찌는 두 아들에게 살 빼라 잔소리를 하는데 그래도 이제 아빠보다 듬직한 두 어깨들을 바라보며 뒤에서 걸으니 마음은 뿌듯하기만 했다. "점심 칼로리 걷자!"며 산책 후 집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잎이 남은 몇 그루
은행 황금빛 주단
그림자도 예쁘고
인생은 타이밍~♡
집에 와 쌀을 불리고 쌈채소와 딸기를 씻고 잡채 재료를 준비했다.
큰 아들이 고른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가족이 함께 앉아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특히 두 아들과 며느리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삼남매처럼 보기 좋았다.
일년에 열 번도 다 같이 모이기 힘든 자리인데, 그저 서로가 편하고 좋으면 최상이다.
나는 프랑스식으로 아뻬리티프로 치즈와 식전주, 사 온 빵을 좀 내놓았더니 잘 먹는다.
다음날 일정이 있어 일박을 못하고 저녁 먹고 가야 하는 둘째네를 위해서 서둘러 에어프라이에 삼겹살을 굽고 잡채를 완성하고 준비해둔 두 종류 국을 데웠다.
둘째는 일단 엄마표 잡채가 맛있다 하고 삼합으로 준비한 국내산 홍어랑 잘 구워진 두툼한 삼겹살을 먹으며 좋아한다. 간에 좋다는 다슬기 국과 아귀탕을 시원하게 끓였지만 국을 원래도 좋아하지 않는 둘째는 세 숟갈 이상 먹지 않는다. 그러고는 더 이상 못 먹겠다며 밥 숟갈을 놓는다.
큰 아들도 아까 식전주랑 먹은 걸로 들어갈 배가 없다며 ‘옴마, 한국식은 코스로 미리 무얼 먹으면 안 되고 그냥 다 차려놓고 한꺼번에 먹어야 해요’ 한다.
나는 좀 서운해서 그래도 조금만 더 먹으면 좋을 텐데 하니 엄마는 맨날 살 빼라면서도 한 숟갈 더 먹으라 한다며 웃는다.
나는 엄마 앞에서는 맛있게 먹고 엄마 안 볼 때 절제하고 운동 하는게 진정한 효자라 역설한다.
요즘 '먹는 것과 건강'에 예민해졌다. 그래서 가려 먹고, 적당히 먹는 습관이 생겼지만, 무엇보다 가족이 무탈함이 감사하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고, 건강할 수 있음이 행복한 요즘이다. 특히 사려 깊은 며느리에게 감사함이 크다. 나 처럼 말하고 싶은 데로 말하는 시엄마보다 며느리는 사돈댁을 닮아 언행이 진중하다.
아침에 읽은 브런치 글에서 오늘의 글제를 따 왔다. ‘초원의 빛’님 필명처럼 순화되고 절제된 언어와 캘리그라피가 좋아서 탈무드의 인용구와 함께 허락을 받고 가져왔다.
감사하는 만큼
행복하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는
날마다 그 감사를 통해서
더 성장하고
배우는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