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꼭 다녀야하는 곳일까? 학교생활 트라우마
강의를 다니고 봉사를 한다.
집안에 혼자 있는 아들을 두고 다른 아이들을 가르친다. 다른 아이들에게 '나-전달법'으로 표현하는 말하기와 소설 쓰기의 밑그림을 가르친다. 진로 수업을 가서 '강점 찾기'와 '적성, 가치관 찾기' 테스트와 해석을 해준다. '스트레스 관리' 수업을 한다.
무언가에 몰입하면 매몰되는 성격 때문에 강의 준비를 잘해서 그런지, 이 도시에서 강의를 시작한 지 2년도 안되어 제법 강의가 많이 들어온다. 만족도점수도 좋다. 그래도 가슴 한편은 늘 답답하다.
'내 아들의 진로도 찾아주지 못하면서...'
자괴감이 든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그 아이와 붙어있어서 나아진 게 있었나? 함께 절벽으로 내달리는 거지. 나라도 살아야지. 아니, 내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차라리 낫겠지. 돈이라도 모아놔야지.'
스스로 면죄부를 준다.
어느 날, 뜬금없이 아들이
- 엄마는 나쁜 엄마는 아니지만, 좋은 엄마도 아니었어.
- 갑자기?
- 아니, 또 어떤 생각이 나서...
아들의 과거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아들은 꿈을 꾸거나, 심심하거나, 유튜브에서 무엇을 봤거나, 나무위키에서 무엇을 읽으면 과거 얘기를 꺼내곤 한다. 다만 예전엔 분노를 담아서 같이 죽자, 였는데 지금은 담담하게 꺼내놓는 게, 많이 좋아졌다는 증거다. 그래도 나는 아들의 과거 얘기를 듣는 게 여전히 괴롭다.
- 어떤 생각이 났는데?
- 일단, 나를 좀 더 일찍 자퇴시키지 않은 거. 지금도 나를 괴롭힌 아이에게 복수하는 꿈을 꿔. 가끔은 죽이기도 해. 근데 꿈이라도 너무 잔인하고 무서워.
침착하자.
나는 꿈이라도 아들이 누구를 죽였다고 하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찰나의 순간에 뉴스에 나오는 일련의 참혹한 사건들이 지나간다.
- 아무리 꿈이라도 무서웠구나.
- 한편으론 속이 시원했어. 근데 그 XX가 나를 괴롭힌 게 아니라 아빠의 뺨을 때려서 내가 그런 거야. 아빠가 꿈에 왜 나왔는지 모르겠어.
아들이 자폐스펙트럼인지 몰랐을 때, 강박증이 있었지만 동생에 대한 강박이었기 때문에 그 강박을 이해해주지 못했다. 그저 동생에 대한 질투라고 생각했다. 아들이 동생인 서영이에게 작은 소리도 내지 말 것, 화장실에 오래 있지 말 것, 소파에 앉을 때는 발에 담요를 덮고 앉을 것(동생의 발이 자기를 할퀴는 것 같다는 강박)... 등등 동생의 일상에 사사건건 간섭을 하면서, 남편은 역지사지가 안 되는 아들에게 화를 내고 급기야 손찌검을 했다.
나는 아들이 병이라고, 이해해 주라고 남편에게 그리고 어린 딸에게 이해를 강요했다. 그 당시 서영이는 초등 2학년,생일이 12월생이니까 만으로 7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은 더더욱 아들을 많이 혼냈고, 아들도 남편을 미워했다.
하지만 딸을 분가시키고 남편은 아들에게 참 잘했다. 병이라는 걸 인지했고(아들이 극단으로 치닫고 난 후에야 비로소) 지난 과거를 사과했고, 공감하는 대화를 시도했다.
- 인간에게 꿈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분출구래. 만약 꿈을 꾸지 않는다면 모두 정신병에 걸릴 거라고 어디서 읽은 것 같아. 너의 무의식이 꿈에 나오고 그걸 다른 방식으로 풀면서 네가 억압에서 해소되는 게 아닐까? 그런 꿈을 꾸는 게 아주 나쁜 건 아닌 것 같아.
- 근데 요즘은 꿈을 너무 자주 꿔. 그리고 너무 현실 같아서 무서워. 카페인을 너무 마셔서 그런가? 카페인이 깊은 잠을 못 자게 해서 꿈을 많이 꾼대.
- 그럼 카페인을 줄여보자.
아들은 자폐스펙트럼장애 아이들에게 처방하는 항우울제와 충동조절제를 같이 복용하고 있다. 그 충동조절제가 기분을 다운시켜서 아들은 의욕이 안 난다고 에너지음료를 먹기 시작했는데, 요즘 용량이 점점 늘어났다.
- 아무튼 엄마는 좋은 엄마는 아니야. 좋은 엄마인척 하지 말라고.
- 그래서... 또 그 애기야? 자퇴 얘기?
아들은 학교생활에 관련된 꿈을 꾸면 자퇴애기를 꺼냈고 나에게 화가난다.
- 어.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나를 학교에 보낸 게 너무 화가 나. 나에게 학교는 지옥 그 자체였어. 그래서 엄마는 마치 좋은 엄마인척 하지만 나쁜 엄마야. 내 10년의 세월을 엄마가 힘들게 한 거야.
그 당시엔 학교에 가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고 항변하기엔 양심에 찔리는 게 있다.
사실 홈스쿨링을 해도 되었다.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자폐 특성을 눈치챘고 아이들과 못 어울리는 걸, 눈치가 없는 걸 알았음에도, 나는 홈스쿨링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내 일을 하고 싶었으니까. 내 안의 성취욕구가 너무나 강열했으니까.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아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만 할 자신도, 정보력도 없었으니까. 그 세계, 내가 가보지 않은 세계가 너무 두려웠으니까.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엄마인 나의 뇌도 산만해서 조직적으로 무얼 못했으니까.
홈스쿨링, 대안학교, 이 단어는 늘 나의 죄책감의 시발점이고 후회의 키워드다.
좀 더 용기를 냈다면, 좀 더 정보력이 있는 엄마였다면, 남편이 좀 더 관심을 가져줬더라면.... 달라졌을까?
- 맞아. 엄마가 좋은 엄마는 아니지. 그래도 나쁜 엄마는 아니라서 좀 다행이네.
- 엄마가 지금은 좋은 엄마야. 근데 엄마가 좋은 엄마라고 인정하며 사는 건 싫어. 그냥 그뿐이야.
아들은 '자퇴', '학교생활'에 갇혀서 그 이전 기억을 못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죄를.
아들은 아마도 무의식 속에서 나를 용서하기가 힘든 것일 수도 있다.
예전에 심리학 책을 보면서 나 같은 엄마가 가장 나쁜 엄마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과 마주했고, 정신을 차리고 변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내가 저지른 잘못은 씻겨지지 않는다. 아이의 뇌 속에 각인되어 있다.
부모가 불안이 높으면 아이를 칼날 위에 올려놓는다.
아이가 어떤 선택을 해도 부모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는 늘 칼날 위에 선 듯 불안하다. 그래도 엄마를 미워할 수 없다. 세상에서 의지할 단 한 사람. 엄마라는 존재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이 부정과 긍정사이에서 아이는 칼날 위에 선 듯 불안하다.
나는 왜 불안했을까?
이건 내가 내 아버지에게 받은 내 어린 시절의 상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