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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일없이사는사람 Jan 11. 2024

엄마가 아팠다 (1/3)

엄마가 아파서 가족 모두 힘들었지만 잘 버티고 엄마도 나아지셨다는 이야기


2023년은 개인적으로 쉬어가는 한 해였다.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고 쉬면서 개인적으로 하고 싶었던 일들을 했다. 한 해가 끝나갈 무렵 올 해도 큰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가나 싶을 때, 인생에서 정말 큰일이 생겼다. 브런치 닉네임도 내 염원을 담아 '별일없이사는사람'이라고 지었건만 별 일이 생기고야 만 것이다.



엄마가 아팠다.


다행스럽게도 이때까지 가족 중 누군가가 크게 아파 본 적은 없다. 나도 평생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11월 중순부터 12월 말일까지 약 한 달 반의 시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계시게 되었다. 그 중간에 큰 수술도 하셨다. 지금은 집에 돌아오셔서 회복 기간을 갖고 계신데 아직까지는 문제없이 잘 지내고 계신다. 


엄마가 아프면서 나도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비일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일단 가족이 많이 아프다는 사실 자체가 큰 번민과 고통이다. 남겨진 가족에 대한 걱정도 만만치 않다. 엄마를 간병하기 위해 약 2주간 병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비록 상황은 안 좋았지만 하루 종일 엄마 곁에서 오로지 엄마만 보면서 지낼 수 있었다. 여전히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고 나와는 마음이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엄마는 소중한 엄마다. 길고도 길었던 병원 생활부터 큰 수술을 하기까지 그 힘든 과정을 모두 이겨낸 엄마가 자랑스럽다. 


이 글은 병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며 환자 본인이 쓴 투병일지도 아니다. 큰 산을 몇 개 넘은 지금 약 두 달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작성했다. 병원 안에서의 시간은 병원 밖과는 다른 속도로 흘러가기에 정확히 며칠 몇 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록으로 남기고 싶기에 글로 써보기로 다짐했다. 






내가 나이가 들었다고 느낄 때는 언제일까. 매일 보는 자신의 모습에서는 딱히 큰 변화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좀 더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피곤함 자체는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하는 친구나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세월의 흐름은 부모님을 통해서 더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특히 평소 따로 살다 기념일이나 명절에 오래간만에 보게 되는 경우는 그 변화가 극심하게 다가온다. 더 작아지고 더 느려진 부모님을 볼 때 나도 엄마, 아빠도 나이가 들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된다.


더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올 것은 알고 있다. 다만 그때가 언제인지 아직 실감을 못할 뿐이다. 갑작스러운 연락은 11월의 어느 날 찾아왔다. 동생의 전화였다. 엄마가 몸이 안 좋아서 동네 병원에 진료받으러 갔다가 큰 병원으로 가는 게 낫겠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근처 대학병원으로 이동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단순 외래진료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급하게 입원을 하셨다고 했다. 


코로나 이전과는 다르게 요즘 병원은 보호자 관리를 매우 철저히 하고 있다. 상주 보호자는 전문 간병인 또는 가족 중에서 1명만 가능하다고 한다. 아빠가 곁에 계시며 의료진과 소통을 하시는 중이었다. 전화를 받은 시점에서는 내가 병원에 가도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집에 있는 나로서는 오로지 아버지나 동생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당일 퇴원은 안 될 것 같다는 이야기에 간단하게 짐을 챙겨서 병원으로 향했다. 나이 드신 아빠를 입원실 간이침대에서 주무시게 하고 싶지 않았고 편치 않은 마음으로 집에 있느니 내 눈으로 직접 엄마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런 일이 닥치고 보니 차가 없고 운전을 못하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것이나 시내로 나갈 때는 차가 없는 것이 오히려 낫기에 운전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 비상시국에서는 운전을 할 수 있으면 훨씬 좋다. 경기도에 위치한 병원은 내 집에서 자동차로 갈 경우 막히지 않으면 30분 거리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한 시간 30분이 걸린다. 



아픈 엄마 마주하기


병원 1층에서 보호자 등록을 하고 아버지와 교대하는 방식으로 입원 병동으로 올라갔다. 6인실은 꽉 차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기억하던 다인실은 침상이 좌우 여러 개 오픈되어 있고 가운데 벽에는 TV가 있어 드라마를 보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아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몇 년 만에 가보는 입원실은 각각의 침대 주위로 개별 커튼이 쳐져 있어서 다른 환자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커튼 안 쪽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이야기 소리 덕분에 누군가 있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엄마의 병상 번호가 적힌 커튼을 조심스럽게 열자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가 보였다. 한쪽 팔에는 링거액이 몇 개나 달려있었다. 엄마는 나를 알아보았지만 몇 마디 말을 하고는 다시 눈을 감으셨는데 열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간호사로부터 환자의 섭취량과 배설량 등 체크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짐을 풀었다. 침대 옆에 서랍장과 소형 냉장고가 있었다. 넓고 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필요한 것들은 개별로 마련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주위의 커튼 덕분에 더 좁아 보여서 답답하긴 했으나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는 훨씬 좋았다. 


엄마는 염증 수치가 높고 혈소판 수치가 낮았다. 탈수와 고온에 시달리고 계셨다. 며칠 후 피검사 결과 알게 되었지만 황색포도상구균에 의한 패혈증이었다. 최초에는 배탈이 난 것이라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심한 감기라고 생각했고 열에 의해 말이 어눌해지자 뇌경색을 의심했는데 결국 감염에 의한 패혈증이었다. 감염내과로 담당의가 정해졌다. 다행히 급성은 아니었고 쇼크 증상도 없었지만 패혈증 자체가 사망률이 높고 다른 장기 손상이 있을까봐 며칠간은 정말 가슴 졸이며 지냈던 것 같다.                                                                                                                                                                                                              

병원에 입원하기 며칠 전 산책하다 살짝 넘어졌다고 했는데 그게 이제야 통증이 오는지 엄마는 허리와 엉덩이가 아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침대 위에서 상반신을 일으키는 것도 매트리스를 세워야만 할 수 있었고 걷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저 누워서 잠을 자거나 아니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밥을 먹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 거동이 불편할 수는 있다. 그건 몸이 좋아지면 자연스레 해결되는 문제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제일 낯설었던 것은 평소와 다른 엄마의 모습이었다. 누구는 섬망 증상이라고 했고 누구는 열 때문에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도 했다. 가끔 엄마가 진지하게 나한테 하는 말이나 물어보는 질문이 정말 얼토당토않은 내용이었다. 마치 꿈에서나 가능한 그런 의식의 흐름에 따라 사고하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당연히 깜짝 놀라고 걱정이 된다. 하지만 티를 내진 않고 그냥 적당히 성의 있게 대답을 해주었다. 이런 모습이 24시간 내내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열이 내려가면서 빈도수가 적어지다가 나중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건네지는 말이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면 내가 알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큰 걱정거리는 엄마가 정신적으로 너무 약해져 있었다. 양이 얼마 되지 않는 병원 밥이라도 잘 먹어야 빨리 나을 텐데 단순히 맛 없다, 먹기 싫다는 이유로 밥을 거부하셨다. ‘아파서 입맛이 떨어지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도 어떻게든 엄마가 밥을 잘 드실 수 있도록 잘 달래서 먹였어야 했는데 너무 속상해서 짜증도 냈다. 내가 밥을 안 먹고 있을 때 평소의 엄마가 했을만한 잔소리를 내가 하고 있는 입장이 되어보니 진짜 우리 엄마가 많이 아프구나 실감이 났다. 이걸 예를 들어 역지사지로 얘기도 해봤지만 엄마는 고집불통, 먹히진 않았다. 결국 내 욕심은 내려놓고 식사량은 천천히 늘려가기로 하고 그나마 먹을 의욕이 나는 다른 간식거리, 과일, 요구르트 등을 사다 주며 음식물을 섭취하게끔 했다. 


그리고 음식 거부와 별개로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자주 했다. 딸이 병원에서 며칠 째 지내면서 생리현상 처리해주는 게 엄마로서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육체노동 그 자체가 힘들 뿐, 하기 싫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는데 말이다. 기저귀 갈고 몸 닦아주고 하는 건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다 해주었던 것이니 거꾸로 보답한다고 생각하면 못 할 일이 아니다. 내가 신경이 쓰였던 것은 그 일 자체의 완성도였을 뿐. 요령이 없다 보니 나도 쉽고 환자도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빙 둘러가는 느낌이어서 불안했다. 심지어 내 실수로 엄마를 불편하게 했던 일도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엄마가 몸을 움직이기 힘들다 보니 몸의 방향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바닥에 패드나 기저귀를 깔아넣고 교체했어야 했는데, 방향을 거꾸로 잡는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힘든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적도 있다. 왜 이렇게 센스가 없나 속으로 엄청 반성했었다. 


아무튼 T발 C인 딸 입장에서는 엄마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건 사태 해결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차라리 밥 한 숟가락 더 먹고 조금이라도 기운 내서 몸을 움직이는데 힘쓰는 것이 더 좋을 텐데. 미안하다고, 내가 너무 한심하다고, 한탄하며 축 처져 있는 엄마를 보는 게 오히려 내겐 더 스트레스였으니까. 자꾸 미안하다는 말에 대꾸할 말도 없고 해서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이 것도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냥 알았다 하고 넘겼으면 되는데 굳이 환자 상태로 진지하게 맞서 싸우려고 들었나 싶다. 안 그래도 아빠한테 엄마한테 너무 뭐라 그러지 말고 부드럽게 말해주라는 부탁을 받았음에도 (엄마, 아빠는 나를 완전 FM 꼰대로 생각하신다�) 이상적인 간병인은 못 된 모양이다. 



병원 생활에 적응하기


여하튼 이렇게 입원 후 일주일간은 엄마도 나도 병원 생활에 적응하느라 전쟁통 같았다. 나도 환자를 간병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이 많았고, 매일 병원 여기저기로 검사받으러 가는 엄마와 동행하며 상태를 기록하고, 거동이 힘든 엄마의 손발이 되어야 했으니까. 밤에도 약 두시간 간격으로 오셔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필요한 처치를 해주시는 간호사 분들에게 인사와 대화를 하고 다시 잠드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거기다 병원 밖에서 궁금해하며 연락 오는 다른 가족들과 친척들의 소통 창구까지 되어야 했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것이라면 병실 안이 워낙 덥고 건조하다 보니 더위를 많이 타는 나로서는 조금만 몸을 써도 덥고 땀나서 힘들었다는 것 정도. 왜 의료진들이 이 한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있는지 알 거 같았다. 나도 병실 안에서는 아예 반팔 셔츠와 편한 수면 바지를 입고 지냈다. 원래 상주 간병인은 외출 외박 금지다. 잠깐이라면 자리를 비울 순 있겠지만 엄마가 혼자 있을만한 상황이 되지 않으니 외출이나 외박을 하고 싶어도 못 했다. 제일 불편한 것이 씻기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샤워는 환자용 목욕실을 이용할 수는 있었다. 그래도 역시 편하게 오래 사용하기는 힘들고 머리 말릴 곳이 마땅히 없다는 점 등에서 자주 사용하게 되진 않았다. 그나마 며칠 있으면서 좀 마음을 놓았던 것이라면 병원 직원을 제외하고는 환자나 간병인이나 다들 꼬질꼬질하다는 것. 환자들이야 당연히 아프니 자주 씻지 못하고 간병인들도 역시나 환자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니 빠르게 화장실에서 세수와 양치 정도만 하고 오시는 것 같았다. 다들 초췌한 모습으로 있길래 나도 막판엔 다 내려놓고 편하게 있다 나왔다. 


아무튼 병원 생활에도 익숙해져감과 동시에 효과가 있는 항생제를 찾아 엄마를 괴롭히던 염증 증상은 호전이 되었고, 열도 떨어져서 점점 상태가 나아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헛소리 같은 것도 사라졌고 식욕도 돌아와서 병원식도 거의 남기지 않고 잘 드시게 되었다.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들에게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는지 커튼 너머로도 말을 걸어보기도 하셨다. 감염 위험 때문에 환자들 간의 친목은 금지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여럿 모여 있으면 어느 정도의 소통은 자연히 생기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엄마가 내향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엄마 집 근처에 사시는 동생뻘 되는 다른 환자분 전화번호도 땄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하긴 지루한 병원 생활에 이런 소소한 친목이라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버틸까 싶기도 하고. 상태가 아주 안 좋거나 크게 아프신 분들이 아니라면 중년 아줌마들이 모여있는 병실은 약간 목욕탕 분위기가 난다는 것도 알았다. 


넘어졌던 것의 여파로 추측되는 허리와 엉덩이 통증이 여전했지만 다행히 뼈에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물리치료실의 도움을 받아 재활 치료도 받았다. 엄마를 부축해서 처음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게 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물론 제자리 걸음 몇 번 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하셨지만 스스로 몸을 움직여서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엄마와는 다른 과로 입원을 하신 다양한 증세의 환자들이 있었다. 머리 수술을 하셨다던지, 아니면 척추 수술을 하셨다던지. 그분들도 고통에 많이 힘들어하셨지만 스스로 일어나서 직접 두 발로 걷고 돌아다니던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엄마도 내 발로 병원에 걸어 들어왔는데 자리에 누워 움직일 수 없게 된 상황 자체가 너무 어이없다고 한탄하셨다. 염증이 사라지고 다른 수치가 안정화된 상태에서 엄마가 스스로 몸을 가누며 움직일 수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가는데 꽤 시간이 걸린 셈이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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