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왜 이렇게 잘 속나

선동에 취약한 사회…자유민주주의가 위태로운 이유

by 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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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헌법 조문이 아무리 정교해도, 권력분립 장치가 아무리 촘촘해도, 그 체제를 떠받치는 마지막 기둥은 결국 시민 개개인의 판단력이다. 그런데 이 한국인들의 습성을 보라.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여론에 휩쓸린다. 방송과 언론이 던져주는 프레임에 그대로 선동된다. 권력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믿고 따르고 종용된다. 이 상태로는 자유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돌아갈 수가 없다.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이 똑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체제는 안에서부터 무너진다. 시민이 판단을 포기하는 순간, 국가는 늘 ‘관리’로 기운다. 관리가 일상이 되면, 자유는 문장으로만 남는다.


이 습성은 거창한 정치의 영역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일상에서부터 이미 훈련돼 있다. 한국인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무엇을 선택할 때 “내가 원하는가”보다 “남들도 하는가”를 먼저 확인하는 데 있다. 대중음악, 대중적 패션, 대중적인 외모, 대중적인 인테리어가 ‘취향’이 아니라 ‘정답’처럼 유통된다. 취향의 자유가 넓어진 시대처럼 보이지만, 실제 체감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 선택지가 늘어났는데도 선택은 더 획일화됐다.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설명을 요구받는다. “왜 굳이?”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이 질문은 겉으로는 호기심이지만, 실제로는 규범의 확인이다. ‘다르게 선택한 이유’를 납득시키라고 요구하는 사회에서, 선택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 선택은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서류가 된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바로 이 지점을 예리하게 찌른다. 자유를 위협하는 것은 국가 권력만이 아니다. 사회가 만들어내는 압력, 즉 ‘다수의 도덕’이 개인에게 가하는 강요가 더 위험할 수 있다. 법은 적어도 조문과 절차가 있다. 누가 무엇을 어겼는지, 어떤 절차로 판단하는지, 어디까지가 처벌인지가 적혀 있다. 반면 여론은 절차가 없다. 판단의 속도가 빠르고, 처벌은 비공식적이지만 잔인하다. 다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능력보다 태도가 먼저 의심받는다. “저 사람은 왜 저래?”라는 말은 곧 “저 사람은 위험해”라는 낙인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개인은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자유가 외부에서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접히는 방식이다. 총칼이 없어도 충분하다. 웃음과 조롱, 따돌림, 불이익 예고만으로도 사람은 자신을 줄인다.


다수의 취향이 규칙이 되는 순간, 사람들은 ‘판단’을 비용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판단은 귀찮다. 자료를 모아야 하고, 비교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판단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위험을 떠안는다. 반면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은 편하다. 사회가 대신 책임을 져주는 듯 보인다. 내가 실패해도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라고 변명할 구멍이 생긴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장기적으로 비싸다. 선택 근육이 퇴화한다. 자기 욕망이 무엇인지, 무엇에 기쁨을 느끼는지, 무엇이 싫은지조차 흐릿해진다. 개별성이 줄어들면 삶의 설계는 쉬워지지만, 그 쉬움은 남의 설계도를 베끼는 쉬움이다. 남의 설계도는 언제나 ‘평균’에 맞춰져 있고, 평균은 누구도 살리지 않는다. 평균은 다만 누구도 눈에 띄게 하지 않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다. ‘대중적인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대중성이 가치의 기준이 되는 순간이다. 많이 팔리면 좋은 것이라는 등식은 시장에서는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삶에서는 독이 된다. 많이 팔린다는 사실은 “다수가 선택했다”는 뜻이지 “내게도 최선이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성은 통계이고, 선호는 개별이다. 통계를 도덕으로 착각하면, 사회는 개인을 재료처럼 다루기 시작한다. 그 재료는 표준화된다. 표준화된 재료는 관리하기 쉽다. 관리하기 쉬운 인간은 통치하기 쉽다. 이때 자유민주주의는 겉으로는 유지될 수 있다. 선거도 치르고, 토론도 하는 듯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시민이 자기 판단을 잃은 상태에서의 자유민주주의는 껍데기다. 껍데기는 쉽게 갈라진다. 여론 한 번, 방송 한 번, 권력자의 한마디에 방향이 꺾인다.


밀의 『자유론』이 오늘에도 남는 이유는 이것이다. 자유는 단지 방해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자유는 내 삶의 지휘권을 내가 쥐는 상태이다. 그 지휘권을 위협하는 가장 흔한 적은 거대한 폭력이 아니라, “남들도 다 그래”라는 부드러운 압력이다. 사회가 개인을 바꾸는 방식은 늘 이렇게 시작됐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의 방어선은 거리의 시위나 제도의 개혁 이전에, 개인의 머릿속에서 세워져야 한다. “남들이 하는가”를 묻기 전에 “내가 왜 이걸 선택하는가”를 묻는 습관, 여론의 파도를 보기 전에 근거의 바닥을 확인하는 습관, 권위자의 말을 듣기 전에 반대의견을 한 번 더 듣는 습관. 이런 사소한 습관들이 쌓여야만, 자유민주주의는 건강한 체제로 남는다. 시민이 똑똑해야 한다는 말은 엘리트주의가 아니다. 자유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자기 방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는 ‘판단’이라는 비용을 치르는 사람들에게만,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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