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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결 Apr 10. 2023

가난한 부모, 가난한 아이

ㅤ대학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곧 수업이 시작될 강의실에 들어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나, 그들의 큰 목소리는 그곳에 있던 청중들로 하여금 듣기를 강요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했다. “나도 학점 높은데 부모님 때문에 장학금 못받아” 부모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못한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국가장학금을 비롯한 여러 시스템은 대부분 소득분위를 지원요건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 발언은 곧 그의 부모가 고소득자기에 장학금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전에 들은 바로는, 그의 아버지는 학원을 운영한다고 했다. 당시 그는 나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매달 수천 만원씩 벌어들인다고 소개했다. “용돈도 조금 받는데 너무 힘들다” 물론 그는 여가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제외하고 월세나 식비 따위의 생활비를 따로 받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덧붙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 집도 잘 사는 편은 아닌데 왜 장학금을 못 받지?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ㅤ그들이 그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 강의실 맨 뒷자리에는 한 아이가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나의 후배는, 때때로 주변 동기들에게 삶이 고달프다고 말했다. 그 아이는 복잡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조력을 받을 처지가 아니었고, 틈틈이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집에 돈을 부치고 생활비를 충당했다. 매주 강의가 있던 요일의 전날마다 그 아이는 약간 이른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을 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수업 중 졸음을 참지 못하고는 했다. 그는 단 한 번도 가난한 부모를 탓한 적이 없었다. 이따금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 아이는 깨어있었을까?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서기 전까지, 그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전직 서울시 교육감 곽노현은 “가난한 부모는 있어도 가난한 아이는 없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누구나 가능성의 부자입니다.” 어린 시절 나는 그 말씀이 참으로 멋지게 들렸다. 그런데  대학에 와보니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는 커서 가난한 어른이 되어있었다.

ㅤ화장실과 주방, 세탁기를 공용으로 사용하는, 월세 10만원 남짓의 쪽방에서 자취를 하던 선배는 종종 나에게 가난이 실존하는 모습을 설명해주었다. 선배는 술을 무척 잘 마셨다. 술을 잘 마시는 선배는 조금 취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주량이 약한 나는 맨정신으로 경청했다. 나는 그때 겨울철 온수가 나오지 않는 가정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목욕탕에 갈 수 없으면 끓인 물을 찬물에 섞어서 씻어야 했다. 약간 미지근한 물. 그마저도 추운 날씨에는 금방 식어버렸다. 그래서 훗날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 다중이용시설 중에서 이상하게도 목욕탕만 폐쇄되지 않은 이유를 듣고도 나는 조금밖에 놀라지 않았다. 사실 그 상황에서 목욕탕이 문을 닫지 않은 것은, 따뜻한 물을 원하는만큼 쓸 수 있는 사람한테만 이상한 일이었다. 선배는 자취를 시작하기 전까지 살면서 한번도 집에서 자신만의 독립된 공간 ― 자기 방을 가져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식구들은 해가 지면 이부자리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촘촘하게 누워서 잠을 청했다. 선배는 그밖에도 재미 없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ㅤ최근 소셜미디어에서 읽은 어떤 글은 “가난한 어떤 학부모가 싫다”라는 화자의 탄식으로 시작한다. 글쓴이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 사교육 없이 상위권에 들며 성실하고 착한 아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학부모가 그 아이를 대학에 보내지 않고 취업을 시키려 한다. 혹여나 자식이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이라도 하게 된다면 정부로부터 생활지원이 끊기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그 상황을 보고 있자니 답답함을 넘어 울음이 나온다고,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밝혔다. 글은 “가난해서 아이의 앞길을 막는 학부모가 싫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대체로 사람들은 부모를 비난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글에서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정보란, 가난을 배경으로 둔 똑똑하고 성실한 아이가 있고 부모는 그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취업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전부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단편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부족한 정보를 채우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 속의 빈 공간을 분노로 채우기에 조심스럽다.

ㅤ가난이 실존하는 방식을 직접 체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현실은 다르다. 욕실에 들어가 수도꼭지를 돌렸을 때 당연히 온수가 나오는 삶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해서 카페와 주점이 강제로 문을 닫는데도 목욕탕만 영업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현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취약계층에게는 한겨울 목욕탕에 갈 수 없는 현실이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가 유수한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아마도 그 아이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꽃피울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부모는 곤궁한 삶에 비추어 당장 정부로부터의 지원이 끊기는 현실을 상상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부모의 주장이 더 합리적이라거나 궁핍한 사람만이 빈곤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부모의 사고가 편협하다고 냉소하듯이, 가난한 자의 삶에 무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부모를 가난하게 만든 원인이 그들의 나태와 불성실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ㅤ전술한 것처럼 이야기의 부족한 부분은 상상으로 메꿔졌다. 그것은 짧게 기술된 서사의 공백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양의 분노와 경멸이었다. “제대로 된 직장도 없는데 수입이 생기면 정부로부터 지원이 끊길까봐 저러는 것이다”, “정부 지원금에 길들여진 노예와 다름이 없다”, “자식의 고혈을 쥐어짤 궁리만 하는 게 분명하다”, “자식한테 빌붙어먹을 생각밖에 없는 기생충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충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사실 부모는 근근이 먹고사는 형편에 도저히 대학생활을 지원할 수 없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댄 것은 아닐까?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을 가지든, 아니면 곧바로 돈을 많이 주는 곳에 취업하든 소득수준이 개선되면 정부의 지원은 끊길 것이다. 그런데도 대기업에 입사하면 ― 그것조차도 대학을 졸업한 이후의 일이며 확정적인 미래가 아닌데 ― 지원받을 자격이 박탈되므로 대학에 진학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허황될 뿐더러 모순적이다. 부모가 왜 그런 상식적이지 않은 주장을 했는지 의문이다.

ㅤ사람들은 부모에게 화가 났다. 무엇이 상상력을 그 방향으로 인도했는가? 계기는 개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정말 인간적으로 글러먹은 부모 밑에서 적절한 보살핌 없이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자신의 인생사에 비추어 이야기 속 부모의 형상을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떤가?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사랑과 정성이 가득한 응원을 받은 사람은 어떤 계기로 그 학생의 부모를 자식 앞길 가로막는 악당으로 묘사했는가? 부모가 비상식적인 말을 하는 것을 두고 단지 그들이 멍청해서라고 ― 그러한 멍청함으로 말미암아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이라고 ― 치부하는 것은, 으레 가난한 사람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지적 수준이 낮다는 인식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이든 거짓이든 그 인식은 가난하지만 특출난 아이의 사례에는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어쩌면 인과관계는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즉, 멍청함이 가난을 만드는 게 아니라, 가난이 멍청함을 강요할 수 있다. 눈 앞의 급여가 끊길 수 있다는 두려움은 가난의 협박이다.

ㅤ누군가는 내가 희미한 가능성이 기대어 너무 과도하게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지적하고 싶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일말이라도 다른 쪽으로 상상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가능성은,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부모가 “아이의 앞길을 막는” 것은 파렴치해서가 아닌, 글쓴이의 말마따나 “가난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본인이 부모님에게 정말 사랑받고 있는지, 부모님이 나의 장래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사람들인지 등등 진실은 그 이야기에 등장한 아이만 알 것이다.

ㅤ나는 이 글의 결말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이의 미래를 진지하게 걱정한 그 글쓴이는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첫 학기 대학 등록금을 대신 내줄 용의가 있다고 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아도 소극적으로 대응해왔다. 그것은 여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용기의 문제였다. 나는 가난하지만 삶을 소중히 여기던 동료 학우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귓가가 화끈거렸다. 나는 힘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용기밖에 없는 이들에게 이 졸고를 바치고자 한다. 우리는 삶의 주인공이며 가능성의 부자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


Jan 23, 2023


이 글은 또한 나의 개인 블로그에 게시되었다. (최초발행: Jan 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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