ㅤ성전환자의 평등한 지위와 권리를 확인한 2006년 대법원 결정은 그들의 삶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었다. 그 결정은 생물학적 성과 다른 전환된 성을 법률적인 성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호적에 기재된 출생 당시의 성을 그 전환된 성으로 정정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보았다.*1) 그리고 지난달 대법원은 미성년 자녀가 있음을 성별정정의 불허 사유(소극요건)로 판단한 2011년 판례를 뒤집었다.*2) 이제 슬하에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도 자기 정체성에 따라 살아갈 권리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ㅤ그런데 이 결정들에 대해서는 여러 견지에서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그 비판들 가운데서 특히 강력해 보이는 것은 이 결정이 비민주적이라는 주장이다. 그 주장은 입법자가 사회 변화에 알맞은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지 않고 오랫동안 자신의 임무를 방기한 사실은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을 만들 권한이 없는 법관이 판결로 입법을 대체하는 것은 국회의 입법권을 침탈하는 것이며, 이로써 민주주의를 비롯한 헌법상 주요 원칙이 훼손된다고 본다.*3) 한편,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비판으로 예상되는 주장은 이른바 “사법의 정치화”다. 즉,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으로 민감한 쟁점과 관련하여 입법자의 결단이 없는 상황에서 사법부가 판단을 자제해야 하는데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면 사안에 대한 판단이 전적으로 법관의 재량에 맡겨져 법의 지배(rule of law)가 부정되고 사실상 법관의 지배(rule of judges)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ㅤ법원이 성전환에 따른 성별정정을 허가한 것은 비민주적인가? 여하한 비판들처럼 종교적 색채를 띠거나 전통주의에 근거하지 않고 법철학적인 관점에서 제기되는 이 같은 물음은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의문을 향한 지적 흥미는 금세 식어버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일단 당해 사건에 적용될 구체적인 법률과 ― 입법자의 원래 의도(original intent)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고정된 ― 그 문언의 의미만이 법의 해석에 있어 전부라는 견해를 거부하고, 법질서에 내재된 원리가 법을 해석하는 일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수긍하면 사안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법이 없어서 법관이 판단을 내릴 수 없다거나 재량을 행사한다는 식의 주장은 더는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진정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관한 적절한 이해에 기초할 때 대법원의 결정이 비민주적이라는 주장은 다소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법원의 결정이 겉보기에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역으로 민주주의에 반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노력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
ㅤ대법원이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허가한다고 결정한 것이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모종의 유감스러운 일이라면, 이것은 그 결정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나 가치가 손상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그 가치란 무엇인가? 여하한 비판도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국회가 결정해야 할 일을 법원이 결정했기 때문에 현 상황이 민주주의에 어긋난다고 말할 뿐이다. 다만 우리는 비판의 내용에서 얻을 수 있는 단서를 토대로 추측할 수 있다. 대체로 전술한 취지의 비판들은 법원이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이것이 법원의 결정은 비민주적이라는 주장의 핵심이다. 그 외의 내용은 주변적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초점을 두고 생각하건대, 아마 그 가치로는 “자기 지배”라는 의미에서의 자유가 제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는 민주주의의 견지에서 그러한 비판이 유감스럽게 생각할 점은 오직 하나, 법원이 개입하여 선수를 치는 바람에 국민이 그들의 대표자를 통해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지위를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ㅤ우리는 이제 법원의 결정이 비민주적이라는 주장을 한층 명료하게 만들었다. 국민적 합의를 거쳐 입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법원이 자기 권한을 넘어서 부적절하게 개입한 탓에 국민은 더는 스스로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지 않게 되었다. 이야기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여기에 추가적으로 조미료를 곁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사법관료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내릴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거나, 법관이 해야 할 일은 법을 실행하는 것이지 도덕을 사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식의 주장들 말이다. 다만 나는 그러한 문제를 일일이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핵심은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필요와 당위가 있더라도 정치공동체 구성원의 자유를 도덕적 비용으로 지불한 것은 민주주의로서는 유감스러운 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법원의 결정을 지지하는 견지에서 볼 때 이 주장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법관이 판결로 입법을 대체했다는 그 비판은 무정조(無正條)를 전제하는데, 그 가정이 바로 논쟁의 쟁점이기 때문이다.
ㅤ비판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전제는 바로 “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곧, 법전 그 어디에도 법원이 성전환에 따른 성별정정을 허가할 수 있다는 내용의 법률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원이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성별의 표시를 전환된 성에 알맞게끔 수정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것은 판사가 법을 시행한 것이 아니라 재량을 행사하였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만약 법률이 존재한다면 ― 그 법률이 위헌으로 선언되거나 효력이 없게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 판사가 법률에 따라 재판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에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헌법상 입법권을 가질 수 없는 판사가 “있는 법(law as it is)”에 근거하지 않고 “있어야 할 법(law as it ought to be)”을 만들어서 재판한 것이므로 의회의 권한이 침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법원의 결정을 비민주적으로 여기는 비판자들의 주장이 타당한지는 이러한 전제를 검토함으로써 답을 얻을 수 있다.
ㅤ법원이 입법권을 침해했다는 논변은 2006년 대법원 결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해당 결정에서 손지열 대법관과 박재윤 대법관이 가담한 반대의견은 법해석이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선을 긋고 그 선을 넘어설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즉, 법해석은 “입법에 의하여 설정된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기본적인 한계가 있으며, 만약 이와 같은 한계를 넘는다면 이는 법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법률의 형성으로서 헌법상의 입법권 침해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는 것이다.*4) 그리고 그 한계란 입법자가 법률을 제정할 당시의 상황에서 고려한 문언의 의미, 곧 입법자가 그 법률의 문언을 통해 수행되리라 기대했던 바를 뜻한다. 호적법 제120조(오늘날 가족관계등록법 제104조 제1항)는 “호적의 기재가 법률상 허용될 수 없는 것 또는 그 기재에 착오나 유루(遺漏)가 있다고 인정한 때에는 이해관계인은 그 호적이 있는 지(地)를 관할하는 가정법원의 허가를 얻어 호적의 정정을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데, 반대의견은 성전환에 따른 성별정정이 “법률의 제정 당시에 전혀 예상하거나 고려하지 아니한 새로운 문제”이므로 이 조항을 성전환자의 사례에 적용함은 입법 취지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ㅤ이 논변은 미국에서 헌법 해석을 둘러싼 논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어떤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이른바 원의주의(originalism)라고 불리는 그 이론은 법이 채택될 당시 입안자(framers)가 원래 의도한 바대로 법을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5) 다시 말해, 법률의 문구는 입법자가 그 문언에 걸었던 희망이나 예측으로부터 동떨어지면 안 된다. 가령 호적법 제120조에서 “호적의 기재가 법률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의 의미는 해당 조항을 만든 입법자가 그것에 대해 생각했던 바를 좇아 이해되어야 한다. 성전환자의 전환된 성이 법률적으로도 그 사람의 성이라고 평가되면서 실제 법률적 성과 호적상 기재된 성의 불일치가 발생해 호적이 진정한 신분관계를 공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이는 성소수자의 처우에 무관심한 입법자가 예견했던 것 밖의 일이라서 “법률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는 법문언의 가능한 의미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견해의 매력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제정한, 궁극적으로 국민의 의지가 담긴 법률을 자의적이게 해석하지 못하도록 판사의 권한을 제한한다고 생각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입법자의 의도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추상적으로 기술된 법문을 해석할 때 그 원래 의도를 법해석의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원의주의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이 예리한 비판을 전개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몇 가지만 우리 실정과 사안에 맞게 인용하고자 한다.*6)
ㅤ우선, 우리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concept)과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인 관념(conception)을 구분해야 한다.*7) 이를테면, 축구단을 소유한 어떤 협동조합의 총회가 “다음 시즌 전까지 구단은 능력이 탁월한 선수를 영입해야 한다”고 결의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조합원들 전부 또는 대다수는 안건을 의결할 당시 그 “탁월한 선수”란 손흥민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 결의사항을 집행할 구단주가 올해 월드컵에서 우승한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를 영입했다. 이 경우 구단주가 조합총회의 결의를 위반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탁월한 선수”에 관한 조합원들의 견해를 거부했을지 몰라도 그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합원들이 구단주의 결정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고 입장을 바꾸더라도, 이는 “탁월한 선수”라는 규준을 변경한 것은 아니다.
ㅤ물론 다음과 같은 상황은 논란을 야기할지도 모른다. 앞의 사례에서 구단주가 김연경을 영입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협동조합이 축구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배구선수를 영입한 구단주의 결정이 엉뚱하며 잘못되었다고 비판할 것이다. 맥락상 협동조합이 지시한 “탁월한 선수”가 “탁월한 ‘축구’ 선수”를 의미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원의주의를 고수하는 이들은 이렇듯 구단주가 문언의 모호함을 빌미로 삼아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으려면 선수영입방침을 시행할 때 그 방침을 제정한 조합원들의 원래 의도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구단주의 결정이 어리석다고 생각되는 까닭은 “탁월한 선수”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탁월한 선수”란 손흥민을 겨냥한 것이라는 조합원들의 기대가 “탁월한 선수”라는 개념에 대한 최선의 이해라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ㅤ또한, 원의주의적 해석론은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뿐더러 현실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문제점은 다음 사례를 통해 예증된다. 2005년 헌법재판소는 호주제가 남녀를 불합리하게 차별하기 때문에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했다. 그 결정에서 법정의견은 제헌헌법이 법 앞의 평등과 더불어 남녀동권(男女同權)에 기초한 혼인을 규정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이미 헌법이 제정될 당시부터 종래의 가부장적 혼인질서를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헌법적 결단이 존재한다고 보았다.*8) 실제로 제헌헌법 제8조는 현행헌법 제11조 제1항과 마찬가지로 성차별을 금지했고, 각 조문 간의 관계를 고려할 때 헌법 제11조 제1항과 제36조 제1항의 “평등”은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되며,*9) 제11조 제1항의 내용은 헌법이 제정된 이래로 조문의 위치만 바꿔오면서 존속했다. 이를 종합해 보면 헌법상 “평등” 개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던 셈이다. 한데, 제헌의회가 헌법을 채택할 당시 호주제는 사회에서 혼인과 가족생활을 규율하는 평범한 제도로 받아들여졌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제헌의회의 의원들은 호주제가 곧 자신들이 제정할 헌법 제8조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을 리 없다. 즉, 헌법재판소는 호주제가 헌법상 평등에 위배되므로 위헌이라고 판단했지만, 정작 그 평등을 도입한 의원들한테 위헌결정은 예상치 못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학자나 법률가도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입법자의 가정이나 기대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식의 논변을 펼치지 않는다.
ㅤ나는 지금 입법자의 원래 의도에 구속되는 해석이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반대가 정당화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원래 의도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들이 과연 위와 같은 사례에서도 일관된 태도를 고수할지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이다.*10) 한편 누군가는 앞의 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헌법은 제정된 때부터 지금까지 상당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9차례 개정되었다. 혼인이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한다는 조항은 헌법을 다섯 번째로 개정할 때 삭제되었고, 혼인과 가족생활의 성립 및 유지가 양성의 평등에 기초해야 한다는 내용은 여덟 번째 개정으로 신설되었다. 따라서 호주제는 이때 생긴 제36조 제1항에 따라 위헌인 것이며, 제11조 제1항은 그것의 역사가 어떻든지 간에 이 사안과 전혀 무관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반론이 모호한 헌법조항을 에워싼 “그릇된 해석”들 ― 원의주의에 반하는 해석들 ― 속에서 입법자의 원래 의도를 구출하려는 전략이라면 전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제8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질 당시에도 호주제는 여전히 우리 전통의 일부로 당연하게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혼인과 가족생활에 호주제가 낄 자리는 없다는 취지로 국민들이 제36조 제1항을 이해했는지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ㅤ입법자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 불분명하거나 합리적으로 추정된 그 원래 의도가 당대의 사회적 정의관념에 현저히 반하는 상황에서 원의주의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법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에 법관은 다른 해석 전략을 취하거나 입법자의 원래 의도 중에서도 쓸 만한 부분을 발굴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해석 방법을 택하면 입법자의 원래 의도를 무시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고, 원래 의도들 사이에서 취사선택이 이루어진다면 해석자는 무엇을 수용하고 배제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 기준이란 결국은 입법자의 관념이 아닌 해석자 자신의 도덕철학적 사유로부터 구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입법자의 관념에 권위를 부여하고 해석자로 하여금 거기에 복종하도록 하는 해석 전략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법실천 측면에서 지나치게 단순하고 경박하다.
ㅤ지금까지 논의를 정리하자. 비판의 논지를 해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정치공동체는 아직 성전환자가 호적상 성별란에 기재된 내용을 정정하는 데 필요한 절차법을 갖고 있지 않다. 법해석은 입법자의 원래 의도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호적법 제120조에서 호적을 정정할 사유로 명시된 “호적의 기재가 법률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의 문언상 가능한 의미는 “성전환에 따른 실제 성과 호적상 성의 불일치”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이 해석에 근거하여 호적법 제120조를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호적법 제120조가 호적상 성별을 정정하는 절차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법관이 판결로 입법을 대체하여 국회의 입법형성권을 빼앗는 것이다. 이로써 국민은 그들의 대표자를 통해 스스로를 지배할 지위를 잃게 되고 더는 자치를 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입법자의 원래 의도가 법해석에 있어 절대적인 규준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은 과장되었다. “법률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는 법적 개념에 대해 입법자가 정답을 알고 있다거나 완벽한 이해에 도달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학자들과 법률가들은 종종 실무와 판례에서 입법자의 원래 의도와 배치되는 결과를 지지한다.
ㅤ다만 우리는 호적법 제120조가 그렇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 논변은 갖고 있지만,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적극적 논변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호적의 기재가 법률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는 문언은 어떤 의미로 새겨야 하는가?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사안에 적용할 법이 부존재하기 때문에 법관이 재량을 행사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성별정정을 허가한 법원은 법이 없다고 여기지 않고 나름대로 법적 근거를 들어서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 지점은 중요하다. 법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특정한 법률조항과 그 문언, 그것을 설계한 입법자의 의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법원은 호적법 제120조의 문언뿐만 아니라 제도의 목적과 취지, 과거의 판례들, 헌법의 규정과 그밖의 법원리들을 활용하여 사안에 합당한 판단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해석을 통합성으로서의 법(law as integrity)에 기초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1) 즉, 실정법상의 규칙들과 그 배후에 놓인 원리들에 입각하여 전체 법체계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최선의 내적 일관성과 정합성을 구현하도록 해석의 내용을 구성한다.*12)
ㅤ이를 토대로 호적법 제120조를 해석해 보자. 제일 먼저 할 일은 법률조항의 텍스트를 살피는 것이다. 해석은 언제나 그것의 대상이 된 문언으로부터 시작한다. 앞서 나는 원의주의적 해석이 입법자의 관념을 맹목적으로 좇거나 그것에 너무 지나칠 정도로 권위를 부여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을 놓고 문언과 입법 취지를 완전히 무시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해석자는 법률을 입안한 사람들이 그 조항에 나타난 개념을 얼마나 적절하게 이해했고 그 이해가 타당한지를 따져 볼 수 있지만, 명확한 근거 없이 무조건 그들의 이해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또한, 원칙적으로 문언이 통상 의미하는 바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이를테면 호적법 제15조는 입법자가 사용한 단어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 곧 호적에 사주팔자나 별자리 운세가 아니라 호주 및 가족의 성명ㆍ본ㆍ성별ㆍ출생연월일과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제120조는 어떤가? 입법자는 “위법된 호적기재의 정정”이라는 조문의 소제목 하에 호적정정의 사유로 “호적의 기재가 법률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을 기술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환자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호적의 기재가 법률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면 이해관계인은 호적지를 관할하는 가정법원의 허가를 얻어 호적의 정정을 신청할 수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무엇이 법률상 허용될 수 없는 기재인지에 관해 구체적인 용례를 서술하지 않았다.
ㅤ그러므로 우리는 해당 문구를 구체화하여 그 의미와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추상적인 문언은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며, 때로 그 지평선의 반경은 모호한 정도에 비례해서 넓어진다. 다만 역사는 입법자가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허용하지 않을 의도로 법률을 설계하진 않았다는 점만큼은 확실하게 알려주는 듯하다. 호적법이 제정될 당시에 성전환자의 처우가 사회적으로 부각되거나 의원들이 내심 그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라는 가정은 전혀 그럴듯하지도 않고 비현실적이다.
ㅤ다른 한편으로, 해석자가 고려해야 할 것은 문언만이 아니다. 법률의 객관적인 목적과 법실천으로서 꾸준히 축적된 판례도 여기에 포함된다. 현재 해석자는 성전환자가 호적상 성별란에 기재된 성별을 출생 시의 성에서 전환된 성으로 정정하려는 사안을 당면했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무엇인가? 우선, 개인의 법률적 성을 평가함에 있어 생물학적 요소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요소들 또한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한 재판의 선례가 있으며,*13) 이에 따라 몇몇 성전환자의 사례처럼 성을 결정짓는 여러 사정을 종합해 볼 때 출생 시와는 달리 전환된 성이 법률적인 성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성전환자는 현재 법률적으로 평가받는 성과 호적에 기재된 성이 불일치할 수 있는데, 이 상황은 개인의 진정한 신분관계를 공시하고 공증하기 위함이라는 호적제도의 목적에 저촉된다. 더군다나 법은 그 자체의 안정성과 보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사회질서의 유지를 요청하게 되고(법은 무질서보다 질서와 밀접하다), 이러한 법적 요청은 호적이 진정한 신분관계를 공시하지 못해 발생하게 될 혼란을 방지하라는 공익 차원의 필요를 역설한다. 이를 종합하면 이 사안에도 호적법 제120조가 적용될 여지가 생긴다.
ㅤ다음으로 검토할 것은 이러한 가능성과 배치되는 선례가 있는지다. 종래의 대법원은 호적법 제120조에서 말하는 “호적의 기재가 법률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이란 호적에 기재할 수 없는 사항이 기재되었거나 호적의 기재 자체가 당연무효인 경우를 의미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14) 성전환자의 법률적 성이 반영되지 않은 호적의 기재가 현재의 진정한 신분관계를 공시하지 못해 법률상 허용될 수 없다는 해석은 이 선례와 모순되지는 않지만, 호적정정의 사유를 그보다 넓게 보고 있다. 새로운 해석은 선례에 따라 법원의 판단이 반복되면서 구체화된 규범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을 정당화해야 한다. 그 정당화를 제공하는 근거는 앞서 언급한 호적제도의 목적과 사회질서의 유지라는 법적 요청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법질서는 수평적 관계로만 구성되지 않으며, 그 범위가 호적제도와 관계된 규칙들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은 더 상위의 규칙과 원리에 의해 제한받거나, 아니면 그것에 의해 정당화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규칙의 근저에 놓인, 전체 법질서에서 더 근본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원리들이며, 해석자의 관심은 자연스레 정치공동체에서 최고의 정치도덕 규범인 헌법으로 향하게 된다.
ㅤ헌법은 성전환자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일단 헌법 제10조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해 진술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법적 논의에서 논증의 만능패(wild card)로서 자주 원용되고는 한다. 이를 감안하면 성실한 논증의 책임을 부담하는 해석자는 인간의 존엄성이 구체적으로 성전환자에게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해명할 임무가 있다. 일단 그 출발점은 성전환자 또한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헌법 제10조가 보호하는 인간의 존엄성으로부터는 일반적 인격권이 도출되고, 여기서 자기결정권이 파생된다. 자기결정권은 인간이 자신의 생활영역에서 인격의 발현과 삶의 방식에 관한 근본적인 결정을 자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권리다.*15) 성전환자는 이러한 권리의 보유자로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좇아 스스로 삶의 양식과 내용을 결정할 자격이 있다. 국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고,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개인의 존재와 삶에 중대한 의미를 가지며 자기결정권의 한 내용을 이루고 있으므로 존중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
ㅤ한편 헌법 제11조에서 제1항은 법 앞의 평등과 차별금지를 선언하고 있으며, 제2항은 사회적 특수계급을 어떠한 형태로든 창설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헌법상 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데 필요한 기반이다. 만약 합리적인 이유 없이 특정한 사람의 헌법상 권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낮거나 온전하지 못한 수준에서 보장된다면 그러한 차별은 그 사람의 열등한 지위를 알리는 신호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어긋난다. 헌법 제10조와 제11조를 함께 고려할 때 개인의 삶에 대한 존중과 보호는 공정하고 동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의 삶이 단순히 정치공동체의 구성원 다수가 선호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정당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존중이나 배려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ㅤ인간의 존엄과 가치, 법 앞의 평등과 더불어 각종 자유와 권리 그리고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포괄하는 헌정질서로부터는 개인의 삶에 대한 평등한 존중과 보호라는 원리가 도출된다.*16) 헌법상 기본권 조항과 이러한 원리는 국가권력을 제한한다. 실제로 민주적 법치국가의 다양한 제도들, 이를테면 권력분립, 법률유보, 규범통제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효과적으로 보장하려는 목적에서 고안되었다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헌법은 국가권력이 함부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규율하며, 그 대상에는 입법부와 행정부뿐만 아니라 사법부도 당연히 포함된다. 법원은 무엇이 법인가를 판단하고 선언할 때 그것이 개인의 권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는지, 만일 권리가 제한된다면 그 제한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법원이 그 권한을 행사하면서 어떤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거나 침해한다면(다시 말해, 그 사람의 삶에 대해 평등한 존중과 보호를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경찰이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사람을 체포하거나 의회가 인종적 분류에 따라 선거권을 다르게 부여하도록 법률을 개정한 것처럼 부당하다.
ㅤ2006년 대법원은 성전환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으며 이러한 권리들이 질서유지나 공공복리에 반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법률을 해석하며 기본권 침해 여부를 고려하고 있다.
“… 사회통념상 전환된 성을 가진 자로 인식되어 법률적으로 전환된 성으로 평가될 수 있는 성전환자임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막상 호적의 성별란 기재는 물론 이에 따라 부여된 주민등록번호가 여전히 종전의 성을 따라야 한다면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되고 취업이 제한됨으로써 결국, 이들의 헌법상 기본권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할 것이다. … 성전환자의 호적이 정정됨으로써 … 장래에 향유하게 될 이익은 … 호적정정을 불허함으로써 얻어지는 공공의 이익에 비하여 현저히 크다고 할 것이다.”*17)
비록 성전환자에 대해 호적상 성별정정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 “헌법정신을 온전히 구현할 수 없게 된다”고 표현한 것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지만(법규범과 원리가 추상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정신” 같은 불명확한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대법원은 자기 권한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그 결정에서 반대의견은 헌법의 규범성을 도외시했다. 그들은 기본권 조항과 원리가 요구한 바를 준수했는지 묻는 헌법의 의문에 답하지 않았으며 법률의 문언을 입법자의 본래적 의도에 둘러쌓여 고립된 외딴 바위섬처럼 묘사했다.
ㅤ이제 전술한 논의를 바탕으로 호적법 제120조의 해석을 구성하자. 여기에 필요한 재료는 준비되었다. 사람의 성을 결정짓는 요소와 이에 관한 법률적 평가를 판시한 선례, 호적제도의 취지와 목적, 사회질서의 유지라는 법적 요청, 이해관계인의 권리, 사익과 공익의 비교 형량, 헌법상 기본권 조항을 종합하여 대상 법률(호적법 제120조)을 법체계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정합적으로 표현되고 원리에 의해 가장 잘 정당화되도록 해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체화된 법률의 내용과 의미는 2006년 대법원 결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관계인의 성에 대한 법적 평가가 달라졌는데도 호적의 기재가 현재 진정한 신분관계를 반영하지 못하는 상태는 법률상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은 제도의 목적에 어긋나고 법적 요청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관계인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강요하여 개인의 삶에 대한 평등한 존중과 보호라는 원리에 비추어볼 때 정당화되기 어려워 법질서의 관점에서 내려지는 평가가 부정적이므로 법률이 그 기재를 허용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ㅤ법원은 법령을 해석할 때 항상 헌법을 염두에 두고 원리를 의식해야 한다. 나는 법원의 권한에 대한 이 같은 제약을 강조한다. 이 제약은 법관에게 채워진 의도론의 족쇄를 풀어주면 그들에 의해 인민의 민주적 자유가 찬탈될 것이라는 흔한 불평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곧, 헌법도 정치공동체의 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헌법은 국민적 합의에 의해 제정된 국민생활의 최고 도덕규범이며 정치생활의 가치규범이다.*18) 특히 우리 헌법은 일반적인 의결정족수보다 훨씬 강화된 기준에 따른 국회의 의결(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통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유권자 과반수가 참여한 국민투표를 거쳐야 개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떠한 실정법보다 강력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법률을 헌법에 합치하도록 해석하는 것은 입법자를 국민이 직접 선출한 자로 정하는 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법률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전자가 정당성을 입법 절차에서 찾고 “국민에 의해 선거된 입법자가 제정한 법률은 정당성이 있다”는 말로 요약된다면, 후자는 그 정당성을 법률의 내용에서 구하며 “국민적 합의에 의해 제정된 최고의 정치도덕 규범(헌법)에 합치하는 법률은 정당성이 있다”는 말로 정리된다.*19)
ㅤ사실 우리의 실무는 헌법의 눈으로 법률을 읽는 데 익숙하다. 반드시 헌법재판소에서 다루는 사건이 아니라도 그렇다. 이전에 대법원은 긴급체포된 피의자가 형사소송법 제214조의2 제1항에 따라 체포의 적부심사를 청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결정한 적이 있다.*20) 그런데 당시 그 법률조항은 “체포영장에 의하여 체포된 피의자”가 적부심사를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원래 문언만 놓고 보면 이것은 긴급체포된 피의자에게 적용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적부의 심사를 법원에 청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한 헌법 제12조 제6항에 주목하고 형사소송법 제214조의2 제1항이 영장에 의하지 않고 체포된 피의자의 기본권(적부심사청구권)을 제한하려는 취지에서 입법된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 기초하여 긴급체포된 피의자라도 이 조항의 적용을 받는다고 해석했다. 문언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이는 이 법해석은 급진적인 실례다.
ㅤ누군가는 법원이 비민주적이라는 혐의를 벗더라도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민주주의에 공헌한다는 점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가령 의회에서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는 법률을 제정했을 때 그것의 위헌적 부분이 배제되도록 해석하거나 그것 자체를 무효화하는 판결은 분명 민주주의에 기여한다. 하지만 그 밖의 경우는 어떠한가? 미국에서 드레드 스콧(Dred Scott) 판결은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플래시 대 퍼거슨(Plessy v. Ferguson) 판결은 민주주의에 부정적이었는가? 인종분리를 종식한 브라운(Brown) 판결은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한국의 사례를 보자.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사실상 박탈한 공직선거법 조항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정치공동체 구성원의 자치를 진작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었다.*21) 그러면 호주제를 위헌으로 판단한 결정도 민주주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는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도대체 민주주의와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ㅤ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인민은 왕이나 귀족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닌 그들 스스로를 지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적극적 자유는 민주적 자치라는 이상으로서 가장 강력하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항상 찬란한 시절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자비한 독재자가 군림하는 나라뿐만 아니라 민주정치를 표방하는 곳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우리가 민주적이라고 여기는 국가들조차 일부 구성원, 가령 여성과 흑인에게 자유를 주지 않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의회로 보낼 대표를 가질 수 없었고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정책과 법률을 결정하거나 이에 관여할 권리도 갖지 못했다. 적극적 자유는 어떤 형태든 민주주의를 요구하나, 민주주의가 공정하지 않다면 그러한 불공정함으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은 구성원은 자유를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자치를 보장한다고 말하기 위한 조건이 제시된다. 예컨대, 보통선거는 그 조건들 가운데 하나다. 성별, 인종, 신념, 종교, 학력, 재산 따위와 관계없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 선거권을 가져야 한다. 또한, 공직에 취임할 기회는 모든 시민에게 개방되어있어야 한다. 특정 가문이 공직을 독점하거나 세습하는 일은 제도적으로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ㅤ이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그 조건들이 진실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역사는 보통선거가 시행되었다고 해서 모든 시민이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대계 독일인은 1933년 국가의회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었지만, 그 선거로 집권한 나치가 일으킨 홀로코스트는 그들에게 자치가 아닌 절멸을 의미했다. 유대계 독일인은 그들의 삶을 파괴하려 했던 정치공동체의 도덕적 구성원이 아니었다.*22) 만약 누군가 독일인은 그들이 속한 정치공동체가 저지른 국가적 범죄 행위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더라도, 이 주장에 전제된 독일인의 범주를 유대계 독일인까지 확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대계 독일인에게 그 일에 집단적 책임을 느끼라고 하는 것은 변태적이고 터무니없다.*23)
ㅤ이렇듯 스스로를 지배할 자유는 정치공동체에서 진정한 구성원으로 대우받는 사람한테만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정치공동체 구성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공동적 행위의 책임은 그들의 자치를 이루는 진정한 구성원에게만 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헌법과 헌정질서가 공정한 민주주의를 수용함으로써 법에 의해 모든 국민은 동등하게 자유를 향유하고 그 자유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명제가 참이 되려면, 모든 국민은 차별없이 정치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대우받고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모든 구성원은 정치도덕적으로 평등한 지위에 있어야 한다. 불합리하게 선거권을 제한받은 경우뿐만 아니라, 단지 수적으로 열세거나 인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삶에 대한 존중과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어떤 공적 이익을 위해 희생을 강요받는 경우에도 이 평등한 지위는 손상된다.
ㅤ이제는 다음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에 관한 대법원 결정이 지닌 민주적 의의는 무엇인가? 이 결정은 단지 성소수자에게만 인정되는 어떤 특별한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든 매우 인격적이고 삶과 밀접한 결정을 스스로 내릴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에 기초해서 성소수자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즉, 특정 소수자 집단을 위한 편협한 이익이나 원리를 승인한 것이 아니라, 헌법으로 수용된 하나의 공준을 확인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내가 속한 정치공동체로부터 삶에 대한 평등한 존중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대법원 결정 외에 개인의 권리를 옹호한 다른 수많은 판결과 결정도 마찬가지다. 그 공준이 지지됨으로써 적절한 의미에서 평등은 강화되고 여기에 기반을 둔 자유 역시 활력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이 무시되었더라면 오히려 그 반대다. 평등은 약화되고 민주적 자치의 이상은 의심받을 것이다.
ㅤ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떠오른 몇 가지 자기반성적 의문에 답하고자 한다. 후술할 내용은 이 글의 본문과 관련이 적다. 단지 별도로 발행하기에는 애매해서 글의 말미를 활용해 이곳에 적는다. 그 의문들은 내 주장의 전제, 곧 내가 상당 부분 의존하는 드워킨의 이론에 대한 잠재적 반론이자 실제로 제기되었던 반론이기도 하다.*24) 우선 다음과 같은 비판이 개진될 수 있다. 법관이 혼자 상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마음먹고 재판을 사적 정의관념에 봉사하는 도구로 이용한다면 민주주의는 다른 측면에서 나빠졌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관의 그러한 태도는 전술한 제약에 위반된다. 법관은 법을 법체계에 대하여 올바른 관계 속에서 정합적으로 보이게 해석해야 하며, 그의 법해석은 원리에 의해 최선의 정당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나도 똑같이 법관의 잘못된 행태를 비판하지만, 다른 모든 이론적 비판이 그러하듯 내가 동의하는 이론에 근거해서 비판한다.
ㅤ앞의 잠재적 비판과 비슷한 논지에서, 아마 누군가는 법관이 제약을 준수하는 척하면서 개인적 신념을 사람들에게 강요할 위험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법을 해석할 때 정치도덕에 관한 확신이 자극을 주는 것과 법관이 권한을 남용하는 것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모든 해석전략은 신의성실로써 한다는 전제하에 제시될 수밖에 없다.*25) 우리는 이론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바탕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사례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1995년 장윤석을 필두로 한 검사들은 법실증주의를 들먹이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헌정질서를 유린한 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해당 발언은 명백히 그 이론의 본질을 비틀어 부당하게 왜곡한 결과물이었다.*26) 원의주의자를 자처하는 법관도 입법자의 원래 의도에 충실하다는 듯 시늉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게 의도를 왜곡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법관이 권한을 남용해 개인적 신념을 타인한테 강요하기로 결심한 이상, 그가 자신의 죄악을 은폐하고 위장하는 데 동원된 이론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ㅤ그런데 다음 의문은 직전에 다룬 두 가지와는 결이 다르다. 이것은 원리들 사이에서도 경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눈여겨보고, 여러 원리들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한 판단 기준이 부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울러 특정 원리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답하기 힘든 난제가 존재한다고 본다. 예컨대, 혐오표현(hate speech)을 범죄화하는 법률은 소수자의 인격권을 보호하므로 인간의 존엄성 원리에 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개인의 자유로운 사상과 신념 및 의견의 표명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윤리적 독립성을 보장하라는 존엄성의 요청을 거역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비판적 의문은 경고한다. 법관은 결단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마지못해 정치도덕에 관한 확신이 해석의 과정에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고, 이로써 법이라는 객관적 기준에 의거해 공정하게 재판할 임무가 있는 법관의 중립적 정확성은 오염되고 말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법해석이 해석자의 확신으로부터 자극을 받는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법에서, 특히 주요 원리가 도출되는 헌법에서 추상적으로 기술된 문언들은 당대 철학적 사유의 산물이다. 그중 어떤 것은 한 시대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했고 세월에 따라 불온한 사상으로, 때로는 무모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헌법과 원리, 문언, 정합성 따위의 제약을 강조하더라도 해석자의 확신이 법해석에 주는 충격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법이 배태한 정치도덕적 가치들에 관한 물음을 향해 철학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올바른 문제는 그 자극이 너무 질 나쁜 것이라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법해석이 적절한 원리 논변에 근거할 때 확신이 끼치는 영향은 결코 질이 나쁘지 않다는 견해를 옹호한다.*27)
ㅤ해석 과정에 해석자의 확신이 틈입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조차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법문언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많은 경우에 비현실적이다.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는 조항은 문언 그대로 해석할 수 있으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조항은 “평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서는 해석할 수 없다. 이때 원의주의자는 평등이 무엇인지는 그 조항을 만든 사람의 관념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원의주의도 확신의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해석의 규준을 정하는 단계에서 해석자의 확신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즉, 원의주의에 입각한 해석자는 “어째서 법문에 드러난 개념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입법자의 관념을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적당한 이유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 이유란 결국 나름의 철학적 사유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입법자의 원래 의도를 추론하는 과정에서 자료들이 서로 상반되거나 하나의 의도를 명확히 가리키지 않을 경우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 것인지 판단해야 하므로 철학적 사유를 수반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ㅤ다만, 법률가에게 철학적 소양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의회의 결정뿐만 아니라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도 공정성에 관한 의문을 가진다. 왜 법원은 그런 결론을 내렸는가? 그 결론은 타당하고 수긍할 수 있는 것인가? 정치도덕적 확신을, 그것이 주는 자극을 회피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배척하려는 시도는 법관으로 하여금 공명정대를 성취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과 위선을 하게끔 만든다. 결론에 전제된 실제 근거는 마치 중립적인 듯 보이는 장치들에 의해 숨겨지고,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심사할 기회를 잃는다. 이때 법원의 독립성은 민주적 책임성을 죽이고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은 법관이 있지도 않은 재량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자신의 이해를 숨기는 것이다.
Dec 31, 2022
* 대표이미지 출처: 대한민국 대법원
* 이 글은 또한 나의 개인 블로그에 게시되었다. (최초발행: Dec 31, 2022)
1) 대법원 2006. 6. 22.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 공2006. 8. 1. (255), 1341
2) 대법원 2022. 11. 24.자 2020스616 전원합의체 결정
3) 최근 결정에 대한 비판으로는 대표적으로 김중권, “성전환에 따른 성별정정 허가가 과연 판례법적 사항인가?,” 법률신문 (2022년 12월 8일). 반면, 옹호하는 의견으로는 윤진수, “미성년 자녀가 있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에 관한 대법원의 판례변경,” 법률신문 (2022년 12월 14일)
4) 대법원 2006. 6. 22.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 공2006. 8. 1. (255), 1341<1351>
5) 국내 문헌에 따라 originalism은 “원래주의”, “원본주의”, “원전주의”, “원초주의” 혹은 “원론주의”로 번역된다. 본고는 이들 번역어 가운데 “원의주의(原意主義)”를 채택했다. 해당 용어의 번역어를 “원의주의”로 선정함에 관하여 같은 취지의 견해로는, 가령 김문현, “헌법해석 방법으로서 원의주의에 대한 검토,” 헌법재판연구 (vol.3, no.2, 2016), 133(주1)면을 보라.
6) See, e.g., Ronald Dworkin, “A Special Supplement: The Jurisprudence of Richard Nixon”, The New York Review (May 4, 1972) 이 글은 드워킨의 저서 Taking Rights Seriously (Harvard University Press, 1978)에 실려있다. 참고로 해당 저서의 번역서가 법과 권리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었다: 로널드 드워킨. 법과 권리 (파주: 한길사, 2010). 원의주의에 대한 드워킨의 비판 정리는 함재학, “드워킨의 헌법사상: 헌법적 통합성과 파트너십 민주주의,” 법철학연구 (vol.12, no.1, 2009), 191면 이하를 보라.
7) 로널드 드워킨. 법과 권리 (파주: 한길사, 2010), 277면
8) 헌재 2005. 2. 3. 2001헌가9 등, 판례집 17-1, 1<17>
9) 제11조와 제36조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제11조가 평등권 및 평등원칙에 관한 기본조항이고 이것을 구체화한 개별적 평등권 규정들 가운데 하나가 제36조라는 것이다. [임지봉, “헌법 제11조,” 헌법주석서 (법제처, 2010), 417-418면] 이 견지에 따르면 제36조 제1항에 언급된 “혼인과 가족생활”은 제11조 제1항의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포함된다.
10) 미국에서 법학자들 가운데 브라운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이 잘못되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안다. 연방대법원은 이 판결로 인종에 근거한 시설 분리를 옹호했던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Plessy v. Ferguson)을 사실상 폐기했는데, “평등한 보호”를 명한 수정헌법 제14조를 입안할 당시 흑인과 백인 간의 시설 분리는 당연하게 여겨졌고 입안자들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국헌법상 평등에 대한 입안자의 관념은 할랜(John Marshall Harlan)의 견해와는 전혀 상반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의주의 신봉자였던 스칼리아(Antonin Scalia) 대법관조차도 브라운 판결이 틀렸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See Ronald Turner, “A Critique of Justice Antonin Scalia’s Originalist Defense of Brown v. Board of Education”, UCLA Law Review (Nov 10, 2014)
11) 가령 김도균, “우리 대법원 법해석론의 전환: 로널드 드워킨의 눈으로 읽기: 법의 통일성(Law’s Integrity)을 향하여,” 법철학연구 (vol.12, no.1, 2010), 89-132면; 공두현, “우리 대법원 법해석론의 흐름: 법실증주의, 법현실주의, 법원리론,” 법철학연구 (vol.22, no.2, 2019), 185-238면을 보라.
12) See Ronald Dworkin. Law’s Empire (Havard University, 1986), p.255ff
13) 대법원 1996. 6. 11. 선고 96도791 판결, 공1996. 8. 1. (15), 2264
14) 대법원 1978. 3. 7.자 77스12 결정, 공1978. 5. 15. (584), 10740
15) 헌재 2019. 4. 11. 2017헌바127, 판례집 31-1, 404<416>
16) 드워킨은 평등한 존중과 배려(equal respect and concern)를 정치공동체의 최고 덕목으로 본다. See Ronald Dworkin. Sovereign Virtue (Havard University, 2000)
17) 대법원 2006. 6. 22.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 공2006. 8. 1. (255), 1341<1347>
18) 헌재 1989. 9. 8. 88헌가6, 판례집 1, 199<205>
19) 위 결정(주 17)에서 김지형 대법관은 그의 보충의견을 통해 헌법합치적 해석의 민주적 정당성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합치적 법률해석은 국가의 최고규범인 헌법을 법률해석의 기준으로 삼아 법질서의 통일을 기하여야 한다는 법원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서 … 합헌적 법률해석은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입법자가 제정한 법률을 헌법에 합치되도록 해석함으로써 법률의 효력을 유지하려는 것이므로 입법권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고 국민주권의 원리에도 부합한다.” [대법결 2004스42, 공2006. 8. 1. (255), 1358]
20) 대법원 1997. 8. 27.자 97모21 결정, 공1997. 10. 15. (44), 3191
21) 헌재 2007. 6. 28. 2004헌마644 등, 판례집 19-1, 859
22) Ronald Dworkin. Freedom’s Law (Harvard University, 1996), p.23
23) Ronald Dworkin, “Equality, Democracy, and Constitution: We the People in Court,” Alberta Law Review (vol.28, no.2, 1990), p. 339
24) Ronald Dworkin, supra note 22, pp.35-38
25) Ronald Dworkin, supra note 22, p.11
26) 심헌섭, “5ㆍ18 불기소처분의 논거에 대한 법철학적 재검토: 분석과 비판,” 법학 (vol.36, no.3, 1995), 62-79면을 보라.
27) See Ronald Dworkin, supra note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