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일은 나만의 독립일이다.
내 나이 쉰을 앞두고 감행한 일이었다. 때 늦은 독립인데도 가족의 우려는 생각보다 컸다. 예상치 못한 반대로 마음이 지쳐갔다.
나는 엄마와 둘이 살았다.
결혼한 형제들과 달리 미혼이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엄마가 아프면서 내 삶도 변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큰 오빠는 나와 엄마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길 원했다. 그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제야말로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서야 할 때였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형제들이 내 독립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다.
한 번도 혼자 살아보지 않은 막냇동생이 미덥지 않았는지 반대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삶을 살고 싶다는데 형제들이 보인 반응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이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지 어처구니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단호하게 실행했다.
나를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책임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이끌려가는 삶이 편하다고 여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익숙함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이 와도 스스로 책임지며 걸어가는 인생.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만들어낸 인생이고 싶었다.
엄마가 빠져나간 공간, 오롯이 나는 혼자가 되었다.
처음이라 낯설지만 행복했다. 자고 싶을 때, 먹고 싶을 때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다.
간섭 없이 아무 때나 떠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날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어렵게 독립했는데 얼마 못 가 생각지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서둘러 병원에 가니 자궁에 혹이 생겼다며 수술을 권했다.
수술이라는 말보다 형제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그것 봐 독립은 아무나 하냐?’라는 말이 귓가에 들리는 듯해 가족에게 알리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러나 기우에 불과했다.
차근히 상황을 설명하자 가족들은 발 벗고 나서주었다.
덕분에 부인과 전문 병원 진료를 받았고, 간단한 시술로도 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치료는 일사천리로 잘 되었다. 하지만 시술 후 금방 회복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기운이 없고 금방 지쳐갔다. 한동안 누워만 지냈다.
몸의 회복을 위해 잘 먹어야 했지만, 입이 쓰고 식욕도 전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홀로서기를 선택한 만큼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지친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무엇이라도 하며 생기를 찾고 싶은 마음에 집을 정리하다 낡고 오래된 사진첩을 발견했다.
우리 가족들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다 눈에 띈 사진 한 장. 낡고 바랜 사진이었다.
가족이 둘러앉아 김밥을 먹으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날의 모습, 그 날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김밥. 김밥이 먹고 싶었다.
아픈 것도 잊고 그대로 일어나 재료를 사러 갔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다리에 힘도 생겼다.
한입에 쏙 들어오는 우리 엄마표 김밥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재료 손질을 시작했는데 일이 많았다.
엄마 옆에서 심부름만 할 때는 쉬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시금치 다듬는 것부터 당근 채 써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다.
달걀은 뒤집다가 찢어져 몇 번 하다 보니 한 판을 몽땅 써버렸다. 마음 같지 않았다.
재료 준비만 끝냈을 뿐인데 주방은 한숨이 나올 만큼 엉망이었다. 아수라장인 주방을 치우니 쉬고만 싶었다. 이제 예쁘게 말기만 하면 되는데…․
김밥 하나 먹는 것이 이리 힘들 줄이야. 그러나 고지가 눈앞이었다.
능숙하게 김밥을 싸던 엄마 모습을 떠올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엄마는 쉽게 하던데 이상했다.
힘줘서 말면 옆구리가 터지고, 힘을 빼면 금세 벌어졌다.
힘 조절에 실패해 썰다가 김밥이 형태도 없이 흩어져버렸다.
등 언저리로 식은땀이 났다.
앞으로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괜히 서글펐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했다.
마지막 김밥을 썰고 보니 열 줄 중 고작 두 줄이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남았다.
우여곡절 많은 인생 첫 김밥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누구 도움 없이 해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처음치곤 맛도 나쁘지 않아 뿌듯했다.
홀로서기의 첫 단추를 잘 채운 느낌이었다.
식탁 위에는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한 김밥이 수북이 쌓여 있지만, 오히려 며칠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김밥으로 먹을 수 없다면 볶음밥도 상관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에 실수가 만발했다.
시간과 공을 들인 것에 비해 결과물은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어설퍼도 느려도 괜찮았다.
나는 시작했고, 고된 과정을 거쳐 이렇게 마무리했으니 말이다. 좋은 출발이라 생각되었다.
반평생 엄마 맛에 길들어진 내게 김밥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왜 그럴까 생각하니 엄마 손맛을 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모양도 맛도 다른 나만의 김밥으로 끝까지 해냈다.
이 김밥은 엄마의 김밥이 아니라 내 김밥이다.
엄마의 김밥을 ‘사랑 김밥’이라고 한다면, 내 김밥은 말 그대로 ‘독립 김밥’이다.
옆구리가 터지고, 벌어진. 상처투성이라 해도 내 힘으로 해냈으니 말이다.
이제 김밥은 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상징적인 음식이 되었다.
더 이상 엄마 김밥을 재현하기 위해 애쓰지 않겠다.
나만의 김밥으로 감칠맛을 내며 살아가려 한다.
김밥도 홀로서기도 조금씩 발전해갈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김밥을 싸도록 해준 추억의 사진을 식탁 위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나를 걱정한 형제들 앳된 얼굴도 그 안에 있다. 김밥을 먹고 있는 다정한 모습을 보니 모두 그립다.
다음엔 더 야무진 김밥을 만들어 가족에게 먹여줘야겠다.
막내가 씩씩하게 만든 ‘독립 김밥’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