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다가 책 한 권에서 엽서가 뚝 떨어졌다. 10년 전, 아들과 함께 캐나다로 유학을 갔을 때 국내에 홀로 남아 있던 남편이 결혼기념일에 보내준 엽서였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 엽서에는 정호승의 시 '우리가 어느 별에서'가 적혀 있었고, 남편의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엽서는 내가 정호승 시인을 좋아하게 된 계기이자 시를 사랑하게 된 이유였다.
퇴직 후 여유가 많아졌고, 주말마다 남편과 함께 중고서점을 돌며 눈에 띄는 시집을 골라오는 취미가 생겼다. 22년 직장생활 끝에 회의감에 빠졌던 나는 조기퇴직을 선택했고 남는 시간을 책을 읽는 일에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던 거다. 주변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요즘 뭐하고 지내?"라고 물었다. 나는 "책 읽으면서 지내"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었다. 인생을 허투루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서재에서 시집을 펼치면서 아침을 시작한다. 시 한 편을 읽고 필사하면서 시어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기듯 적어나간다. 필사를 마치면 성우처럼 차분하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시를 낭독한다. 이렇게 마음의 평안과 고요함을 마주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에세이 쓰기를 배우면서 그 매력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에세이는 각 단편을 끊어서 읽을 수 있어 집안일을 하다가도 이어 읽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누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다른 작가들은 에세이를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하며 조민진 작가의 독서에세이 '내일의 가능성'을 읽기 시작했다. 다양한 책과 그림을 엮어 쓴 글이라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하는 나의 고민을 풀어줬다. 요즘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책 '파리는 날마다 축제','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고 있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의 일상을 기록한 책으로 인간적인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담겨 있어 천천히 음미하며 읽고 있다.
동화책조차 귀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먹고 사는 게 어려워선지 교과서 외에는 부모님이 책을 사준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나서야 용돈이 생기면 서점에 들러 안데르센 동화책이나 세계 명작들을 구입해 읽곤 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고전문학을 읽는 재미는 남다르다. 매일 점심을 먹고 나른해질 무렵 고전문학을 읽으면 흥미로운 스토리에 빠져 졸음을 쫓을 수 있다. 글쓰기에 관심이 생기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기도 하고, 새로 접하는 고전 속에서 어렸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발견하기도 한다. 감동받은 문장을 수집하면서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를 곱씹으며 인생의 참맛을 느끼고 있다.
난 요즘 책을 친구로 여겨서일까 전혀 외롭지가 않다. 책을 읽을 때는 작가와 대화를 나누듯 이야기에 빠져 마치 내가 그 삶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책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는데, 블로그에서 알게 된 '토론하는 밤길'이라는 독서 토론 모임 덕분이다. 한 달 동안 같은 책을 읽고 각자의 감상을 나누는 이 모임에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은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된다. 덕분에 독서에 더 깊이 빠져들고 책 읽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책을 읽다 보니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집에 책이 넘쳐나 더 이상 보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동안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며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을까 고민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의 도서 구입 원칙을 세웠다.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바로 사지 않고 나를 사색으로 이끄는 책인지부터 가늠한 후에 구입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쇼펜하우어 문장론'에서 "독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색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는 사상을 유도하는 역할로 충분하다"라고 말하며 다독이 사색을 방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멈칫했다. 나는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면 무조건 나에게 이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색이 없는 독서는 오히려 나에게 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책의 메시지에 질문을 던지며 읽어 나가는 독서는 나의 삶을 돌아보고 나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리라. 사색을 돕는 책읽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