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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보호자 되어보기

- 아버지의 유언

by 신백

(2023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아버지의 건강


우리 아버지는 1978년 지방에서 외과의원을 개원하여

지금도 건강하게 근무하고 계신다.


코로나가 한창인 2020년 겨울,

아버지께서 일어나실 때 어지럽다고 주저앉고, 걸으실 때 한 쪽으로 쏠린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내 전공분야이면서도 괜찮으시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응급실 가보시라는 권유에도

'약먹고 좀 쉬면 괜찮을 것 같다'는 아버지의 고집을 옆에 계신 어머님이나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자식들의 목소리만으로 꺾을 수는 없었다.



다음날 좀 쉬시라는 누나들의 만류에도 아버지께서는 괜찮다고 자의로 출근하셨다가

상태가 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응급실 갈 정도는 아니시라며

뇌사진을 찍으러 영상의학과에 가신다고 연락하셨다.


그러실거면 치료까지 하는 신경과나 신경외과에 모시고 빨리 가보시라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고

가까운 신경과에 이런 환자분이 가신다고 전화로 물어본 뒤 가능하다는 통화내용을 바로 알려드렸다.

그 때까지도 나는 괜찮으실 거야 이런 생각만 했다.


근처 신경과에서 진료 후 뇌사진을 찍으셨는데

작은 혈관이 막힌 것 같으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시라 하셨단다.

그제서야 아뿔사! 뒤통수가 멍해지면서 대구로 가는 기차에 황망히 몸을 실었다.



VIP 증후군


의사인 본인도, 의사 가족도 자신과 가족의 몸에 대해 정말 모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진들에게 'VIP신드롬'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중요한 사람일수록 진단, 치료 이런 것들이 깔끔하게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단 환자뿐 아니라 가족이나 본인에게도 해당하는구나 싶더라.

기차 안에서 혼자 눈이 빨개지도록 울면서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대구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라 보호자는 한 사람만 열과 QR 체크 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찍 와 계시던 작은 누님과 자형께 병원 밖에서 인사드리고

어머니와 바톤터치를 한 다음 그날 밤을 아버지 곁에서 의사가 아닌 보호자로 시중을 들었다.


아파서 응급실로 오신 분들이 얼마나 많으시던지,

오고가가는 간호사나 의사의 얼굴을 뵙기까지 한참 시간이 흘러야했다.

의사로 응급실을 드나들 때, 수많은 환자/보호자들이 가운 입은 사람만 지나가면 다 쳐다보기에

내 환자가 아니니 그런 시선을 애써 외면했는데,

보호자가 되어 응급실에 있는 시간과 의료진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은 낯설었다.



뇌사진을 다시 찍으니 안정을 취하면서 지켜봐야하는데

환자는 많고 병실은 없어서 응급실 침대에 누워 계시란다.

뇌경색 쪽이라 수술이 필요한 건 아니라 주사만 맞으셨다.

아버지와 내가 의사이지만 환자, 보호자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감정이 묘했다.


의료진이 얼마나 힘든지 이해는 하여도 보호자 입장에선 왜 그리 의료진이 야속한지 알 수 있다.

뭔지 몰라도 모든 것이 섭섭하다.

내가 담당의라면 이렇게 말했을텐데. 간호사라면 이렇게 했을텐데.

특별한 의도가 없는 말이나 말투 하나에도 왜 그런 식으로 말했을까?

환자/보호자를 안심시키는 말 한마디라도 더 듣기위해 신경이 쓰였다.


아버지가 편히 쉬지 못하실까 병상을 둘러싼 모든 방면으로 커튼을 치니

세상에 아버지와 나만 남이 있는 듯한 공간이 생겼다.

혹 뭐라고 하실까봐 환자침대 옆에 덩그라니 놓여있는

차디찬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주무시는지 일부러 감고 계신지 모를

아버지의 얼굴만 밤새 쳐다보는 시간도 낯설었다.

나 혼자 아버지와 둘이 남기도 오랜만이었다.



유언


커튼 너머로 발소리가 들리면 혹 의료진이 새로운 소식을 가져올까 바깥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간혹 저 옆에서 곡소리가 나면 죽음과 인생이란 뭔가? 철학자인 양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 응급실도 조용해진 뒤 아버지께서 눈을 뜨고 말씀하셨다.

'내가 죽으면 잘 먹고 잘 살아라.'

당신도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셨을까?

그리곤 다시 눈을 감으시곤 말씀이 없으셨다.


헤어질 때 원망을 담아 아니면 반대의 의미로,

혹 어떤이는 악담이나 모욕적인 언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런데 그 말 앞에 '내가 죽으면'이 붙으니까 음식을 삼키다 식도에서 멈춘 느낌이 들었다.

나중엔 이 말씀이 유언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안될 만큼 멍해졌다.

그냥 슬펐다.

나도 괜찮은 척 아무말없이 몰래 고개를 숙여 휴지인지 티슈인지 눈가를 닦았다.



중환자실


새벽이 되니 다행히 중환자실에 자리가 나서

(라고 쓰지만, 정상적인 퇴원 환자분이었다면 점심에 비었을 텐데

아무래도 중환자실에서 어떤 환자분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셨으리라 추측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빕니다.)

올라가니 거긴 보호자가 있을 수 없어서

간호사님들께 아버지 상태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고 짐을 챙겼다.


코로나로 인해 중환자 보호자들을 위한 대기실이 폐쇄되었으니

연락을 받으면 30분 (늦어도 1시간) 내로 올 수 있는 지척에 있으란다.


내가 중환자실을 나오는 순간 아버지께서 아프시다고 누워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셨다.

(우리 집안은 목소리가 크다. 그리고 아프다고 소리치는 환자치고 진짜로 많이 아픈 분은 별로 없다.)

그렇다, 아버지도 의료진이 말하는 소위 진상 환자였다.


당신도 얼마나 아픈 게 낯설었을까?

그래서 응급실에서 종일 기다린 인내심이 바닥나서 참을 수 없는 화를

아무 죄도 없는 간호사분들에게 투사하셨을까?


모든 것이 낯설고 서글펐다.



시간


2년이 흘렀지만

그때의 내 기억과 감정들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당시 나를 포함해 어머니와 누님들은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금은 원래 기능의 90퍼센트 정도 회복하셨다.

재활전문의가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를 정도다.


그래서 모두 감사하고 있다.

아버지가 계신 하늘 아래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아버지의 존재는 그런 거다.

아버지 사랑해요! 감사드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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