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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타타타 Dec 18. 2024

일단 펜을 들어라

피카소에게서 글쓰기를 배우다

미술을 가르치는 내 직장 동료는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고, 껍데기를 물으면 알맹이를 들려준다. 그래서 그와 대화할 때 나는 질문 하나라도 신중하게 하고, 그의 대답에 더욱 귀 기울인다. 며칠 전 식사 때 내가 물었다. “화가가 한 명 있는데, 그이는 미술 대학을 나와 후원자 눈에 띄어 지원을 받으며 그림에 전념하고 있으나 아직 전시회 한 번 못하고 있는데, 왜 그럴까요?” 그의 대답은 예상대로 길고 깊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길 말을 짧게 옮기고, 깊은 말을 얕은 말로 바꾸는 데 소질이 있다. 

    

그의 대답이다. “피카소는 뭘 그릴지 모르면 일단 붓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리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그림을 고친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려거든 일단 붓을 들라.’라는 피카소의 말은 미술계에서는 거의 격언으로 통합니다. 아마도 아직도 뭘 그려야 할지 모르는 그 화가에게는 일단 뭔가를 시작하는 액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실재 미술대학 다닐 때 스케치북 한 권 사놓고서는 한 학기 내내 그림 한 장 못 그리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일단 붓을 드는 일’이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의 대답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붓을 드는 게 어디 그림 그리는 일에서 뿐이랴?’

     

그가 들려준 피카소의 격언에 내가 크게 공감한 이유는 내 글쓰기에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글에 대한 구상이 완결되어야 비로소 글쓰기를 시작하는 내 습관을 고칠 방편이 될 것 같아서다. 매일 한 편의 글을 써보자는 결심을 한 지 여러 번이지만 지속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가 ‘일단 펜을 드는 액션의 부재’ 임을 알았다. 생각한 후에만 글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글을 쓰면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알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생각은 확장되고 정리되며, 무엇보다 익어간다.  

   

나의 글쓰기는 조각하는 것과 비슷했다. 조각가는 구상이 끝나야 원석을 자르고 쪼아 대강의 모양을 잡고, 파내고 갈고 다듬어 신비로운 형상을 드러낸다. 나도 구상이 끝나야 글을 시작한다. 처음 글을 거칠다. 그 글을 읽으면서 이쪽 글을 떼어다가 저쪽에 붙이고, 몇몇 단어를 바꾸어 매끄럽게 하고, 어떤 단락은 통으로 지우고 다시 쓴다. 그러기를 반복하면 글 모양새가 드러나며 읽을 만한 글이 된다. 여기서 문제는 시작이 어렵다는 것이다. 구상이 되지 않으면 시작을 못한다는 것이다. 구상이 끝나기 전에 자판 앞에 앉질 않고, 그러다 보면 글 쓰는 간격이 벌어지고, 급기야 글을 못 쓰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오호라! 이제 내 글쓰기는 피카소가 유화 작업과 닮아야 한다. "글을 쓰려거든 일단 자판 앞에 앉으라." 글을 쓸 때 일단 컴퓨터 앞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 막 쳐 넣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생각이 모여들어 단어가 문장 되고, 문장이 글 될 것이다. 지우고 또 고쳐 쓰다 보면 어느새 읽을 만해지고, 소리 내어 읽으면서 더 다듬으면 남들도 읽을 만한 글이 될 것이다. 이런 방식이 그림이나 글 쓰는 데에만 유용할까? 운동, 여행, 독서, 연주 그 무엇엔들 통하지 않을까? 뭔가를 하려거든 일단 첫 동작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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