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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계 Aug 22. 2023

염치없는 외로움(1)

현은 수가 애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도 남의 입에서. 


먼저 현이 어떻게 수와 연락하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두 달 전, 현은 5년 만난 애인이 있었다. 애인과의 관계는 무난하고 안정적이었지만, 장거리 연애라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는 구조였다. 현은 그런 관계 속에서 바쁜 애인을 대신해 항상 애인 쪽으로 가는 입장이었고, 그런 현의 노력을 애인은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현이 올 때마다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 관계가 2년이 되던 때였다. 현은 이 관계에 아무런 의심과 권태를 느끼지 않았다. 여전히 만나면 편하고, 말이 잘 통했으며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물론 어느 순간 섹스를 하지 않았지만.


현과 연락하는 그 사람의 이름은 '수'. 현의 학원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온 수의 첫인상은 '어리다'였다. 갓 20살이 된 수는 어렸다. 그리고 현의 이상형이었다. 애인도 있는데 어린애한테 이런 마음을 품으면 안 돼. 현은 마음을 다잡고는 했다.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 후, 수는 점심시간마다 같이 밥을 먹자며 현을 기다렸다. 현은 본인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생기는 일이 낯설고 어색하다. 그리고 어떤 밤, 수와 현은 전화를 한다. 

사실 지금의 현은 그날의 전화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나 싶지만, 그때의 현은 달랐다. 비 온 뒤라 세상이 젖어있던 새벽, 낯선 사람의 긴장감 있는 목소리, 은근히 현을 떠보는 수의 말들.

그날 둘은 마치 서로를 탐색하듯 질문하고 대답하고 이 짧은 밤을 아쉬워하며 전화를 이어나간다.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요즘 대학생들은 어떻게 연애해요?

좋아하는 영화는 뭔데요?

노래 추천 좀 해줘요.

현 씨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어요. 저는 원래 누군가를 생각하면 그때 자주 듣던 노래가 생각나거든요.


이런 대화들이 서로 오가며 현은 심란했다. 애인의 얼굴과 수의 얼굴이 한데 엉켜 달라붙었다. 나를 궁금해하는 질문들에 현은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그 몽롱한 열기와 긴장감이 싫지 않았다. 수는 마지막으로 현에게 말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사실 현은 지금의 애인을 만나기 전에도 몇 명 지나간 사람이 있었는데, 거의 모든 만남이 그렇듯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르는 채로 끝나곤 했다. 지금의 애인은 현의 인생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랑이라는 문구를 붙일 수 있는 관계였다.  희생, 질투, 집착, 애정, 애증 등 모든 감정을 함께 나눈 사람이었다. 


현의 애인은 현명한 사람이다. 인기도 많아서 처음 몇 년은 현이 열렬하게 따라다닌 적이 있다. 만나서 헤어지면 친구조차 못하잖아라는 애인의 말에 현은 그럴 일 없다며 자부했고, 애인은 12월 어느 눈 내리는 밤에 현을 받아줬다. 그때 현은 몽롱하게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한 것처럼 그 순간의 기억이 끊겨있다. 현은 본능적으로 안다. 이번에 애인과 헤어지면 죽을 때까지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이 현명하고 다정하고 착한 사람은 나와 평생 관련 없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걸.


처음 사귀고 둘은 놀이공원에 간 적이 있다. 현은 바이킹을 무서워하는 애인의 모습이 귀여웠다. 둘은 하루종일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줄이 얼마나 길든 상관하지 않고 둘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대관람차를 탔을 때, 둘은 그 안에서 첫 키스를 했다. 애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며 틀어놓은 이소라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는 관람차 안에서 달뜬 두 사람의 숨소리가 따라붙었다. 현은 첫 키스는 아니었지만, 그전에 만난 모든 사람이 잊힌 순간이었다. 현에게 있어 애인과의 일상은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 마음 그대로라면 평생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은 3년을 만나고, 장거리로 2년을 더 만났다. 사랑은 무탈하고 무난했다.


중간중간 현에게도 유혹의 순간들이 있었다. 같이 일하던 또래 동료의 연락, 은근히 들어오던 눈빛, 생일에 받은 작은 선물. 현은 스스로 생각해도 애인에게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았다. 동료의 연락은 적절히 선을 그으며 잘라냈고, 눈빛은 머쓱하게 받아쳤으며 선물을 받은 후에는 업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현은 그 모든 걸 애인한테 말할 수 없었다. 혹시 애인이 현을 오해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지를 준 거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렇게 현에게는 말하지 못한 찌꺼기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이번 수와의 관계도 그런 찌꺼기 중 하나였다.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이 왔는데 내 스타일이더라고. 이런 말을 도저히 할 수 없던 현은 원래 그랬듯 수의 존재를 숨겼다. 현은 수를 직장에서 만난 이상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했고, 이 관계 또한 무난히 지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수가 점심시간마다 현을 기다리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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